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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광산이 봉인했던 비밀 (1) (147/151)


#147. 광산이 봉인했던 비밀 (1)
2023.07.26.


근래 들어 에드윈은 제가 빼앗겼던 어린 시절을 다시 선물 받는 달콤함에 휩싸였다.

따뜻한 온기와 안정이 가득한 대공성, 가장 좋아하시던 방에 누워 있는 아버지, 그리고…….


“전하. 어김없이 편지가 왔습니다!”

사람 감질나게 도착하는 올리비아의 편지까지. 그 모든 것들은 아주 안락했고, 즐거웠고 확답받은 선물을 기다리는 듯한 적당한 갈증을 선사했다.

그래서 에드윈은 방금 받아 든 편지 봉투 위의 필체를 보는 순간, 현실에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행복하고 평화롭지만 아직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현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오늘도 내내 기다리…….”

익살스레 웃던 브록은 편지 봉투가 북 찢기는 소리에 말을 멈췄다. 선대 대공의 건강을 살피던 제룬과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대공은 아가씨의 보라색 편지 봉투를 저렇게 찢어 버린 적이 없었다. 브록이 눈치를 보는 사이, 대공은 빠르게 편지를 펼쳐 읽어 내렸다. 그리고 편지는 평소처럼 소중히 접으며 읊조렸다.


“……지금 당장 트리스탄으로 출발할 준비를 갖춰. 이 편지를 배달한 잡부를 다시 잡아 트리스탄에서 이곳에 오는 동안 이상한 소문 있었는지 확인하고.”

“예?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편지는 분명 리브의 필체인데, 봉투는 아니야.”

 


“그야 당연하지. 리브의 필체는 이미 외우고도 남았는데.”

 
순간 브록은 이전에 들었던 대공의 말을 떠올리고는 급히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에드윈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찢어진 편지 봉투를 주먹에 가두었다.

편지의 내용에는 그 어떤 이상함도 없었다. 다른 건 오직 봉투의 필체뿐이었다. 편지 봉투에 올리비아가 아닌 다른 이가 글씨를 적어 넣었을 경우의 수는 세 가지 정도였다.

트리스탄에서 너무 바쁜 올리비아가 누군가에게 대신 써 달라고 했거나, 잡부에 의해 배달되는 만큼 누군가 편지 봉투를 열어 본 뒤 다시 쓴 편지 봉투로 바꿔치기했거나, 최악으로는…….

올리비아한테 무슨 일이 생겨 그녀가 직접 쓸 수 없었거나.

뭉근하고 따뜻한 공기 중으로 날카로운 기세가 새어 나갔다. 그러다가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윈은 얼른 제 기세를 갈무리하며 아버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평화로운 얼굴, 날이 갈수록 힘을 더해 가는 말랐지만 단단한 손과 그 손에 감아 둔 마석 목걸이까지.

에드윈은 물끄러미 아버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실종 후 사망했다고만 생각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생환에 취해, 에드윈은 잠시 잊고 있었다.

이 평화로운 행복을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룩한 막강한 힘이 언제고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자각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언제나 선대 대공의 건강을 위해 빛이 들어오는 것조차 조심하던 브록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문을 닫은 뒤 울분을 토해 냈다.


“칼터 경과 인터필드 경이 황궁에 구금되었다고 합니다!”

“……뭐?”

“제도에서 쉬쉬하느라 아주 은밀하게 소문이 퍼진 터에 지금에서야 비칸데르령에 닿은 모양입니다! 며칠이나 지났는데 소벨에게조차 연락이 안 온 걸 보면 분명 제도의 대공저에도 감금이라든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구금이라니……! 광물 세액 조정을 하기 위해 남은 비칸데르의 가신을……!

분노에 찬 브록은 수염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대공의 말을 기다렸다. 가라앉았던 그의 기세가 주변을 압도하듯 점점 매섭게 날카로워지던 찰나였다.


“……!”

갑자기 대공이 통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몇 초 뒤, 멀리서 느껴지는 강한 폭발력에 브록 역시 통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건, 분명……. 와, 왕손 저하?”

제룬의 목소리가 커졌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초록색 빛무리. 그건 지난번 올리비아가 기도할 때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두 번째여도 여전히 경이로운 기운에 모두가 말을 잃은 사이, 선선한 바람에 섞인 빛무리는 느린 속도로 에드윈에게 다가갔다.

뺨에 닿는 선선한 공기, 그리고 따뜻하게 감싸는 익숙하고 애틋한 기운. 이건 올리비아에게서 느껴졌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처럼……!

에드윈의 눈이 커다래지는 사이, 이제 알았냐는 듯 뺨을 콕 찌르듯 가벼운 장난을 친 빛무리는 이내 에드윈에게서 선대 대공으로 옮겨 갔다.

누워 있는 선대 대공을 한 번 더 감싸 안은 바람은 마지막 춤을 추듯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선대 대공의 얼굴 위에서 녹아 사라졌다.

반짝이는 빛무리가 스며든 얼굴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선대 대공의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갔다.


“아, 아버지?”

에드윈은 침대 가까이에 붙어 선대 대공을 불렀다. 몇 번의 깜빡임이 눈동자 위를 스치더니 에드윈과 똑같은 붉은 눈 위로 천천히 투명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에드윈은 아버지의 손을 꽉 잡으며 되물었다.


“아버지, 정신이 드세요?”

“……광산, 으로 가렴. 에드윈.”

“그게 무슨,”

“……내 비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렸다. 동시에 에드윈의 심장이 아득하게 떨어졌다. 지금, 아버지도 그와 같은 것을 느끼신 듯했다. 그 빛은 정말, 어머니의 마지막 인사였던 게 분명했다.

아릿한 통증에 에드윈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손만 잡았다. 점점 힘이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이 곧 에드윈에게 마석 목걸이를 건네었다. 그리고 애써 휘어 웃듯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마지막 말을 맺었다.


“내 비가, 그 애를 지켜 주었어.”

눈매를 타고 관자놀이로 눈물이 떨어졌다. 베갯잇에 동그랗게 남은 한 방울을 위로하듯 선선한 바람이 방 안으로 불어왔다 완전히 사라졌다.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닿은 간절한 안녕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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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정 광산에 다녀올 거야.”

선대 대공의 방을 나서기 무섭게 대공이 말했다. 브록은 우직한 충성심으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가 따르겠습니다. 전하. 바로 준비를,”

“아니. 경은 성에서 출정 태세를 갖춰.”

“……!”

등골이 오싹해졌다. 순간 브록은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출정이라니……. 뻣뻣하게 굳은 채 차마 고개도 못 드는 브록을 보며 에드윈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계획을 변경하지. 겨울이 될 것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당장 끝낼 거야.”

“…….”

“그러니 광물 채굴이 끝나는 시점에 출정하기로 해서 지금은 경계 확인 작전을 펼치고 있는 병력 전부 모아. 현 시간부로 3시간 이내에 출정할 수 있게끔 태세를 갖추도록.”

“명을…….”

브록은 이를 악물고 대공의 눈을 마주 보았다. 냉혹하게 가라앉은 두 눈, 그 안에 타오르는 새빨간 분노. 브록은 그 눈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았다.

비칸데르에 충성을 맹세하면서부터 언젠가는 오겠지, 하며 비칸데르의 모두가 염원하던 날에 당도했다.


“……받들겠습니다. 전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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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이라 불리며 도통 밖으로는 나올 생각을 않던 비칸데르는 진격의 준비를 시작했다. 초마다 기세를 높이는 비칸데르 성을 뒤로한 채, 에드윈은 턱 끝까지 숨이 차도록 말을 달렸다.

목에 걸린 목걸이가 찰랑이고, 손에 쥔 찢긴 봉투가 너덜너덜하게 흩날리는 동안에도 에드윈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광산으로 가라니. 게다가 어머니가 올리비아를 지켜 주었다니.

아버지의 이야기는 올리비아가 위험에 빠진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트리스탄에서 올리비아를 위협에 빠트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선뜩한 긴장이 팽팽하게 에드윈의 심장을 쥐어짰다. 그러는 사이 광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베서니가 올리비아와 동행한 뒤, 광산은 비어 있었다.

혹시 베서니가 올리비아에게 순간 이동 마법이라도 건 걸까?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베서니의 마력이 점점 줄어들어 그 정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에드윈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멈춘 에드윈은 황급히 광산 초입을 살폈다. 기척 한 점 없는 곳에는 당연하게도 올리비아가 탔을 법한 마차나 디안의 말은 없었다.


“올리비아!”

에드윈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앙상한 나뭇가지 휘둘리는 소리가 스산했다.

에드윈은 광산 입구로 들어가며 올리비아의 이름을 불렀다. 번지는 제 목소리 사이로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며 울리는 소리가 더해졌다.

곧게 뻗은 길을 정신 없이 뛰어 들어가는 도중, 갑자기 멈춰 선 에드윈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목에서 달랑이던 마석 목걸이를 잡아채듯 뺐다.

셔츠 깃에 달랑이며 부딪히는 마석에서 초록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광산 안으로 향할 때마다 그 반짝임은 더 빨라지고 있었다.

설마 이 반짝임의 끝에 올리비아가 있는 걸까……?


“……드윈? 에드윈?”

“전하……? 전하!”

생각이 닿는 동시에 안쪽에서 올리비아와 베서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비아!”

“에드윈!”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초록빛이 순식간에 올리비아를 향해 다가왔다. 어둠 속에 익은 눈에 에드윈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올리비아는 눈물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한달음에 그녀에게로 다가온 에드윈은 올리비아의 얼굴을 확인하는 동시에 품에 안았다. 아까 자신이 도착한 곳이 광산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펑펑 운 베서니는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

등을 매만지는 손이 다정했다. 정말 여기가 비칸데르, 그것도 백수정 광산이구나. 안도감에 몸이 녹아내리다가도 두고 온 기사들의 생각에 올리비아는 몸을 곧추세웠다.


“언제 돌아온 거예요, 리브. 왜 성으로 안 오고, 여기로……. 아니, 어떻게 여기로 왔어요. 설마 베서니가?”

“에드윈이야말로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에드윈. 아니, 심지어 마석 목걸이도 가지고……!”

벅찬 마음에 올리비아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맞춘 것처럼 에드윈이 이곳에 있을까. 그것도 마석 목걸이도 가져온 채로……!


“설마,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에드윈한테도 이곳으로 오라고……?”

다정하게 뺨을 쓸어 주던 에드윈의 손이 멈췄다.


“무슨 말이에요. 올리비아. 나는 아버지가 가라고 하셔…….”

에드윈의 말이 뚝 끊어졌다. 간절하게 에드윈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올리비아는 붉은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아차 하며 어깨의 숄을 내렸지만 소용없었다.


“이 옷은 다 뭐고. ……디안은요. 트리스탄에서 함께 왔을 거잖아요.”

황궁의 문양이 찍힌 드레스와 숄. 황궁에 감금되었다는 제 두 기사. 동시에 몸을 아끼지 않는 제 아가씨.

순식간에 떠오르는 연결 고리들에 에드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올리비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요. 처음부터 끝까지.”

고저 없는 에드윈의 말에 올리비아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고 나서야 느리게 말을 시작했다.


“……트리스탄이 아니라, 제도에 다녀왔어요. 칼터 경과 인터필드 경이, 황궁 감옥에 있다고 해서 있다고 해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분명히 에드윈이 실망할 것을 알아서.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태자가 처음 편지를 보냈을 때, 제가 가면 피를 보는 일 없이 그들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에드윈에게 말하려 했다는 둥, 오랜만에 아버지와 재회한 그의 행복을 지켜 주고 싶었다는 둥 변명을 할 생각은 없었다.


“트리스탄으로 가려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시간을 벌기에 적합했고, 또 만약의 사태에 제 편이 되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으니까요.”

“…….”

“……그런데 제 판단이 틀렸어요. 저는 그들을 구출해 내지도 못했고, 비칸데르의 부단장 세 명에, 정보상이라는 위르겐까지 지금 제도에 있으니까요.”

제 계산에 위르겐이라는 변수를 넣지 않았던 것은, 전적으로 올리비아의 잘못이었다. 모든 일에는 가변성이 있으니 여유를 두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전하. 저희가 잘했어야 했는데…….”

베서니의 사죄에 올리비아는 서둘러 덧붙였다.


“베서니도 디안도 엄청 말렸는데 제가 강행했어요. 함께 안 해 주면 혼자라도 가겠다고. 그러다 칼터 경한테도 단단히 혼났어요. 예비 대공비로서 스스로 위험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침묵이 무거웠다. 올리비아는 슬쩍 에드윈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에드윈이 실망했다고 해도, 올리비아는 아직 선대 대공비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화, 났죠. 그…….”

“네.”

그래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말을 더 해야 하는데.

딱딱하게 떨어지는 대답에 올리비아는 얼어붙었다. 화가 났다는 말을 이렇게 할 사람이 아닌 걸 알아서, 더 미안했다.

바짝 굳은 어깨 위로 나직한 한숨이 떨어졌다. 귓가의 솜털이 바짝 설 정도로 아릿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겨우…….”

“…….”

“겨우 태자에게 협박받는다는 걸 말하지 못할 정도로 당신에게 내가 그렇게 믿음직하지 못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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