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유폐된 선대 대공비의 마지막 염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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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유폐된 선대 대공비의 마지막 염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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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유폐된 선대 대공비의 마지막 염원 (1)
2023.07.16.
“그럼 편히 쉬십시오.”
소프론 남작 부인이 바깥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부드러웠다.
혼자가 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손목의 손수건을 풀었다.
하…….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멍 자국을 보자,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베서니가 말한 마법 무용화라는 게 무엇인지 절실하게 와 닿았다.
“저는 황궁 앞에서 대기하다 기사들이 위르겐과 함께 나온다면, 손목의 멍 색깔을 통해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다만, 황궁에 들어가시게 된 경우에는 제 마법이 무용해질 테니 그때는 어떻게든 궁 내에서 기사들을 만나셔야 합니다.”
황궁의 결계 마법은 이런 거였다. 허가되지 않은 모든 마법을 무력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번졌다. 올리비아는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발코니 쪽으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달빛 아래에서 고고히 빛나는 둥근 은빛 지붕과 정각에 맞춰 교대하는 기사들과 시녀들. 발코니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하녀들의 두런대는 말소리.
그렇다면…….
올리비아는 침대 커버를 들어 올려 프레임 위쪽을 더듬었다. 손끝에 익숙한 감촉이 걸린 순간, 그녀는 희게 웃었다.
티아제 궁이 그대로라던 소프론 남작 부인의 말이 사실이었다.
침대 프레임에 딱 붙여 보관해 두던 황녀 궁의 시녀복들까지 제자리에 있었으니 말이다.
서둘러 시녀복을 꺼내던 올리비아가 멈칫한 건 그때였다.
발코니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 속 파장이 기묘했다.
한순간이지만 마법의 흐름이 깨졌다. 푸른 수국을 감싼 보존 마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흐름이 뒤틀리며 언뜻 느껴진 건 제게 익숙한…….
올리비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건 불확실한 상념이 아니었다.
모두가 안전히 돌아가는 것, 딱 그거 하나뿐이었다.
* * *
타오르는 횃불 흔드는 모양이 고요한 밤하늘을 휘저었다.
땅을 딛는 발소리가 급박하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윈스터는 위르겐의 입을 막고 몸을 숙였다. 손바닥으로 막힌 신음이 느껴졌지만 윈스터는 소리가 들리는 철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오르페유 지하 감옥의 마지막 관문.
저 문이 있는 성벽만 넘으면 바깥으로 나가는 덧문까지는 금방이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기사 한 명이 무어라 속닥거렸는지, 태만하던 경계병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침입……! 읍!”
“닥쳐! 자랑할 일 있어?”
사나운 일갈에 윈스터는 디안과 하워드와 시선을 맞췄다. 침입자가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 알아챘더라면 자신들이 나간 뒤였을 텐데.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윈스터는 숨만 쉬고 있는 위르겐을 바라보았다. 위르겐이 다 터져 부은 눈을 찡긋했다.
“제도 놈들은 영 글렀습니다. 대공 전하의 정보는 아주 비싼데, 후려친다고 값이 깎일까. 선심 써서 경께만은 평생 할인 좀 해 드리지요.”
눈치 빠른 놈. 감옥에서 마주치자마자 했던 말 덕분에 위르겐은 살 운명으로 정해졌다.
윈스터는 세밀한 눈으로 경계병들을 살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놈들도 침입자의 존재를 상관에게 알리기는 싫은 듯 저들끼리 부산스럽다는 거였다.
서성이며 침입자를 유추해 내는 대화를 피해 문을 넘어섰을 때, 윈스터는 탄식 같은 헛웃음을 삼켰다.
경계병들 수가 제법 많았다.
빠르게 주변을 살피자, 몸을 은폐할 곳이라고는 연무장 옆 작은 창고가 전부였다. 수색하는 경계병이 들어온다 해도 적당히 기절을 시켜 둘 수 있는 곳.
하지만 황급히 창고 안으로 위르겐을 끌고 들어갔을 때, 윈스터는 제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달빛이 비껴가는 창문 하나, 축축한 땀내와 찌든 가죽 냄새가 풍기는 건틀렛들이 쌓인 창고. 유난히 이 주변이 한적한 건, 이미 사람이 먼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제압하러 나섰던 윈스터가 주춤했다. 그 사람 주변을 감싼 공기의 흐름, 그 잠깐만으로도 건틀렛 사이에 있는 이의 실력이 느껴졌다.
멀쩡한 상태의 저라면 비등하겠지만 지금이라면……. 승패를 장담하기 힘든 상대.
따라 들어오던 디안이 윈스터의 앞으로 나서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상대는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문이 열릴 때, 저희의 얼굴을 확인했을 텐데.
폐부를 찌르는 기세들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는 사이 창고 벽 너머에서 신경질 섞인 대화가 가까워졌다.
“도대체 누가 ……을 했다는 건데!”
“몰라! 갑자기 홀린 듯 문을 열어 줬다는데. 창고 문이나 열어 봐.”
윈스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디안이 저 앞의 이를 제압하고, 저와 하워드가 들어오는 두 명을 제압한다면…….
하지만 순간 창문 안쪽까지 달빛이 스며들었을 때. 윈스터는 제가 하던 모든 생각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믿기지 않는 기적을 확인했다.
“……지하 감옥에 있어야 할 놈들이 왜 내 구역에 있는 거지? 그것도, 넷으로 증식해서.”
형형하게 뜬 자수정 색 눈동자와 아가씨보다는 별로이지만 제법 밝은 은빛의 머리카락. 짓씹듯 으르렁대는 목소리까지.
기적이라기에는 고약한 눈빛이었지만 윈스터는 아주 잠시, 그의 얼굴이 제 아가씨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제이드 마델레이네는 사나운 눈으로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윈스터 칼터를 노려보았다.
귀족 회의 이후 말도 안 되는 태자의 말을 곱씹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들이라니. 그것도 제가 싫어하는 비칸데르의 얼빠진 놈들이 셋이나.
“……제가 이 창고로 들어온 건,”
벙벙하던 윈스터 칼터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한 얼굴이 순간 환하게 웃었다.
“아마, 아가씨께서 만들어 주신 운명인가 봅니다.”
“미친……!”
“미친 태자 때문에 아가씨께서 억지로 제도로 오셨습니다. 어쩌면 황궁에까지 들어오셨을 수도 있고요.”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제이드는 검집을 휘두르려다 멈췄다. 그러는 사이 창고 문을 거칠게 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안 열려? 경계병의 혼잣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윈스터가 말을 이었다.
“긴 이야기를 압축하자면, 저희는 그저 무사히 아가씨를 모시고 비칸데르령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끼익거리던 문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심장이 철렁할 만한 상황에서도 윈스터는 제이드의 눈을 직시하며 떠올렸다. 아가씨를 바라보던 그 눈빛.
“어떻게, 저희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열렸다……! 문을 여는 경계병들의 목소리와 동시에 윈스터는 강한 힘으로 밀쳐져 바닥에 넘어졌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이는 바닥에 쓸린 몸이었지만 윈스터는 소리를 삼키고 킬킬 웃었다.
“만약 진짜 잘못되면 우리 다 끝이야. 샅샅이…… 부, 부단장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야.”
기겁하는 경계병의 경례 이후로 이어지는 제이드의 목소리가 더없이 든든했다.
* * *
“말이 돼? 어떤 멍청이가 신원도 확인 없이 황궁의 문을 열어 주었다고?”
평화로워야 할 황궁의 밤이 어딘가 이상했다. 올리비아가 알던 황궁의 밤과 달랐다.
근엄하고 엄중해야 할 경계병들이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목소리 크기조차 조절하지 않는 듯 수상쩍은 단어들 몇 개가 들려왔다.
“그게 진짜 뭔가에 홀린 것처럼…….”
“이 멍청이 같은 놈! 너 때문에!”
“책임은 좀 이따 물어! 저쪽은 확인했어?”
올리비아는 모자를 깊숙이 쓴 채 황녀 궁의 인장이 잘 드러나도록 숄을 고쳐 둘렀다. 경계병이 황녀 궁의 시녀를 수색할 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초조함은 점점 커졌다.
설마, 제 기사들이 위르겐을 빼내는 것이 발각되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기사들이 들어간 건 한참 전일 텐데, 저 말들은…….
불안한 마음을 누르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올리비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베, 서니……!”
차마 억누르지 못한 말이 입술 밖으로 새어 나갔다. 담벼락 쪽, 허둥거리며 몸을 숨기는 이는 분명 베서니였다.
올리비아는 다급히 주변을 살피는 경계병들의 눈을 피해 담벼락 쪽으로 달려갔다. 잔뜩 긴장한 듯 눈이 휘둥그레진 베서니가 올리비아를 껴안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마치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처럼 구는 베서니에 올리비아는 도리어 물었다.
“베서니야말로,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안 들어오기로 했잖아요.”
제 아가씨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베서니는 한시름 내려놓았다.
“아가씨께서 신호를 보내셨잖아요. 진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제가요? 전 그런 적이…….”
바로 나온 대답에 순간 베서니와 올리비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이지만, 결계 마법에 틈이 생겼었어요. 그 사이에서 아가씨가 선대 대공 전하를 치료할 때 느꼈던, 그런 기운이 흘러나왔고요.”
베서니의 말에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방금 전, 올리비아가 느낀 것과 동일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제가 아무리 경계병한테 마법을 쓰려 해도 제 마법은 먹히지 않았을 거예요.”
“……아까 썼다는 그 마법 다시 되나요?”
잠시간 주변을 살피던 베서니는 고개를 저었다. 결계의 틈, 그 잠깐은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올리비아는 베서니의 옷을 살폈다. 어두운색이지만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옷.
이럴 줄 알았으면 시녀 문양이 있는 숄을 하나 더 가져왔을 텐데. 때늦은 아쉬움 사이로 횃불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양새가 요란했다.
베서니와 몰래 이동하기 위한 틈을 찾기 위해 덤불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밤하늘에서 마주친 두 눈을 보고 몸을 굳혔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 한 쌍. 소프론 남작 부인이었다. 놀란 얼굴이 저와 베서니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가 제 뒤를 밟았던 걸까?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던 찰나였다.
“거기……! 누구입니까?”
묘한 대치를 끊은 건 젊은 경계병의 외침이었다. 기척을 느낀 듯 횃불이 가까워질 때였다.
“티아제 궁의 시녀장입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경계병이 저희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소프론 남작 부인이 기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언제 떨어뜨렸는지, 시녀용 숄은 부인이 있던 곳에 가지런히 떨어져 있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부인.”
“무슨 일입니까? 이 밤중에 이렇게 많은 기사 분들이.”
“그게…….”
시녀장이라는 계급, 위엄 있는 목소리에 어린 경계병은 눈치를 보다 거짓을 적절히 섞어 말했다.
“……혹시, 수상쩍은 여인 한 명을 본 적 있으십니까? 급작스레 식재료상이 입궁을 하며 그중 사용인 한 명이 길을 잃은 모양인 듯싶습니다.”
올리비아는 더듬거리는 경계병의 목소리를 들으며 반쯤 안도했다. 완벽하게 베서니의 이야기였다. 기사들은 잘 탈출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이어지는 소프론 남작 부인의 이야기에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여인이 아니라 키가 작은 소년이지 않았습니까? 내 저리 뛰어가는 아이를 본 것 같기는 한데.”
소프론 남작 부인은 한 손으로는 덧문 쪽을 가리키며 다른 손을 등 뒤에 숨긴 채 바쁘게 파닥이고 있었다. 딱 그녀가 있는 곳에서 잘 보일 정도로만.
그러는 사이, 경계병이 눈을 깜빡이며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 말이십니까? 저쪽이 아니라요?”
분명 제가 들은 쪽은 지금 시녀장이 서 있는 뒤편이었는데. 그 말에 시녀장은 한없이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었다.
“설마 아무리 멍청한 침입자라도 그렇지, 그쪽은 황제 폐하의 궁이지 않습니까? 그 삼엄한 경비를 본다면 이미 놀라 길을 잃은 것을 바로 알렸을 겁니다.”
설득력이 있었다.
경계병은 시녀장한테 다시 예를 갖춘 뒤 덧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소프론 남작 부인은 경계병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뒤를 돌았다.
제 숄도, 공녀도, 그리고 이상한 부인도 사라졌다.
궁인으로는 해서 안 될 짓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티아제 궁의 시녀장으로서 궁에 가장 어울렸던 분께 마지막 예우를 갖추었으니까.
소프론 남작 부인은 가만한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 구름에 흐렸던 달이 유난히 휘영청 밝았다.
마치 제가 충성을 다한 티아제 궁의 반짝이는 은빛 지붕처럼.
* * *
그리고 그 시각, 올리비아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황제 궁의 앞, 잔잔해야 할 황제 궁에서 어수선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경계병들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을 뛰어다니는 건 시종들이었다.
“아니, 이 밤중에 궁정 마법사는 어디에 있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