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선전포고, 그리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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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선전포고, 그리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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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선전포고, 그리고 자유
2023.07.23.
“그따위 환멸스러운 생각을 품은 채로 가까이 오지 마시오.”
“……뭐?”
믿을 수 없다는 억눌린 목소리와 함께, 베서니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가씨의 음성이었지만 어미를 낮게 내리는 이 말투는.
“혐오스러우니. 얼굴도 가려 주길 바라고.”
“올리비아……!”
공주님이었다.
태자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리는 사이, 베서니는 경악 어린 눈으로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곧게 서 있는 자세와 입꼬리만 여유 있게 당긴 미소.
머리 색깔과 외모는 달랐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아가씨의 태도는 마치 공주님을 연상케 했다.
“올리비아.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진심으로 내게 하는 말,”
“전하한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뭐?”
손수건을 든 채 버럭 성을 내던 레오포드는 순간 멍한 얼굴을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건 곧……!
올리비아는 태자의 너머에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 근엄한 표정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제가 선대 대공비 전하의 유지 중 하나를 올곧게 전달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폐하께서라면 확실히 아실 듯합니다.”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미묘하게 톤이 다르지만, 어미의 맺음이 똑같았던 말투. 그리고 제게 건넸던 마지막 말까지.
환멸스러운 생각, 그리고 혐오스러운 얼굴. 공주였던 자가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날것의 말이었지만 더 그래서 소유욕을 자극했던 말.
황제는 욕망이 오싹하게 번지는 것을 느꼈다. 무표정하게 말을 전하는 저 아이의 입을 빌릴 수만 있다면, 설마 죽은 공주와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일까?
황제가 초상화와 올리비아를 번갈아 보는 것만큼이나, 올리비아 역시 초상화와 베서니를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선대 대공비 전하의 유지를 받들어 이 시간부로 저 초상화는 비칸데르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초상화에 담긴 마지막 의지에 따라 대공비 전하께서도 비칸데르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으니까요.”
올리비아는 일부러 ‘때’에 강한 힘을 넣어 발음했다. 선대 대공비의 마지막 염원에 따르면, ‘때’는 곧 올 것이었다. 막연하지 않은, 확실한 감이 올리비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나 제가 천금 같은 기회인 ‘때’를 놓칠까, 베서니한테 너무 약하게 신호를 준 게 아닐까 수많은 생각을 하며 태자를 마주 볼 때였다.
나직한 비웃음이 한 번 들리고 나서, 느릿한 걸음이 올리비아를 향해 다가왔다. 황제는 탐을 내듯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상화를 통해 죽은 자와 소통을 하는 게 능력이라면, 차라리 밝히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야. 공녀.”
“…….”
“공녀의 입을 빌려 죽은 공주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공녀가 마델레이네가의 핏줄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황궁으로…….”
순간 황제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초상화 앞에 선 공녀와 초상화 속 공주. 둘 다 무표정한 얼굴을 해서 그런지, 생각으로 담을 때보다 훨씬 닮아 있었다.
그래, 썩 괜찮을 정도로 닮은 두 얼굴.
황제는 입술을 달싹였다. 형형하게 번뜩이는 새까만 눈빛 사이로 기이한 욕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아니, 내 옆에 두고 싶을 만큼 기묘하고 재미난 능력이지 않나.”
순간 태자가 고개를 번뜩 치켜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황제는 애써 아들을 외면했다. 어차피 정절을 의심받고 있는 공녀라면 태자가 그 사실을 무시하고자 하더라도 추후 태자비의 자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마델레이네 공작이 정신을 못 차리는 지금 공녀를 태자가 아닌 자신의 곁에 두는 것도…….
“공주의 초상화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 있었고, 앞으로도 평생토록 이곳에 남을 것이야.”
……황제인 자신이 노려 보아도 되는 틈이 아닐까?
“공녀가 이 황궁을 빠져나가지 못할 게 자명한 것처럼 말이야.”
“폐하!”
순간 태자가 고함을 쳤다. 하지만 황제는 끝까지 올리비아한테서 그 질척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의 잔재주를 믿고 온 거라면 심히 아쉬울 거야. 공녀는 어렴풋이 듣기만 했겠지만, 이 황궁에는 아주 탄탄한 결계 마법이 처져 있어.”
찰나지만 올리비아가 움찔했다. 애매하게 결계 마법에 대해 듣기만 했던 게 틀림없었다.
황제는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뚫을 수 없는 황궁의 결계 마법에 대한 과신이 새어 나왔다.
“그 아래에서 쓸 수 있는 크고 작은 마법은 모조리 결계 마법을 건 궁정 마법사의 허가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똑똑-. 황제의 말이 끝나자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 바깥에서 시종장의 공손한 보고가 들려왔다.
“폐하. 마법사가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마침 왔나 보군.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황제의 침실 가장 깊은 곳의 문이 열렸다.
황궁 마법사 킨슨은 고개를 숙인 채로 방으로 들어서며 시종장의 말을 되새겼다.
“오늘 또 초상화가 떨어졌습니다! 폐하께서 아시기 전에 마법사님을 모셔오려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보존 마법을 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떨어지다니……! 안 그래도 근래 비칸데르령에서 폭발적인 힘이 발견된 이후로 혹시나 황궁을 둘러싼 마법이 약해졌나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는데.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
자신의 힘이 약해진 것인지 고민하며 시름에 찬 인사를 올리던 킨슨은 무엄하게도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늘 황제만이 있었던 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다른 이가 세 명이나 더 있었다. 어딘가 기분이 비틀려 있는 듯 날 선 태자와 침착하게 서 있는 은발의 공녀, 그리고 남은 이는…….
“마, 법사?”
킨슨은 확신 없이 중얼거렸다. 저 중년의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미미한 힘은 마력인 듯싶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이 방에는 지금 아버지의 날 연회 때 킨슨이 느꼈던 폭발적인 기운의 조짐 또한 느껴졌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흔적 따위에 킨슨이 골몰하는 사이, 황제는 느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왔는가, 킨슨. 마침 자네와 자네의 제자들이 황궁에 쳐 둔 튼튼한 결계 마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던 참이네. 황궁에서는 자네들한테 승인받은 마법이 아닌 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저 마법사에게 말이야.”
“저, 폐하. 저 마법사는 혹,”
북쪽 비칸데르에서 왔습니까?
하지만 킨슨이 말을 맺기도 전에 고아한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울렸다.
“명민하신 폐하. 제가 던진 손수건마저도 선대 대공비의 유지임을 이해하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뭐?”
손수건이라니. 황제는 순간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가 멍청하게 서 있는 와중에 손에 꼭 붙들고 있는 흰 손수건. 그게 공주의 유지라니…….
손수건을 상대에게 던지는 것은 결투를 신청한다는 의미의 행동. 이는 곧 비칸데르가 감히 제국에 도전을 하겠다는 선전포고가 아닌가!
황제가 벌컥 화를 터트렸다.
“내 지금 공주와 닮은 얼굴을 높이 사 건방진 작태를 참아 주었더니! 뚫린 입이라고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당장 저 둘을 포박하, 아니지! 킨슨!”
“예, 예! 폐하!”
갑자기 불린 이름에 놀란 킨슨이 황급히 황제의 옆으로 다가갔다. 황제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초상화를 가리켰다.
“저들의 눈앞에서 당장 저 초상화에 보존 마법을 걸고 벽에 고정시키게! 저 시건방진 계집이 평생토록 내 얼굴을 볼 수 있게! 박제되어 오로지 저 자리에만 있을 수 있게!”
황제는 호의를 거절당하는 일이 낯설었다. 그것도 무참히 짓밟히는 것은 더더욱.
공주에게서 당했었던 거절의 반복.
그것을 그녀와 닮은 이에게서 다시 경험한 황제의 노기는 주체하지 못한 채 뻗어 나갔다.
킨슨은 얼른 초상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황제의 뜻대로 바로 초상화가 원상 복구되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림에 마법을 걸어 띄우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초상화를 살피던 킨슨은 초상화의 얼굴 부근에서 무언가 막힌 듯한 마력이 느껴짐을 깨달았다. 제 결계 마법이 깨져 있었고, 깨진 마법은 흩어지지 않은 채 초상화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었다.
깨진 마법이 사라지지도 않고 머물다니. 설마 저 마법사가 초상화에 무슨 짓이라도 한 걸까?
이 상황에서 다시 보존 마법을 걸려면, 방법은 단 하나였다.
순간이나마 결계 마법을 해제하고 그 잠깐 사이에 다시 초상화에 보존 마법을 거는 것.
마법사가 황궁 안에, 그것도 황제의 침실에 들어와 있는 지금, 결계를 해제하는 것은 위험했다. 아득해지는 킨슨과 달리 황제는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라 붉은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똑똑히 봐 두게, 공녀. 공주의 유지가 무엇이든 그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감히 황제의 곁에 있을 기회도, 태자의 곁에 머무를 기회도 고작 그 입으로 날려 버리다니!”
“그, 폐하.”
결계 마법을 함부로 해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심스레 황제를 부른 킨슨에게 다그치듯 호령하는 고함이 떨어졌다.
“어서!”
킨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연로한 그에게 있어 지금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평생을 궁정 최고 마법사로 살아왔던 세월, 그리고 그 덕에 쌓인 오만함이 킨슨의 결정을 도왔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잠깐 해제하고 순식간에 마법을 건 뒤 다시 결계를 치는 것.
그 정도라면 제대로 마력조차 안 느껴지는 저 여인이 마법을 걸 수 없을 시간일 거다.
그래서 킨슨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결계 마법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초상화에서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응축된 힘이 폭발하듯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빛무리를 보며, 베서니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자신이 이 황궁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베서니는 무작정 올리비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강력한 소원을 빌며 마법을 시전했다.
눈을 뜰 수 없는 강한 빛에 레오포드는 물론 황제와 마법사까지 눈을 꽉 감았다.
마치 진공 상태인 것처럼 모든 것이 새하얗게 번지는 순간이 끊어지지 않을 듯 계속되던 상황은 단숨에 마무리되었다.
“무슨……!”
레오포드는 황망한 목소리로 짧은 신음을 토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제 눈앞에 있던 올리비아가 없어졌다. 마법사라던 여자도 사라졌다.
올리비아가 있었던 흔적이라고는 고작 제 손에 들린 손수건밖에 없었다.
“마법사! 이게 무슨 일이야!”
“그게…… 그게 저도……!”
정순한 기운이 결계 마법 해제를 가속화했었다. 그것 말고는 그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어 킨슨은 말을 더듬었다. 방 안에 가득 차오르는 태자의 분노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제가 잠시나마 결계를 풀었다는 게 알려지면 저를 죽일 듯한 분노였다. 킨슨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눈을 껌뻑이던 황제는 한편에 놓인 초상화를 보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사라진 공녀나 마법사와 달리, 공주의 초상화는 그대로였다.
초상화를 책임지겠다는 공녀의 말은 틀렸다. 지금 이 순간, 공녀와 그 하찮은 마법사는 꼬리를 말고 눈속임을 부린 것뿐이었다. 가져가지 못한 초상화를 언제고 노리면서.
두 사람은 분명 이 주변에 있을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황제는 초상화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다 순간 멈칫했다. 그의 눈앞에서 초상화에 붉은 불꽃이 날름 일더니 이내 초상화의 가장자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법사 저 불을……!”
버럭 소리를 지르던 황제는 흠칫 놀라며 초상화에서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안 되게도, 불에 타오르는 초상화 속 공주의 눈이 저를 비웃고 있었다.
처음 초상화가 떨어졌던 날, 황제가 순간 제 눈을 의심했을 때처럼.
“나를 유폐시킨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문득 황제가 공주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격식을 차려 말하던 그녀의 말이 떠오른 순간 웃는 것과 같은 공주의 얼굴이 천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이 갑갑한 곳을 영원히 벗어나기라도 하듯. 틀에 그을음 하나 없는 상태로 초상화만 살라 먹은 불은 이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그 연기의 흐름을 바라보던 황제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진이 몸속을 빠져나갔다. 허탈감, 상실감, 그리고 영원히 제 손을 빠져나가 버린 공주.
“하하하…….”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이 무너진 자리. 황제는 짧은 순간 하얗게 센 머리를 감싸 안고 울듯이 웃었다. 아비에 대한 걱정 대신 마법사를 질타하는 태자는 황제를 등진 채로 싸늘하게 명했다.
“……두 사람이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당장 찾아내.”
* * *
한편 휘영청 뜬 달 아래. 비칸데르령.
비칸데르 성을 벗어난 에드윈은 힘껏 말고삐를 당겼다. 올리비아의 필체가 아님이 여실히 남은 구겨진 보라색 편지 봉투.
당장이라도 트리스탄으로 향하려던 그의 목적지가 수정된 건 아버지 때문이었다.
“……광산으로 가라. 에드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