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반격의 시발점
(141/151)
141. 반격의 시발점
(141/151)
#141. 반격의 시발점
2023.07.05.
자루의 올 사이로 언뜻 빛이 드리웠다. 척척히 젖은 예복의 찢긴 부분으로 바람이 스몄다.
원통형으로 된 계단 이백팔십일 개, 그리고 다섯 번의 열쇠 꾸러미 소리와 널빤지 삐걱거리는 소리를 거쳐 나온 바깥이었다.
윈스터는 기민하게 촉각을 세웠다.
계단을 오를 때만 하더라도 없던 굽 소리와 보폭이 짧은 소리가 느껴졌다.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귀에 익은 건 하워드의 발소리였다. 다리를 다친 것처럼 규칙과 불규칙을 섞어 한쪽 다리를 끄는 소리는 비칸데르의 암호 중 하나였다.
‘건강 양호, 특이 사항 없음.’
하여튼 이 상황에서도 하워드다운 행동이었다. 윈스터는 피식 웃었다. 입안 가득 찬 천 뭉치 아래로 쇠 비린 맛이 느껴졌지만 기꺼웠다.
걸음을 걸을수록 말의 투레질 소리가 가까웠다. 바로 앞에 마차가 있는 듯 투박한 경첩 여닫는 소리가 났다.
“이 마차에 태운 뒤 짚으로 그들을 가리시오.”
고저 없는 여자의 목소리는 간수에게 말을 하던 이와 동일했다.
“황후 폐하의 명으로, 두 죄인을 잠시 심문코자 데려가려 하오.”
짐짝처럼 실린 뒤, 몸 위로 짚이 가득 덮였다. 이내 마차가 출발했다. 싸구려 마차인 게 다행이었다. 마부의 지휘대로 마차가 흔들렸으니까.
황녀 궁과 황후 궁. 눈을 가렸다 해도 윈스터는 황궁 일부를 눈감고도 지도에 그릴 수 있었다.
이대로 황후 궁으로 가는 걸까.
윈스터는 빠르게 마차의 행로를 짐작했다. 하지만 이내 윈스터는 퉁퉁 부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지하 감옥이 아무리 멀다 치더라도 황후 궁으로 간다기에 마차는 꺾임 없이 너무 한 방향으로만 향했다. 마치…… 이 황궁을 벗어나려는 것처럼.
그리고 윈스터의 예상은 적중했다.
어느 순간 쇠창살이 움직이는 선뜩한 소리가 났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름칠 안 된 무언가가 여닫히는 곳은, 두 군데 중 하나였다. 말 여물 마차가 드나드는 쪽문이나, 황녀 궁과 가까운 식재료 통문이나.
과거 극단을 따라 드나들었던 기억이 또렷했다. 감은 눈앞에 길의 전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일정한 속도의 마차, 급하게 꺾이는 굽이치는 도로들, 도로 양옆으로 선 상점들까지.
지금 지나가는 곳은 러헤이른 거리였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황후 독단으로 벌인 일일까, 아니면 태자가 눈감아 주는 일일까. 대공저의 소벨은 이미 태자의 감시를 받을 테니 그가 계획한 것은 아닐 테고.
설마, 전하께서……? 퍼뜩 떠오른 생각은 짧았다. 윈스터는 제 생각에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방식은 전하의 타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대공저에서 쓴 전보가 제도를 빠져나갔을 리는 없었다.
그럼 누가……. 이상하게도 윈스터의 촉은 한 사람을 향했다. 그저 곱게만 자라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일을 했던 이. 가랑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울컥하게 적셨던 분.
마차가 갑자기 멈추고. 마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숨을 들이마신 순간.
“……폐하께는 약속을 지킨다 말해 주세요.”
윈스터는 숨을 다시 뱉을 수 없었다. 감정의 동요 한 점 내보이지 않는 저 목소리는 정말 믿기지 않게도…….
“내 기사들의 상처는 추후 다시 거론한다고도요.”
아니, 믿고 싶지 않게도 아가씨가 맞았다. 윈스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
.
.
자루를 뒤집어쓴 채 젖은 몸 가득 짚을 묻히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 올리비아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우선이 되어야 할 건 제도를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제 기사들이 황궁에서 겪었을 고초와 고통에 대한 위로도 그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마차를 옮겨 태웠다. 고삐를 잡은 디안이 서둘러 마차를 출발시킬 때에야 베서니와 올리비아는 기사들의 얼굴을 가린 자루를 풀었다.
“……세상에.”
베서니가 신음을 뱉는 것처럼 올리비아는 드레스 자락을 세게 그러쥐었다. 목 안쪽이 뜨거운 물이라도 부은 것처럼 시큰거렸다.
두 사람은 엉망인 목덜미만큼이나 얼굴도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도 그들이 제 앞에 있다는 거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녀의 기사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씩 깜빡이며, 흐린 달빛을 눈에 익혀 가던 두 사람의 시선엔 경악이 가득했다.
퉤-. 입안을 가득 채운 천 뭉치를 뱉는 윈스터의 입가에 피가 묻어났다. 동시에 싸늘한 목소리가 마차를 채웠다.
“아가씨. 여기는 왜 오신 겁니까.”
올리비아는 잠시 멈칫했다.
장난기 없는 윈스터는 처음이었다. 늘 익살을 떨던 이가 표정을 지우자 위압감은 배가 되었다. 싸늘한 시선은 베서니를 향했다.
“베서니 님. 답지 않은 일을 하셨습니다. 스젤린 경, 정말…….”
하. 나직한 한숨이 아팠다. 반쯤은 예상한 일에 베서니는 고개를 숙였다. 둘의 생명이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아가씨는 예비 대공비였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몰라도, 이럴수록, 대공성 안에 계셨어야죠. 만약 저희가 풀려나지 못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가씨께서는 대공가의 구심점으로 대공가의 보호를 받으셔야 합니다.”
감정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사는 주인을 지키고, 주인은 명예를 지킨다. 반문할 수 없는 완벽한 이론이었다.
정도를 지나친 싸늘함에 함께 얼굴을 굳혔던 하워드가 윈스터를 툭 쳤지만, 윈스터는 참을 수 없었다. 대공 전하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아가씨는 정도를 모르고 희생한다. 정을 준 사람이라면 이렇게 무모할 정도로. 마음이 아리는 동시에 윈스터는 더 차가운 얼굴로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 어떤 마음으로 오신 건지는 알겠지만,”
“경들을 빼내는 건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일이었어요.”
“아가씨!”
“그래도 다시 봐서 좋네요. 정말, 걱정했어요.”
화를 내려던 순간, 윈스터는 말문이 막혔다. 애정을 담은 눈이 속속들이 부은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만약, 경들의 기사도에 폐를 끼쳤다면 그건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맹세코 비칸데르 기사들의 실력을, 특히나 대공 전하의 든든한 믿음인 그대들의 실력을 폄훼할 생각은 없었어요.”
덤덤한 진심은 단숨에 기사들을 향한 올리비아의 신뢰도를 보였다. 알고 있었음에도, 말로 듣는 건 또 생경했다. 윈스터는 귓불이 뜨겁다고 느꼈다.
“그저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능력껏 경들을 위험에서 떼어 놓고 싶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경들은 제 기사들이잖아요. 경들의 맹세를 받았을 때부터, 아니 받기 전부터 저는 경들을 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약을 가져다주었던 윈스터, 말없이 챙겨 주던 하워드. 제 설레발을 내보이는 게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기사들은 말없이 올리비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곳에 온 건 저도…….”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디에 귀가 붙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선대 대공에 관한 일부터 제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한 건 제도를 빠져나간 후에 이야기를 할게요.”
하지만 그럼에도 기사들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면피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올리비아는 풀 죽은 얼굴을 애써 숨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명령인데 나를 혼낼 거면 줄을 서요. 지금 경의 말을 들어 보니, 돌아가면 삼 일은 에드윈한테 혼날 것 같으니까.”
윈스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화를 내야 했다. 지금 이 위험이 마지막이길 바라면서, 예비 대공비로서의 지위를 각성시켜야 했다.
하지만…….
“절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셔야 하겠지만…….”
한숨 나오게도, 지금 윈스터는 다시 한번 대공의 마음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맨날 아가씨한테 지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 흉까지 봤었는데.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가씨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말간 얼굴의 뺨이 조금씩 붉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윈스터는 애써 엄한 말을 꺼냈다.
“첫말은 이거여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아가씨의 검이 되겠다 맹세했는데, 아가씨께서 제 방패가 되어 주셨군요.”
“……당연한 일이죠.”
돌아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아가씨께 지위에 대한 교육을 건의할 거라는 다짐을 하면서 윈스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칸데르로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더 선명해졌다.
“그렇지만 아가씨. 저는 다시 한번 황궁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올리비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벙찐 얼굴이 예쁘고 또 웃겨서. 윈스터는 실없이 웃다가 제 배를 잡았다.
윽-. 웃긴 만큼 아팠다.
.
.
.
정보상 위르겐.
올리비아는 존재조차 몰랐던 이가 함께 감옥에 갇혀 있었다니. 미안하지만 올리비아는 다시 제 기사를 황궁으로 가게 놔둘 수 없었다.
“실례일 수 있지만, 위르겐이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갈 만큼 소중한 자인가요?”
“아닙니다.”
윈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위르겐은, 정보상입니다. 전하께 은혜를 입어 비칸데르의 상당 부분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비칸데르에 충성을 바친 이들처럼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요?”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 입을 열 수 있는 이는 위험 인자입니다.”
“위르겐이 알고 있는 정보 중 에드윈에게 해를 끼칠 만한 게 있나요?”
묵묵히 대답해 오던 윈스터는 입술을 붙였다. 대공이 해를 입을 정보는 없었다.
하지만 에딩튼에서 아가씨의 이야기를 같이 들었다.
답 없는 윈스터를 보던 올리비아는 결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생각보다 쉬웠다.
“가요.”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먼저,”
“대신 저는 아까의 커피 하우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태자가 저를 찾아온다면 황궁으로 갈 수도 있고요.”
“아가씨!”
허를 찔린 표정을 하던 윈스터가 눈을 뒤집으며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황후가 제게 준 시간은 점점 끝나 가고 있었다. 금방 태자가 눈치챌 것이고, 그렇다면 제도에 있는 윈스터가 꼬리를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차피 제도를 벗어나기에는 늦었어요.”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저만 여기에 내려 주십시오!”
윈스터는 당장이라도 마차에서 뛰어내릴 것처럼 굴었다. 올리비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마차의 문을 그러쥐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제도에 온 건, 칼터 경과 인터필드 경과 함께 안전히 돌아가기 위해서예요.”
“하지만 태자한테 잡히면 더 위험합니다. 위르겐을 구하는 데 아가씨께서 하실 일도 없으시,”
“여러분이 갇혀 있었던 감옥은 어딘가요. 동궁의 지하 감옥, 서궁 쪽의 수중 감옥, 귀족 감옥, 아니면 오르페유 감옥?”
올리비아가 윈스터의 말을 끊었다. 줄줄 읊는 감옥은 윈스터도 다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하 감옥이라면……. 윈스터는 냉큼 답했다.
“동궁의 지하 감옥입니다.”
“이유는요?”
“저희가 지하에 있었어서…….”
“땡.”
윈스터는 멍청히 눈을 깜빡였다. 올리비아가 낭랑히 웃으며 말했다.
“동궁에는 감옥이 없어요. 황궁의 감옥은 단 두 개, 서궁의 오르페유 지하 감옥과, 귀족 및 중죄인을 구금하는 북쪽의 감옥.”
“…….”
“물론 감옥 내까지 들어가진 않아서 구조는 몰라요.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저보다 황궁의 길을 잘 아는 이는 없어요.”
황궁의 길을 안다는 건 크나큰 자산이었다. 감옥의 위치까지 파악한다면 더. 그걸 잘 아는 윈스터는 더 이상 항변을 멈추었다.
올리비아는 낮은 목소리로 제가 아는 길에 대해 알려 준 뒤 덧붙였다.
“……이 정도에 경이 아는 황궁의 길을 이용하세요. 그리고 제가 커피 하우스에 있다면 시선은 저한테 쏠릴 테니, 위르겐을 탈출시키기에도 나을 거예요.”
쇠심줄처럼 질긴 그녀의 고집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선선히 웃으며 마부석을 향해 노크했다. 디안이 마차를 세우자 친히 문까지 열며 말했다.
“그러니 어서 다녀와요.”
“하지만 아가씨. 태자와 대면하는 건 상당히 위험 부담이 크지 않습니까?”
제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쓰는 윈스터에게는 미안했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마찰 없이 나가는 편을 선호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황궁까지 가는 것도 생각해 두었어요. 그러니 이제 걱정은 사절이에요.”
모두가 무거운 침묵을 유지했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베서니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그 전에 베서니. 나한테 마법 하나만 걸어 줄래요?”
* * *
황후는 눈을 깜빡였다.
제 잘난 아들, 대륙을 손에 주무를 태자가 그녀를 찾아온 것은 오프템 후작 부인이 지하 감옥에서 기사 둘을 빼내었다는 보고를 마치자마자였다.
“기사 둘을 빼내셨다고요.”
시녀들을 내쫓은 태자는 난생처음 보는 얼굴을 하며 기사 둘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황후는 서둘러 상황 설명을 했다.
올리비아 그것이 감히 자신이 태자비가 된 이후에 복수할 것을 걸고서 황녀와 엘킨 공작을 동시에 협박했다, 아주 소름 끼치는 독한 것이다…… 라는 말로 말이다.
그녀는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제 아들이 자신이 어머니에게 무심했다며 그녀의 편에 서 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폐하께서는 고작 그런 말에 넘어가 기사 둘을 내어주셨단 말입니까?”
싸늘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마치 독사의 위협처럼 오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