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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유폐된 선대 대공비의 마지막 염원 (2) (145/151)


#145. 유폐된 선대 대공비의 마지막 염원 (2)
2023.07.19.



 


“아니, 이 밤중에 마법사님은 어딜 가신 거요?”

마법사를 찾다니.

올리비아는 정원의 담 뒤로 몸을 숨긴 채 조심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난들 압니까? 이럴 시간에 서둘러 모셔 오십시오! 좀 이따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기라도 하신다면 필시 경을 칠 겁니다!”

초조함에 주변을 살피던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황제 궁 안쪽에서 아까 결계 마법에 틈이 생긴 순간 느껴졌던 기운이 흘러나오는 동시에 초록색 빛무리가 어른거렸다.

마치 선대 대공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반짝이는 빛.

무언가에 의해 응축된 것이 서서히 분산되어 반짝이는 것을 보던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베서니를 바라보았다.


“……제가 느낀 게 저거인 것 같아요.”

광산에서, 세누아의 계곡에서, 그리고 선대 대공에게서 났던 것처럼 올리비아를 잡아당기는 은은한 빛들.

설마…… 선대 대공비 전하도?

뻗어 가는 미약한 희망을 끊어 낸 것은 베서니였다.


“공주님은 돌아가셨는데.”

베서니는 젖어 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주님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가 돌아온 선대 대공과 달랐다.

하지만 분명히 저 안에는 무언가 있었다. 세누아 계곡에서 느꼈던 것만큼 정순하고 고귀한 힘이.


“이건 정말 위험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요…….”

베서니가 머뭇거리며 황제 궁의 둘레를 가리켰다. 올리비아는 그 손가락 끝을 보며 탄성을 삼켰다.


“저 빛무리가 저희에게 따라오라는 건 아니겠죠?”

“정말 터무니없긴 하지만, 저도 같은 생각인데요. 베서니.”

올리비아는 베서니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삐 오가는 시종들은 보지 못한 듯하지만, 반짝이는 초록색 발자국은 황제 궁의 쪽문을 향해 찍혀 있었다.

* * *

황제 궁의 옆문.

시종은 자부심을 느끼며 제가 지켜선 문을 바라보았다.

주로 하급 시종이 드나드는 길이었지만, 황제 궁의 엄중함은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오늘따라 고위 시종들이 궁중 마법사를 찾기 위해 부산스러웠음에도, 옆문을 지키는 자신만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맡은 책임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닫힌 문이었는데, 방금은 대체 어디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 걸까?


“……겨울이 되려고 그러나?”

그는 결국 뺨을 긁적이며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의 등 뒤로 황제 궁과 다른 문양의 숄을 두른 시녀가 둘이나 지나갔음에도, 그는 물론 다른 궁인들까지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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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집무실과 대회의장. 올리비아는 이 삼엄한 황제 궁의 두 공간을 과거에도 밟아 보았다. 하지만 빛무리가 반짝이는 곳은, 그보다 더 깊고 엄중한 곳이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기사들의 제재를 받는, 황제의 침실 방향.

그런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날 수 있다니.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올리비아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 빛의 끝에 저희를 기다리는 게 무엇일까. 혹시 살아 있는 자는 아닐까.

두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새파랗게 질린 시종장을 몰래 지나쳐 황제의 침실에 들어갔다. 잠시 뒤, 빛이 향한 침실 깊은 곳의 문을 연 순간.

올리비아는 그 어떤 말을 할 수 없었다. 긴장에 쌔근거리는 베서니의 숨소리도 뚝 끊어졌다.

프란츠 제국을 상징하는 화려한 휘장, 그 아래 뚝 떨어져 있는 건.

비칸데르령에서 본 것과 달리 소름 끼치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의 그림.


“……공, 주님.”

선대 대공비의 초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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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엉겁결에 말을 내뱉고서야 베서니는 초상화 속 여인이 선대 대공비임을 실감했다.

체통을 지켜 달라고 읍소할 정도로 한없이 웃던 얼굴이 매섭도록 굳어 있었다. 행복으로 반짝이던 초록 눈이 처참하게 메말라 있었다.

그 초상화 한 장면만으로도 베서니는 황궁으로 갔던 선대 대공비의 마지막을 절감했다.

그 건조한 눈빛은 아무리 제가 눈물을 흘려도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베서니는 서러움에 압도되어 숨을 삼켰다.

사위를 잡아먹듯 숨 막히는 정적.

그 소리 없는 비명을 깨트린 건 구두 굽 소리였다.

초상화 앞으로 다가간 올리비아는 다시 초상화를 벽에 걸려는 듯 액자 틀을 잡았다. 혼자 들기에 벅찬 크기에 끙끙대는 소리를 듣고 베서니는 퍼뜩 버거운 감정에서 헤어 나와 올리비아를 도왔다.


“아이고, 제가 먼저 세웠어야 했는데.”

붉어졌지만 차마 울지 못하는 눈매가 애써 휘어졌다. 올리비아는 베서니가 하염없이 초상화 속 얼굴을 살피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런…… 흉악한, 이래서야 편히 눈 감으실 수도 없이…….”

베서니의 중얼거림이 심장을 저릿하게 울렸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 이 상황을 표현할 수 없어서, 올리비아는 입술을 닫은 채로 초상화 속 선대 대공비를 바라보았다.

분명 베서니의 응접실에서 보았던 선대 대공비는 세상을 빛내듯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굳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찰나지만 초상화 속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자세히 보니 억누르는 기운의 흐름을 겨우 비집고 초록색 빛무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올리비아는 푸른 수국에서 느꼈던 보존 마법이 불완전하게나마 그림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리비아는 막힌 듯 뭉쳐 있는 초록색 빛무리를 향해 무심코 손을 뻗으며 베서니에게 말했다.


“초상화에도 보존 마법이 있…….”

하지만 그 빛무리를 위로하듯 톡 건드리는 순간, 올리비아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아주 잠시지만 분명 올리비아가 예민하게 알아챌 정도로 이 방에는 기묘한 힘이 차올랐었다. 마치 틈이 벌어지며 억눌리던 힘이 일시적으로 증폭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공을 위해 기도할 때 마석에서 나왔던 힘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


“왕족은 특정 능력만 발화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사제님들은 능력의 한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타적인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소원만 빌 수 있는 거죠.”

 
문득 제룬의 말이 떠올랐다. 분명히 왕족은 특정 능력만 발화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선대 대공비가 가진 힘이 무엇이기에 사후에도 저렇게 힘이 남아 있는 걸까?

올리비아는 다급하게 물었다.


“베서니. 혹시 선대 대공비 전하께 어떤 능력이 있으셨는지 아세요?”

“모, 르겠어요. 공주님께서는 일절 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시고, 마석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셔서.”

얼떨떨한 베서니는 고개를 저었다. 힘의 주인이 죽은 후에도 남아 순간적으로 증폭되는 힘이라니. 이건 마법사인 저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베서니의 혼란을 다독이며 다시 물었다.


“아주 작은 거라도 괜찮아요. 힌트가 될 법한 걸 분명 베서니가 알고 있을 거예요. 베서니는 늘, 선대 대공비 전하를 아주 가까이에서 모셨잖아요.”

그 목소리에 베서니는 가만히 보물 같은 기억들을 헤집었다. 가장 행복하고, 그래서 떠올리면 아픈 추억들. 그 추억 사이에서 늘 환하게 웃던 공주님.


“……이건 비밀이야. 알겠지?”

 
베서니는 아, 탁음을 뱉었다. 머릿속을 지나간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 새끼손가락까지 꼭꼭 걸며 약속해서 묻어 두었던, 어린 시절의 비밀이었지만 지금은 꼭 말해야 했다.


“……한 번, 제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안 움직였는데 공주님이 노래를 불러 주시고 다시 괜찮아졌어요.”

분명 부러진 줄 알았는데, 이제 괜찮을 거라는 공주님의 말을 믿고 일어나 보니 정말 괜찮아졌다. 과거 그날의 상황을 떠올리며 베서니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공주님께서 치유 계열의 능력이 있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그런 힘이 있으셨다면, 아가씨께서도 스스로의 생명력을 더 유지시키시지 왜 그 젊었던 나이에 그렇게…….”

말을 이어 가던 베서니가 순간 눈을 깜빡였다. 올리비아는 베서니의 어깨를 감싸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치유의 힘을 가졌던 선대 대공비가 이른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을 치유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황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서, 또는…….

그 힘을 모두 쏟아서라도 다른 소원을 빌기 위해서.

차마 믿을 수 없는 가정의 끝에서 올리비아는 해답을 구하듯 선대 대공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초상화 속 선대 대공비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바로 맞추었다는 듯 빙그레 웃는 눈동자를 보는 동시에 올리비아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에드윈한테 광산의 비밀을 알려 줄걸. 성인이 될 때까지 내가 그 애의 곁을 지키지 못할 줄 누가 알았겠어.”

 
아쉬움에 울리는 한숨.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이 목소리가 선대 대공비임을 직감했다.


“진작 사제의 후손을 찾았어야 했나? 광산을 열 수 있었더라면 에드윈한테 이런 짐 따위는 물려주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늘이 사라지는 건 순간이었다.


“아니지. 내가 급하다고 아들의 성인식을 망칠 수는 없지. 스스로 찾아내야지. 로웰과 비칸데르의 후손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금세 씩씩한 희망이 피어나듯, 맑은 목소리는 금세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드러냈다.

이내, 선대 대공비의 맑은 허밍이 들려왔다. 목소리는 올리비아가 읊었던 기도와 비슷한 운율을 노래하며 기도했다.


“……그러니, 로위나시여. 제 모든 능력을 바쳐도 좋으니 부디…….”

 
목소리에 집중하던 올리비아는 제 눈앞에 떠오르는 광경에 헛숨을 삼켰다.

광산, 마석 목걸이, 그리고 그 목걸이를 마주 잡은 두 명의 사람.

그러는 사이, 애틋하게 시작했던 목소리는 점점 강인하게 그녀의 심장을 울렸다.


“……내 아들만큼은. 비칸데르와 로웰의 적법한 후계자는 그 모든 것들을 되찾아 지킬 만큼 강해져서, 평생토록 사랑하며 행복하게 하소서.”

 


“……가씨, 아가씨.”

순간 올리비아는 눈을 번쩍 떴다.

마법이 보여 준 것과 현실이 분간 가지 않는 상태에서 올리비아는 제 앞을 지키고 선 베서니의 등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듯 굳은 그녀의 등 너머로 똑 닮은 듯한 두 명이 보였다.

황제와 태자. 그 소름 끼치는 새파란 눈들을 바라보자 올리비아는 지금 이 상황이 명확히 이해되었다. 힐끗 바라본 초상화에서는 더 이상 빛무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힘의 흐름이 끊어진 듯…….

혹은.

……마지막 폭발을 준비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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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떨어졌다니 그게 무슨……!”

황제는 노성을 터트리며 쩔쩔매는 시종장을 거칠게 밀쳤다.

시종장은 벽에 부딪힌 채로도 고개를 숙였다. 레오포드는 태평하게 그 둘을 지켜보았다.


“송구합니다. 폐하. 서둘러 궁정 마법사를 불렀으니 곧…….”

“데려오고서나 말하게!”

대회의장에서 회의가 끝난 이후였다. 정말 올리비아가 궁으로 왔냐며 태자에게 독대를 명한 황제는 초상화가 떨어졌다는 말에 황급히 침실로 올라왔다.

레오포드는 느긋한 걸음으로 황제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태자 궁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보존 마법을 건 초상화 따위와는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애틋한 제 약혼녀.

아니, 이제는 곧 제 비가 될 가장 귀한 여인.

저는 절대로 황제처럼 우두커니 그림만 지켜보지는 않을 거였다. 떨어진 초상화를 보고 놀란 듯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라니.

제국의 태양답지 않은 모습에 피식 비웃음을 터트리던 레오포드는 초상화가 있는 방을 쓱 보는 동시에 굳어 버렸다.


“……가씨, 아가씨.”

기척을 느낀 중년의 여인이 제 등 뒤로 감춘 이는…….


“……올리비아.”

이곳에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제 여인이었다.

이해 가지 않는 이 상황에서 먼저 침묵을 깬 건 황제였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공주의 시녀였던 이로군. 평생토록 공주만 위해 산다 하더니 말뿐이었어. 금세 주인을 바꾼 모양이야.”

“말조심하시오!”

새된 고함은 황제에게 아무런 위협도 끼칠 수 없었다.

황제는 턱 끝을 까딱이며 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공녀를 보호하듯 뒤로 세운 그녀를 향해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말조심은 네년이 해야지. 알량한 재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감히 황제의 침실을 그깟 마법으로 들어왔을 리는 없고.”

황제는 순간 서늘한 눈으로 공녀를 마주했다. 침착한 건지, 아니면 무언가를 숨기는 건지 알 수 없는 초록색 눈…….

설마.


“……공녀에게도 그런 힘이 있나?”

“힘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레오포드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황제를 향해 되물었다. 하지만 얄팍하게 눈을 좁힌 채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황제에게서는 다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레오포드는 질문의 대상을 바꾸었다.


“올리비아. 내게 숨기는 힘이라도 있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다정한 목소리에도 올리비아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레오포드는 그 눈이 소름 끼칠 정도로 사랑스럽고 또 싫었다.

다른 모두를 향해서는 저 눈을 해도 괜찮지만 자신에게는 아니었다. 레오포드는 목울대를 울리며 근사하게 웃었다.


“고작 여기에서 그대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아, 그대의 미래가 저렇게 될까 두렵기라도 한 거면 걱정하지 마.”

새파란 시선이 벽에 세워진 초상화를 향했다. 그리고 한층 한층 낮아지는 목소리로 주문처럼 읊조렸다.


“패전의 배상을 위해 온 망국의 공주는 영원히 폐하께 종속되어 박제되었지만…….”

욕정 가득한 눈이 올리비아의 얼굴을 끈적하게 살폈다.

저를 바라보는 무감한 눈에 언제고 사랑이 돌아올지 몰라서, 레오포드는 진심으로 제 사랑을 고백하며 올리비아한테 다가갔다.


“나는 절대로 그대를 저렇게 만들지 않을 거니까. 가장 귀한 자리로 올려 줄 거라 수백 번이나,”

맹세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다짐은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찰싹, 마치 후려치듯 무언가가 레오포드의 얼굴 위로 던져졌다.

흰 손수건이었다.


“이게 무,”

“정말 못 들어 주겠군.”

“……뭐?”

귓전을 서늘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레오포드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제 눈까지 의심해야 했다.


 


“그따위 환멸스러운 생각을 품은 채로 가까이 오지 마시오.”

저와 시선을 교류하고 있는 초록색 눈에 가득한 건, 진심 어린 혐오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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