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 광산이 봉인했던 비밀 (2) (148/151)


#148. 광산이 봉인했던 비밀 (2)
2023.07.30.



 
올리비아는 숨을 삼켰다.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었다. 에드윈은 언제나 제게 큰 성 같은 사람이었다. 단단한 믿음을 주던 사람이니 그저 저도 지켜 주고 싶었던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처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귓가에 닿는 한숨이 무거웠다. 떨리는 입술 사이에 갇힌 말은 탁음으로 흩어졌다.

목 안쪽에 갇힌 호흡이 차가워서, 꼭 한기가 온몸을 휘감은 느낌이었다. 마치 올리비아에게 남은 온기는 에드윈이 기댄 어깨를 통해 퍼지는 다정함이 유일한 것처럼.

그래서 결국 올리비아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제, 책임이라고 생각했어요. 태자가 두 기사를 감금한 건, 결국 저 때문이니까.”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녀의 입속을 맴돌던, 변명 같은 말이었다.

맥박이 세차게 뛰는 와중에도 고저 없는 에드윈의 말은 선명하게 들렸다.


“그렇게 협박을 해서라도 그대를 황궁에 오게 하던 놈한테 넘어간다면, 그대가 위험할 거는 생각도 안 하고?”

“저는…… 괜찮을 거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어깨에 닿는 온기가 사라졌다.

올리비아의 초록색 눈동자가 겁에 질린 것처럼 흔들렸다. 맥없이 떨어진 손이 에드윈을 잡기 위해 몇 번이고 헛손질했지만, 에드윈은 평소처럼 올리비아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난 채로 덤덤하게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늘 애틋하던 시선이 사라진 붉은 눈은 놀랄 만큼 시려서, 올리비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손목에 멍이 들던 날에도.”

하지만 나직이 읊조리는 말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세누아의 계곡에서 떨…….”

에드윈의 커다란 주먹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간 멈췄던 말이 느리게 이어졌다.


“……떨어졌던 날에도. 올리비아는 그렇게 말했잖아요. 괜찮다고.”

순간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그날, 그녀를 껴안던 에드윈의 떨리던 손이 떠올랐다.


“그래서 올리비아가 믿어 달라는 대로, 나는 이제까지 믿어 줬고.”

저택에서 제가 믿어 달라던 말에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조심하라 했던 에드윈도.


“하지만 결국 위험해졌었죠. 내가 정말로 모르는 사이에.”

지금처럼 붉어진 그의 눈매도, 전부 다.


“……어쩌면, 정말 내가 몰랐고 아직도 모르는 또 다른 위험이 있었을 수도 있겠죠.”

비수처럼 날카로운 물음들.

그 끝에 닿은 게 결국 올리비아를 향한 걱정과 그 자신을 향한 실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올리비아는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삼켜야 했다.

제 생각이 짧았다. 늘 에드윈한테 기대 달라고 했으면서, 정작 저는 그를 지켜 준답시고 그가 보낸 신뢰를 저버리고 말았다.

올리비아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눈에 힘을 주었다. 눈앞이 눈물로 흐려졌지만 힘을 꽉 주었다.

에드윈이 마른세수를 했다. 광산의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창백한 얼굴에 올리비아는 뜨거운 말을 속으로 넘겼다.


“……나는 올리비아를 지지하지만, 그건 올리비아의 안전이 보장되었을 때의 이야기예요.”

“……안 그럴게요. 정말 다시는, 말 안 하고는 어디도 가지 않을게요.”

갱도를 울리는 목소리가 가냘팠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동그란 어깨가 자꾸만 흔들렸다.

울음을 참는 듯 꽉 쥔 주먹과 힘껏 깨물어 붉게 번진 입술을 보는 순간, 에드윈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올리비아를 껴안고 중얼거렸다.


“……이것 봐. 이러면 속부터 상해서 말도 못 하겠어요.”

품에 안긴 몸이 한없이 작았다. 에드윈은 느리게 올리비아의 작은 등을 다독였다.

고집 센 제 아가씨는 잘못 생각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울음 섞인 말만 앵무새처럼 웅얼거렸다.

그리고 에드윈은 그 말을 들으며 느리게 입술 끝을 올렸다.

거짓말.

에드윈은 제 가슴 위에 퍼지는 올리비아의 말들을 믿을 수 없었다.

잘못 생각했다고 말은 잘하면서, 올리비아는 정작 무엇이 잘못된 지를 몰랐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녀의 사람이 위험에 처했다면 가장 먼저 위험 속으로 들어갔다.

스스로의 안전과 위험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마치 오랜 시간 전쟁에서 위험에 무뎌진 수많은 기사들처럼.

올리비아가 어떤 환경에서 컸는지도 알고,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도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평생을 그렇게 혼자 살아와서, 단숨에 그녀를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를 한다는 것과 그녀가 부나방처럼 위험에 몸을 던지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는 것은 다른 차원이었다.


“……올리비아를 행동하게 한 마음이 아무리 선의에 의해서라도, 이제 더 이상은 그걸 두고만 볼 수 없어요.”

에드윈의 말에 올리비아는 고개만 끄덕이며 와락 그를 껴안았다. 다시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작은 손아귀가 매달리는 힘에 에드윈은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정말 조금만 덜 용감했더라도……. 조금만 덜 빛났더라도…….

하지만 그 조금이 덜했다면 올리비아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에드윈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떻게 해야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뛰어들지 않게끔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베서니와 눈이 마주친 순간, 새로운 깨달음을 발견한 것처럼 붉은 눈 위로 이채가 돌았다.

올리비아가 빠른 시일 내에 바뀔 수 없다면. 그리고 에드윈도 그런 올리비아를 말릴 수 없다면.

……그러면 위험한 상황 자체를 없애 버리면 된다. 이미 비칸데르가 만반의 준비를 끝낸 것처럼.


“……내가 잘못 생각했네요.”

“네?”

단조로운 중얼거림에 올리비아가 되물었다. 결국 꼭꼭 눈물을 참은 작은 얼굴을 보며 에드윈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리고 유리 세공품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눈가를 쓸어 주며 말했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위험한 상황 따위는 없을 건데.”

“……에드윈?”

“올리비아. 나는 곧 황궁으로 갈 거예요. 비칸데르의 기사들과 함께.”

올리비아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도는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가 피를 볼 수 있다는 선언.


“비칸데르의 기사들과 정보상을 구하고, 황궁과의 관계를 확실히 뒤집어 버릴 거예요. 다시는…… 그들이 우리의 평화에 그 어떤 해도 가할 수 없게.”

예견된 미래를 읊듯 에드윈의 목소리에는 한 점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올리비아도 피 흘릴 상황을 피하겠다며 제가 대신 나설 생각이 없었다.


“……다행이에요.”

예상과 다른 대답이었는지, 에드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냐하면…… 제가 태자의 얼굴에 손수건을 던지고 왔거든요.”

“올리비아, 그대가?”

“물론, 반은 선대 대공비 전하의 뜻 때문이었지만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 에드윈이 순간 눈을 깜빡였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의 끝에서 설마 하는 기대감과 그럴 리 없다는 흐릿한 초조함이 가득 찼다.


“……올리비아.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거예요. 베서니, 설마 베서니가 힘을 과하게 쓴 거야?”

베서니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고했다.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저희를 이 광산으로 보내셨어요.”

“그럴 리가. 어머니는…….”

“……황제 궁 침실 가장 깊은 곳에, 선대 대공비 전하의 초상화가 있었어요. 보존 마법이 걸린 상태로요.”

혼란으로 가득 찼던 에드윈의 얼굴에서 순간 표정이 걷혔다. 제 귀를 의심하는 얼굴은 천천히 베서니를, 그리고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설마…… 설마…….

부정을 바라고 본 얼굴들은 침묵으로 그의 생각이 맞는다는 것을 표했다. 에드윈은 언젠가부터 짐작만 하던 황제의 의도를 명확히 간파했다.

결국 제 어린 시절을 힘들게 만든 건, 십여 년간 아버지가 죽은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건. 끝내 어머니가 비칸데르를 대표해 황궁으로 갔던 건…….

결국 다.

하……. 텅 빈 입술 새로 헛헛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텅 비고 참담한 얼굴에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손만 꽉 잡았다.

광산의 입구를 통해 들어온 바람이 구슬픈 소리를 내며 갱도를 휘감았다. 그 소리에 끝에서 올리비아는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 초상화에서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남기신 염원을 들었어요.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는…….”

바로 올리비아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올리비아는 최대한 선대 대공비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말했다.


“로웰과 비칸데르의 후손인 에드윈이 능히 이 광산을 되찾을 만큼 강해지길. 평생토록 사랑하며…….”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게 닿던 따뜻한 온기만큼이나 다정한 기운이 그에게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셨어요.”

에드윈의 눈동자가 젖어 들었다. 올리비아는 에드윈과 마주 선 그대로 그의 손에 감긴 목걸이의 마석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저는 그 진심을 바탕으로, 영원토록 에드윈의 행복을 바라며 이 광산의 비밀을 풀어 보려고 해요.”

“아, 가씨? 설마……!”

숨죽이고 있던 베서니가 비명처럼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는 바로 맞추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베서니와 에드윈 둘 모두를 바라보았다.


“네.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아주 잠시 보여 주셨어요. 이 광산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방법을.”

 

.
.
.

적막한 광산에서 올리비아는 느릿하게 허밍을 시작했다. 선대 대공비의 음율이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발화되는 음은 아주 오래전 그녀의 어머니가 불러 주었던 음과 같았다.

가느다란 미성이 바람을 타고 갱도 안으로 퍼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귀에 익은 듯한 음에 고개를 까딱이던 에드윈의 눈이 커다래졌다.

올리비아가 부르는 이 노래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간혹 그에게 불러 주었던 노래와 똑같았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에드윈과 올리비아의 손을 휘감은 목걸이의 마석에서 찬란한 초록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살랑이는 미풍처럼 다정한 온기와 세누아의 계곡에서 맡은 듯한 신선하고 달콤한 풀과 꽃 내음들.

순식간에 오감을 아우르는 기운에 에드윈은 이를 악물었다. 평안해 보이는 올리비아와 달리 맞잡은 그는 손끝을 타고 찌릿찌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충만하게 차올랐다.

숨이 벅찰 만큼 묘한 기운이 전달되었을 때, 에드윈은 달콤한 바람의 끝에서 조금씩 선명해지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명히 행복해질 거야. 그토록 바랐던 대로.”

경쾌한 웃음이 담긴 목소리는 마법처럼 사라졌다. 에드윈은 눈을 깜빡이며 목소리가 사라진 길을 바라보았다.

척척하고 어두운 광산은 마석의 빛으로 가득 찼다. 광산 벽면은 마석이 반짝일 때마다 공명하듯 반짝임을 더해 갔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탈피하듯 갱도의 돌이 사라져 갔다. 숨겨진 속내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에야 올리비아는 읊조리던 기도를 마친 채 눈을 떴다.

사방이 번쩍거렸다. 초록빛을 품은 투명한 보석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했다. 올리비아도, 에드윈도 처음 보는 이 광경에 눈만 깜빡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묘하고 정순한 힘이 차오르는 보석이 무엇인지, 차마 벅차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사이에 숨넘어갈 듯 헐떡이며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베서니는 제 손끝으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가 아, 하고 탁음을 뱉었다. 번개처럼 반짝이는 마법이 절로 튀어나왔다.

어린 시절 이후로 이렇게 마력이 터질 듯 꽉 찬 것은 처음이었다. 설명할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마, 마……!”

메마른 백수정 광산이라는 허울 아래 숨겨져 있던 로웰의 비밀, 마석이었다.


 

* * *

어슴푸레한 아침.

마델레이네 문양의 마차가 태자 궁 앞에 급하게 멈춰 섰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선약이 있으셨나? 시종들은 태자의 일정을 떠올리며 마차로 다가갔다.


“공작님을 뵙,”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문을 열던 시종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델레이네 공작의 복장은 태자를 만나기에 적합했지만, 은색 머리는 세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토록 흐트러진 공작이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