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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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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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
2023.07.12.
황제 궁의 대회의실.
늦은 시간의 회의 소집임에도, 자리는 꽉 차 있었다. 귀족들은 묘한 기류를 느끼며 서로의 눈치를, 정확히는 마델레이네 공작의 안색을 살폈다.
‘광물 세액과 성녀에 대한 안건이라니…….’
이미 비칸데르의 가신 둘이 감옥에 간 것을 모든 귀족이 보았다. 세율 조정 자체가 중단되었을 텐데. 중단된 광물 세액과 관련된 논의는 그렇다 쳐도 공식 의제에 ‘성녀’가 거론되다니.
귀족들은 입맛을 다시며 마델레이네 공작에게 물어볼 틈을 찾았지만, 철혈의 얼굴은 표정 하나 변화 없이 앉아 있었다.
공작이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뒤에 두 아들을 대동한 것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말 걸기가 힘들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저, 공…….”
참다못한 귀족 중 한 명이 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리고 태자 전하 드십니다!”
카랑카랑한 시종의 말과 함께 문이 열리며 황제와 태자가 등장했다. 전 귀족은 자리에서 일어나던 도중 눈을 커다랗게 떴다.
황제와 태자 뒤로 오는 이는 황후, 그것도 평소보다 훨씬 초췌한 얼굴의 황후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티 내지 않고 예를 갖췄다.
“제국의 태양, 달, 그리고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긴급한 상황이라 촉박하게 회의를 소집했음에도 모두 참석해 주었군.”
긴급한 상황과 촉박함.
황제가 사용하는 단어는 귀족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피곤한 듯 미간을 매만진 황제가 황좌에 앉은 뒤, 차례로 황후와 태자가 자리에 앉아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무거웠다. 귀족들은 황제의 시선이 엘킨 공작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러는 사이, 황제는 손을 들어 태자를 앞세웠다.
“오늘 회의는 태자의 주관하에 흘러갈 것이야. 태자.”
그때까지만 해도 귀족들은 그저 성녀에 관한 이야기가 무엇일지 궁금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태자의 입이 열리자 회의장의 모두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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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킨 공작님이, 비칸데르령에 감금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광물 세액을 협상하기 위해 갔다가?”
누군가 얼어붙은 공기 위로 숨소리 가득 섞인 말을 내뱉었다.
협상과 비칸데르, 그리고 감금.
유화될 수 없는 세 가지 단어의 나열에 귀족들은 끔찍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딱 레오포드가 바란 대로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감히 제국의 대귀족을 어찌……!”
“하, 하지만 정말 엘킨 공작이 비칸데르령으로 향한 것은 맞습니까?”
딱 좋은 찰나에 작은 의심을 던지는 것 또한 레오포드의 의도였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애써 감추며 그의 체스 말들이 희극적으로 연기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맞습니다. 아무리 엘킨 공작이 황제 폐하께 비칸데르령으로 향한다 고했어도, 중간에 일이 생겼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정치에는 무능한 대공일지라도 귀족을, 그것도 황후 폐하의 가문을 적으로 돌리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어허! 백작! 지금 태자 전하께서 회의에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말씀하신다는 말입니까?”
“내가, 들었습니다.”
황후의 목소리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분열되던 귀족들이 또 한 번 조용해졌다.
제국의 장미꽃.
붉은 장미를 연상케 하는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 아래 늘 만개한 듯 아름다웠던 얼굴이 오늘따라 시든 꽃처럼 버석거렸다.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끊어질 듯 가냘프게 말을 이었다.
“내가, 엘킨 공작이 비칸데르에 감금되었다고 말하는 걸 직접 들었습니다.”
“존경하는 황후 폐하. 누구한테 그 섬뜩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안타까운 듯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가 황후를 향해 물었다. 황후는 가만히 그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황후는 몸을 떨며 태자가 시켰던 말을 그대로 내보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기다렸던 대답에 태자는 씩 웃었다. 동시에 숨소리조차 삼킬 정도로 조용하던 대회의장 위로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이 번져 나갔다.
“올리비아가……!”
처절할 정도의 외침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레오포드는 애닳는 부르짖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회의 내내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마델레이네 공작이 의자가 밀려 넘어진 것도 모른 채로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그, 애가…… 황후 폐하를 뵙고 그렇게 말씀드렸습니까?”
믿을 수 없었다. 그 애가 황후를 만나다니. 저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가…….
그 애. 차마 한 번 더 이름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마델레이네 공작은 그렇게 ‘그 애’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그렇다 말하지 않았나. 공작.”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마델레이네 공작의 시야에 태자가 끼어들었다. 씩 웃는 입꼬리가 황후를 빼닮은 것처럼 수려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엘킨 공작의 안전 때문에 마음이 소란하신데, 그리 자식 걱정만 앞세우면 되겠나.”
너그럽게 타박을 놓는 시선 끝에 넘어진 의자가 걸렸다.
콘라드도 제이드도, 공작도 누구 하나 의자를 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눈치를 주는 터에 옆에 있던 귀족이 의자를 세웠지만 공작은 다시 앉지 않았다.
그 뚫어지는 시선에 졌다는 듯, 태자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군다나, 올리비아. 내 약혼녀의 안전이야 내가 먼저 챙기지 않았겠나. 그녀는 지금 내 보호를 받기 위해 황궁으로 함께 왔다네.”
제이드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제가 마법에 걸린 건 아닐까 하고 순간 상황을 의심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귀가 먹먹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개소리가 들려올 수 없었으니까.
“……올리비아가, 그 애가 자의로 지금 제도에 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콘라드가 묻는 말에서야 제이드는 그 말 같지도 않은 태자의 말이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태자는 그 잘난 얼굴을 비스듬히 웃으며 동의했다.
“그러면, 올리비아가 자의로 제도에 오지. 내가 그녀를 비칸데르령에서 억지로 데려왔기라도 했을 거란 말인가. 소공작?”
그러더니 연극이라도 하듯 팔을 넓게 벌려 대회의장 모두에게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소공작도 듣지 않았나. 대공이 비칸데르령에는 황족과 마델레이네 공작가가 출입 금지라고 큰소리를 치던 것을.”
어흠흠. 황망해진 귀족들이 저마다 큰 소리로 헛기침을 터트렸다.그러다 헛기침이 잦아졌을 때, 누군가가 태자의 말에서 핵심적인 의문을 짚었다.
“그러면, 공녀가 정말 직접 제도로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성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소임을 다하겠다고 말이지.”
“거짓말하지 마십쇼. 전하!”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누군가 헛숨을 삼키는 동시에 버럭 호통이 내리쳤다.
“마델레이네 경! 태자 전하께 그 무슨 무도한……!”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태자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여유 있게 입꼬리를 당기며 제이드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경. 내 말 중 무엇이 거짓이란 말인가?”
“올리비아는, 비칸데르령을 떠나지 않…….”
말을 하다 말고, 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올리비아는 비칸데르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확고한 명제 아래에서, 제이드는 목 안쪽이 참을 수 없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태자는 빙글거리며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나와 다시 약혼을 하겠다고 내 궁까지 따라왔지.”
“……비칸데르 가신들 때문이라도.”
“그러면 대공은 가신들을 구하기 위해 제 여인을 내보내는 멍청이가 되겠군.”
차갑게 내뱉는 말에 제이드는 주먹을 쥐었다.
살육귀, 혈귀. 그 모든 부정적인 소문을 이끌고 다니는 꺼림칙한 놈이지만, 제이드는 놈이 제 부하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또 올리비아 앞에서 얼마나 풀어지는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올리비아가 순순히 태자를 따라왔을 리는 만무한데.
하지만 태자는 제이드의 의심에 쐐기를 박았다.
“대공이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벌써 며칠이 지난 상황에서 제 가신들이 갇혀 있다는 소문 하나 못 들었다는 게 말이 될까.”
아무리 제도에서 소문을 검열한다 한들, 장사치들을 통해 소문은 퍼지고 퍼졌을 것이다.
레오포드는 자신이 비칸데르의 두 가신을 가둔 직후 올리비아한테 편지를 보낸 사실만 쏙 빼 둔 채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위엄을 담아 힘있게 말했다.
“그래. 마델레이네 경이 이토록 묻는 것도 당연하지. 내 약혼녀와 내 사이가 갈라졌던 것은 온 귀족들도 다 아는 사실일 테니까.”
“…….”
“하지만,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누구보다 귀족의 책임을 알고 성녀라는 이름에 걸맞게 궂은일부터 황실의 대소사까지 겪어 온 이일세.”
선동하듯 강한 목소리는 귀족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더욱이 근 몇 년간 황궁 연회에 공녀의 손길이 닿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자연히 제국의 모든 이들한테 애정을 품고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을 테지.”
귀족들은 어느덧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성녀 이야기에 하나둘 동조했다.
그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사실 그런 이였던 거다. 몰래 황녀의 일을 대신하면서까지 제국의 안위를 살피는 여자.
사실 착하긴 했어. 마리아 에텔 그 악독한 것도 내치지 못하면서 늘 태자 전하의 옆에 붙어 있고.
얼굴도 예뻤지. 연회 때는 정말 요정 같기도 했고.
레오포드는 귀족들의 얼굴이 풀리는 것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공녀가 광물 세율을 협상하러 간 공작이 감금되는 것을 보고 정신을 다잡아 제도까지 왔어.”
순간 귀족들은 다시 한번 엘킨 공작의 생사에 대해 떠올렸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물밑에서 광물 세율을 조정하러 간 엘킨 공작과 초췌한 얼굴의 황후.
그리고 황궁에 돌아왔다는 성녀까지.
완벽한 이야기 앞에서 감화되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태자는 다시 한번 자신이 가진 패를 휘둘렀다.
“이럴 때일수록 제국은 더 하나로 끈끈히 뭉쳐야 하지 않겠나. 대공가에서 스스로 뛰쳐나온 성녀를, 내 어떤 허물도 잡지 않은 채 다시 내 비로 맞이할 걸세.”
순간 귀족들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현실로 떨어졌다.
태자의 말속에 몇 퍼센트가 진실이고 몇 퍼센트가 거짓일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계산하기에 귀족들은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당연하게 기대했던 전쟁 배상금은 모래성처럼 사라졌고, 늘 충만하게 차오를 것 같았던 광물의 할당금은 메말랐다.
그 모든 걸 쥐고 있는 대공은 귀족들의 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변화가 두려웠다. 성녀가 대공의 손에 있어 이제껏 고수해 오던 제국의 세력 판도가 뒤집히는 것보다는 황궁으로 돌아와 조금이나마 자신들의 안위가 보장되는 편이 좋았다.
더욱이 이제는 성녀로 추대받는 공녀였다. 백성의 민심이 비칸데르로 깃드는 것보다야 황궁의 힘이 드높아지길 바랐다.
계산을 마친 귀족들은 연신 환호했다.
세 명, 마델레이네 공작과 두 아들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레오포드는 떠들썩한 환호를 즐기며 빙그레 웃었다. 지금쯤이면 올리비아가 태자 궁에 도착해서 여독을 풀고 있을 터였다.
* * *
그 시각, 소프론 남작 부인은 불안한 시선으로 공녀의 뒤를 따랐다.
“그게 무슨, 공녀께서는 태자 궁으로 가신다고 들었는데.”
“난들 압니까? 태자 궁의 태자비 방에 준비를 다 해 두었는데. 내리는 것조차 싫다 하시니.”
부인은 연신 공녀의 눈치를 보며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손목에 흰 손수건을 감은 모습 외에는 예전과 하나 다를 것이 없었다.
아까 기사의 언질에 따르면 흰 손수건 아래에 태자 전하가 잡아 만든 새파랗고 싯누런 멍이 있다고 했는데…….
끔찍한 모습이 상상되어 소프론 남작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분명 그날 태자비 궁에서 태자와의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터라, 그 기억을 살리고 싶지 않을 듯해 태자 궁을 권한 이도 소프론 남작 부인이었다.
그럼에도 이 태자비 궁으로 온 이유가 무엇일까. 설마, 저를 정말 벌하기 위해서……?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말간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은 더해졌다.
“……내가 떠날 때와 똑같군요.”
“네?”
소프론 남작 부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평이한 말투에는 저를 향한 미움이나 비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태자 전하께서 공녀님이 계실 때와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라 명하셨습니다.”
“부인께서, 고생하셨겠군요.”
믿을 수 없게도, 공녀의 눈빛은 다정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왈칵 치미는 울음에 고개를 숙였다.
죄악감이 심장을 갉아 먹다 못해 검은빛으로 물들이는 사이, 올리비아는 가만한 눈으로 궁의 내부를 모조리 탐색하고 있었다.
모든 게 제가 떠날 때와 같았다.
심지어는 서편 복도의 탁자에는 수선화가, 동편 복도의 협탁 위에는 푸른 수국이 꽂혀 있는 것까지 말이다.
이미 수국 철이 한참 지났음에도.
올리비아는 무심코 꽃잎을 향해 손을 뻗다 멈칫했다. 그저 꽃에 왁스를 입혀 굳힌 줄 알았는데,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법을 걸어 두었나요?”
“예. 보존 마법입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올리비아가 마법을 느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이 이상한 기운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리고 탄식하듯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보존 마법이라니. 그 귀한 마법을 한철 꽃을 유지하는 곳에 쓰다니. 올리비아는 천천히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하다못해 둥근 지붕 아래의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모두 올리비아의 손을 거쳐 갔던 그대로였다. 꽃처럼 보존 마법이 걸리지 않은, 진짜 그대로.
그렇다면, 다른 것도 마찬가지일까?
“……쉬고 싶어요. 내가 예전에 쓰던 방에서 오늘 밤을 보낼게요.”
올리비아는 제 확신이 사실이 될 거라 믿으며 명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쉬시도록 아무도 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고민하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예전처럼.”
그 작은 목소리가 기꺼웠다.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