149. 흔들리는 판도와 전쟁의 서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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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흔들리는 판도와 전쟁의 서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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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흔들리는 판도와 전쟁의 서막 (1)
2023.08.02.
얼빠진 듯 가만히 선 시종들을 뒤로한 채 마델레이네 공작은 이를 악물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사납게 소리치던 제이드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공작을 채찍질했다.
“올리비아가 황궁에 있는 건, 자의가 아니랍니다!”
지난밤, 새벽 늦은 시간에서야 저택에 돌아온 제이드는 혼자가 아니었다.
형편없는 꼴이 되고도 눈빛만은 매서운 기사 둘과 연두색 눈의 기사, 그리고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자까지 총 넷.
공작은 그 넷 중 셋이 수감되어 있던 자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제이드는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요란스러운 소리에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하나둘 나오는 사이, 제이드는 반쯤 돌아간 눈으로 고함을 쳤다.
“태자가, 비칸데르의 기사들을 내걸고 협박을 했답니다. 그래서, 걔가 황궁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그는 스스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 뭉개진 나머지 말을 유추한 순간 마델레이네 공작, 지오반니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아연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물에 젖은 듯 먹먹한 귓가에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저, 때문이에요!”
아버지와 얼굴 맞대는 것조차 기피하던 에셀라는 울먹이면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수많은 사용인들이 보는 앞에서 지오반니에게 매달렸다. 당황한 베로니카와 하녀 샐리가 뛰어와 그녀를 일으켜 세워도 소용없었다.
“아버지 제발요. 제가, 언니한테 태자 전하의 편지를 함께 전했어요.”
지오반니는 처음으로 눈물 한 방울조차 애달픈 딸보다, 멀리에 있을 올리비아를 먼저 떠올렸다. 그렇게나 무서워하던 황후를 만났다는 그 애는, 태자의 강압에 따라 지금 황궁에 있을 그 애는…….
“안 그러면, 정말 다 죽인다고 해서.”
젖은 음성 위로 울음조차 내뱉지 못하던 그 얼굴이 떠올랐을 때, 지오반니는 심장을 도려낸 듯한 선뜩함을 느꼈다.
구해야 한다. 한 번 정도는, 후회 대신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을, 지오반니는 물론 콘라드와 제이드까지 명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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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알현을 요청한다는 말에 레오포드는 부리나케 알현실로 뛰어 들어갔다. 설마 사라진 올리비아가 향한 곳이 공작저라도 되는 모양일까?
그래서 놀란 공작이 바로 저를 보러 오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알현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흐트러진 머리조차 다듬지 못한 공작이 다급하게 입을 여는 것을 보자마자 레오포드는 알아차렸다.
“……제 딸은, 어디에 있습니까. 전하……!”
비통하게 쏟아져 나오는 저 말은, 결코 레오포드에게 이득이 될 만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올리비아의 행방은 다시 원점이었다. 마법사도 추적하지 못하는 곳이라면……. 결국 대공성이라는 걸까.
그래서 레오포드는 기민하게 이 순간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입속으로 말을 굴렸다.
“……내 비가 될 이이자 그대의 딸인 공녀는…….”
간절한 눈이 레오포드를 향했다. 레오포드는 얄팍하게 눈매를 접었다.
“……지금 이 순간 납치를 당했네.”
“전하!”
“비칸데르…….”
순간 공작의 눈이 급살이라도 맞은 듯 커다래졌다. 철혈의 공작이라기에는 생생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레오포드는 눈살을 찌푸리다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지금은 저렇게 감정적인 게 좋았다.
“……대공에 의해 말이지.”
감정적인 만큼, 멋대로 손아귀에 넣고 이용하기에 좋을 테니 말이다. 레오포드는 입술만 달싹이는 공작이 더 말을 하기 전에 입을 막듯 흰 손수건을 흔들어 보였다.
“뿐만 아니야. 비칸데르는 내게 이걸 던졌지.”
지금, 제게 이 손수건을 던진 건 올리비아가 아닌 비칸데르의 뜻이어야 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뚜렷한 증오를 담고 읊조렸다.
“선전포고가 들어왔는데. 제국이 이렇게 맥없이 당해서야 쓰겠나.”
레오포드는 느리게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어느샌가 침착함을 찾은 듯 공작이 진중하게 입을 다물었다. 저 반짝이는 은발을 보자, 다 세어 버린 흰 머리로 멍하니 타 버린 초상화만 쓸어내리던 제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제 더 이상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분.
그래도 아들이 된 입장에서 그 마지막 행보는 지켜 드려야지. 레오포드는 씩 웃으며 느리게 말했다.
“회의를 소집하게. 공작.”
“…….”
“비칸데르와 전쟁을 위해.”
“폐하께서는, 전하의 뜻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레오포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 하긴, 완전한 거짓이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 황제의 관심사는 오로지 망국 공주의 초상화뿐이었으니까.
그토록 애틋해하는 초상화만 끼고 사신다고 한다면, 얼마든 비칸데르를 뒤져서라도 초상화 하나 정도는 구해 드릴 수 있었다.
물론 저는 비칸데르의 막강한 부와 올리비아까지 둘 모두를 손에 얻을 테고 말이다.
순간, 마델레이네 공작이 휘청였다. 힘없이 기우는 그 모습을 보며 레오포드는 혀를 찼다.
이제 모든 가문에서 세대교체라도 필요한 모양이었다.
* * *
벌써 몇 번째 긴급회의 소집인지 몰랐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입궁한 귀족들의 얼굴에는 귀찮은 기색이 다분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회의는 그저 서로의 이권을 탐하고 확인하는 명분의 장이었는데, 요 근래의 귀족 회의는 참석할수록 쥐고 있던 이권마저 빼앗기게 생겼다.
하지만 대회의장에 들어섰을 때, 귀족들은 조금 당황했다.
마델레이네 공작의 자리에는 소공작이 앉아 있었다. 대리로 온 것을 표 내듯 다가오는 귀족들의 인사에도 고개만 끄덕이던 소공작은 회의가 시작했을 때에야 일어나 발언했다.
“송구합니다. 전하. 부친이 몸이 좋지 않아 대리 참석했습니다.”
“하긴. 아까 안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얼굴색이 좋아 보이지는 않더군.”
여태껏 단 한 번도 마델레이네 공작이 회의에 불참한 적은 없었다. 오죽하면 철혈이라고 불릴까. 설마 정말로 몸 상태가 좋지 않기라도 한 걸까?
추측이 난무하던 대회의장은 태자가 안건을 꺼낸 직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귀족들이 모두 제 귀를 의심하는 사이, 코모데 백작은 비명처럼 소리쳤다.
“비, 비칸데르와 전쟁이라뇨!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대회의장에 있는 모두는 코모데 백작이 삼킨 말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제국이 타국과 전쟁을 벌이는 일은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내분이라니……! 이건 모양새를 떠나 제국에 위협이 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하필 가장 강한 힘의 대공가라니!
와글와글 반발하던 귀족들을 단숨에 꺾은 것은 이어진 태자의 말 한마디였다.
“……내 보기에는 모두가 대공의 요구 사항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군.”
전쟁의 배상금과 광물 세액의 비율.
그것만으로도 몇몇 귀족들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 말에 귀족들은 태세를 바꿔 눈에 불을 켠 채 전쟁의 명분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태자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처음에는 전쟁의 배상금을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돌리더니, 광물 세액조차 터무니없는 비율로 조정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광물 세액 협상의 대표로 나선 엘킨 공작을 감금하고, 지엄한 황궁에서 공녀를 납, 세상에. 저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하겠습니다.”
제국의 귀족을 납치한 것으로 모자라 태자의 약혼녀까지 납치라니……! 분명 성녀라 떠받들어지는 그 이미지를 이용하기 위해서가 분명하다며 귀족들은 서로 입을 맞추었다.
레오포드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잘 짜여지는 판을 바라보던 찰나, 누군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발언했다.
“하지만, 이 삼엄한 황궁에서 공녀가 납치되다니요.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말씀하실 때 뭘 들었소? 공녀를 인질로 삼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소!”
“제 말은, 그러니까.”
화이트 남작은 난처한 얼굴로 여러 번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골랐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콘라드를 힐끗했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는 그가 대회의장에 들어오기 전에 무심히 했던 말, 그 말을 그대로 읊었다.
“……마법 결계와 경비로 가득한 황궁에서 대공이 공녀를 데려갈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게 우려스럽다는 말입니다.”
그제야 귀족들은 저희가 놓쳤던 점을 깨달으며 아차 했다. 순간 대공의 위세를 망각했다. 그 어수선한 분위기에 힘을 얻은 듯 남작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 대공과 전쟁이라면……. 분명 승패야 제국의 손에서 결정되겠지만 굳이 저희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 어떤 귀족도 위험성에 대해서는 말을 삼갔다.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보았고, 대회의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도사릴 때였다.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서, 어떻게 비칸데르가 제국에게서 탈취하려 하는 것을 원상태로 복구시킨단 말이오.”
느른한 목소리의 태자는 빙그레 웃으며 대회의장의 귀족들을 살폈다. 그리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우리에게는 대의를 위해 함께할 동맹국이 있지. 비칸데르 대공령에 동맹이 있을까?”
“…….”
“제국과 함께했기에 그들의 전투력이 높았던 것이지, 제국에 대한 충심을 버리고 부를 취하려 하는 순간 그들은 결코 명예로운 기사가 아니야. 그저…….”
형형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아침 햇살에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지금의 태자와 똑 닮은 초대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귀족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태자의 말을 들었다.
“……북방의 야민인들일 뿐이지.”
고귀한 대공가를 그저 야만인으로 격하하는 무심한 목소리에 귀족들의 흥분감이 고조되었다.
살육귀에 이은 야만인이라니.
대공을 얕잡는 단어가 하나 더 늘어났다. 저들보다 한참 높은 계급에 있던 자가 권력의 최정점에 의해 헐뜯어지고 끌어내려지는 건 아주 달콤했다.
그리고 그 달콤함은 귀족들로 하여금 태자의 말에 서서히 잠식되게 만들었다.
“그런 그들이 제국이 만들어 준 막강함을 소유하고 있는 게 올바르다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강한 부정들이 곳곳에서 빗발쳤다. 부유함과 강인함. 제국을 지탱하던 대공가의 축출은 새로운 권력 구도를 만들 것이다. 그 권력의 쟁점에 자신들의 가문이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교묘하게 귀족의 판도를 흔든 레오포드는 달게 웃었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있는 마델레이네 소공작에게 시종을 보내 언질했다.
“회의가 끝난 뒤, 소공작은 잠시 기다리게.”
시종의 언질을 들은 소공작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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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작을 알리자 모두가 준비에 바빠졌다. 물밑에서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 이들은 다투듯 채권을 담보로 무기를 사려 했고, 용병을 비롯해 가문의 기사를 모았다.
그 와중에 레오포드는 하지스 백작에게 선물 꾸러미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소공작을 향해 말했다.
“마델레이네 공작에게 병문안의 선물이라도 보내려 했는데. 공작저에 같이 가면 좋지 않겠는가?”
“바쁘신 와중에 신경 쓰시는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대신 전달할 테니…….”
“그럴 수야 없지.”
무심한 말투와 가늘게 좁힌 눈. 마치 뱀처럼 상대를 탐색하는 시선은 끈적하게 콘라드의 곳곳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래도 명색의 내 장인이 될 이가 아닌가. 성의를 표하고자 하니 하지스 백작과 동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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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델레이네 공작이 그냥 쓰러질 이가 아니지. 가서 이상한 점이 없나 확인해.”
“이상한 점이라고 하시면…….”
“올리비아와 관련되어 보이는 것 전부.”
하지만 태자의 말과 달리 공작저에는 이상함 따위는 없었다. 탐색을 마친 하지스 백작은 짧게 결론을 내렸다,
혈색 없는 마델레이네 공작과 붉은 눈으로 그를 간호하는 작은 공녀. 그리고 침울한 기색의 망나니 같은 제이드 마델레이네.
심지어 공작저 사용인들마저도 몸져누운 공작을 걱정하기에 급급했다.
“……다시 한번 쾌유를 바랍니다.”
하지스 백작은 깍듯하게 소공작을 향해 인사를 마친 뒤 황궁으로 복귀했다. 미간을 찡그린 태자는 하지스 백작의 보고에 김이 샌 얼굴로 다음 용건을 물었다.
“그렇다면……. 동맹국들에 서신은 보냈고?”
“……오슬란 왕국을 제외하고 모두 완료했습니다.”
“오슬란은 왜, 아.”
레오포드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기세를 눌러 놓기 위해 중간 귀족한테 보냈더니. 발칙하게도 마리아가 왕자의 정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다시 떠올랐다.
“……뭐, 왕국 하나 정도야 빠진다 해서 다를 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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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스 백작의 마차가 돌아간 뒤에도 태자의 감시자들은 제법 오랫동안 마델레이네 공작가를 살폈다.
날카로운 눈으로 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디안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에야 집사와 에셀라의 시녀인 베로니카는 공작저 사용인들에게 연극이 끝났음을 알렸다.
앓는 듯 누워 있던 공작이 눈을 떴다. 태자의 앞에서 쓰러질 때와 달리 형형한 그의 눈은 그는 지척에 서 있는 붉은 머리의 기사에게 닿았다.
“……납치라면, 올리비아가 황궁에 없다는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