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 최고의 찬사 (140/151)


#140. 최고의 찬사
2023.07.02.



 
황후는 제 눈을 의심했다.

고요함으로 가득한 응접실에서 ‘마담이었던 자’는 허락도 없이 예를 마친 채 몸을 일으켰다.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 선명하게 황후를 응시하는 초록 눈.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까지.

분명 올리비아가 맞았다.

황후는 이를 악물었다.


“공, 공녀! 이 어찌!”

오프템 후작 부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었다.


“격조했습니다, 부인.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공녀가 어찌……! 이 무슨……!”

분명 마담 이세도라였다. 방정맞은 태도부터 품위 없는 목소리까지 분명히 그녀였는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일까.

‘공녀’의 외양을 한 자는 순하게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부인. 덕분에 폐하께서 이곳까지 당도하셨지 않습니까.”

순간 오프템 후작 부인은 숨이 턱 막혔다. 제가 전달한 편지가 그러면……!

부인은 황급히 황후를 향해 몸을 낮췄다.


“폐, 폐하! 아닙니다! 저는 정말 공녀가 전달한 편지인 줄 몰랐습니다!”

황후는 미동도 없이 공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시린 얼굴에서 어떤 생각이 오가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막막함에 검지로 올리비아를 가리키던 후작 부인은 문가로 달려갔다. 공녀는 저를 통해 황후한테 수상쩍은 편지를 보냈다. 그것도 엘킨 공작을 미끼 삼아서.

이거야말로 황족 모독이었다.

하지만 부인이 문을 열기도 전에 꽃처럼 화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생각이 나는구나. 네 그 형편없던 담음새들이.”

황후는 빙그레 웃으며 타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마지막으로 올리비아와 대면했던 기억은 분노와 오욕으로 얼룩져 있었다. 황후는 한시도 저를 내려다보던 저 초록 눈을 잊지 못했다.

황녀의 평판을 추락시키고 태자가 손에 넣고자 혈안이 된 저것이 언젠가는 제 손에 들어오길 바랐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기회가 다가오다니……!

이곳은 황실 기사들이 수색을 마친 곳이었다. 이 응접실 내에 타인은 더 이상 없었다.

절대적인 수세의 우위는 황후에게 있었다.

그러니 여유로워야 했다. 적어도 제 앞에 서 있는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보다는 더.


“……그때보다는 나아졌지만.”

말을 끝맺는 동시에 황후는 다과 접시를 올리비아 쪽으로 밀었다.

예상했다는 듯 올리비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저런.”

황후는 아쉽다는 듯 입술 끝을 올렸다. 그 여유로운 자태에 후작 부인이 침착함을 되찾고 황후의 곁에 섰다.

황후는 평가하듯 올리비아를 훑어 내렸다.


“신기하구나. 그 머리며 천한 눈이며 올리비아 그것이 분명한데 조금 전 같은 재롱이라니. 비칸데르령에 능력이 쇠진한 마법사 하나가 있다고 들었는데.”

황후는 말끝을 끌었다. 비상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마법사가 하나 있었다면, 조금 전 끌고 나간 퉁퉁한 남자이겠지.

저 애가 마법사를 데려온 이유는 하나.

황후는 커다랗게 웃으며 배를 잡았다.


“그렇게라도 네 기사들을 구하고 싶었던 거야? 마법사를 보내서라도?”

우스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오프템 후작 부인은 눈만 끔뻑였다.


“오랫동안 황궁을 떠나 있더니. 황궁에 마법 결계가 처져 있는 것을 잊은 모양이구나.”

황후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아. 그제야 오프템 후작 부인은 황궁 전체를 둘러싼 결계를 떠올렸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었다.

허락받은 마법이 아니라면 모든 마법을 튕겨 내는 강력한 결계. 황궁의 훌륭한 마법사들은 결계 사이로 스치는 마력만으로도 성문으로 달려올 것이었다.

대공이 함께 온 것이 아니라면 승산이 없었다. 설마 대공도 모습을 바꾼 채 제도로 들어왔을까? 순간적으로 불안함이 스쳤지만 오프템 후작 부인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대공이 온다면, 모습을 바꾸는 대신 당당히 황궁으로 들어갔겠지.

그 말에 신빙성을 더하듯, 황후의 목소리가 나긋해졌다.


“네 마법사는 황궁의 성문으로 들어가는 즉시 아무런 마법도 쓸 수 없을 거야. 가엾은 것. 태자한테 인질을 한 명 더 준 꼴이로구나.”

그리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때를 놓치지 않고 비난했다.


“너도 참, 이제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대할 줄 알게 되었구나. 차리라 네가 태자한테 직접 가지 그랬어. 그렇다면 그 남자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황후는 이내 눈썹을 추켜올렸다. 기대한 반응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조금 웃을 뿐이었다.


“그러면 그 남자가 죽는지 죽지 않는지 함께 기다려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뭐?”

“다과는 쏟아졌지만, 차는 아직 식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뒤 올리비아는 황후의 앞자리 의자를 빼어 앉았다. 태연한 모습에 오프템 후작 부인이 소리쳤다.


“공녀! 황후 폐하께서 허락하시기도 전에 앉다니!”

“놔두게. 어차피 궁으로 가고 나면 이리 편한 의자에는 앉지 못할 텐데.”

황후는 선심을 쓰듯 말했다.

올리비아는 태연히 앉아 티 포트를 들었다. 그리고 황후와 제 잔에 차례로 차를 따랐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황후는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간을 끌어 봐야 불리한 건 올리비아 저 애의 몫일 텐데. 저 태연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황궁 성문에는 닿았을까?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면, 기사는 제게 보고를 하기 위해 다시 커피 하우스로 돌아올 것이었다.

황후는 황궁 성문에서 다시 이곳으로 오는 시간을 계산해 보다 고개를 저었다.

시간 낭비였다. 차라리 기사들로 하여금 태자에게 올리비아가 이곳에 있는 걸 알리는 게 빠를 터였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엘킨 공작의 거취에 대해 물으실 줄 알았는데.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황후는 등받이에 나른히 몸을 기대며 피식 웃었다. 걱정이 안 되는 바는 아니었지만, 올리비아한테 물을 건 아니었다.


“하긴. 황제 폐하께 들으셨겠죠. 엘킨 공작이 비칸데르령으로 저를 찾아왔다고.”

“그 세 치 혀로 거짓말도 잘하는구나. 공작이 너를 찾아간다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도 다 있어.”

황제는 엘킨 공작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귀족파인 엘킨 공작이 황제의 명을 받아 비칸데르령으로 갔을 리도 없었다. 황후는 코웃음 쳤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안타깝다는 듯 황후를 바라보았다.


“동기 간의 우애래 봤자 고만고만한 모양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모르셨군요.”

그러더니 은밀한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엘킨 공작이 저를 양녀로 입적시켜 태자비로 추대하겠다 제안하러 왔던데 말입니다.”

거짓말이 분명했다. 제 오라비인 엘킨 공작이 황녀를 욕보인 올리비아를 양녀로 입적시키다니. 터무니없는 말에 황후의 눈 위로 노여움이 너울졌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종알대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는 미리 말씀드렸다 하던데. 설마 공작이 폐하를 두고 황제 폐하께만 충성을 다할 리는 없으실 텐데 말입니다.”

“말장난은 그만하지. 공녀. 준비한 건 이게 전부길 바라. 이제 곧 황궁으로 끌려갈 마당에 뭘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지만.”

황후가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하지만 바깥은 조용했다. 황후는 한 톤 높여 소리쳤다.


“들어오래도?”

거듭된 허락에도 문 바깥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자 오프템 후작 부인은 서둘러 문가로 다가갔다.

문을 열기 바로 직전, 올리비아가 말했다.


“들어와요.”

황후의 눈이 커다래졌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제 기사가 아니었다. 아까 본 주방장이었다. 복도는 고요했다. 주방장은 아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디안이 폭죽을 쏘았습니다. 황궁의 결계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가씨.”

“그럴 줄 알았잖아요. 베서니.”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오갔다.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이 점점 오프템 후작 부인을 조여 왔다. 부인은 저를 휘감는 감정을 떨치기 위해 목청껏 소리쳤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 두려운 게 없느냐? 이 제국의 주인이 누구신 줄 알……!”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던 오프템 후작 부인이 순간 입술만 뻐끔거렸다. 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두 손이 목을 감싸듯 매만졌다.


“제 능력이 쇠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목소리 정도는 나오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황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주방장을 바라보았다.


“아. 모습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

손가락을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주방장은 중년의 여인으로 변했다. 연하늘색 눈동자가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쥐를 인간처럼 둔갑시키는 것도 가능하죠.”

황후는 끔찍한 것을 들은 것처럼 얼굴을 굳혔다. 쥐라니. 그러면 아까 마주한 이가 사람이 아니라 쥐란 말인가?


“아쉽습니다. 마법 결계만 없었어도 저희 기사가 시종으로 탈바꿈해 들어갔을 텐데.”

만반의 준비를 한 디안은 계획대로 황궁 성문 앞에서 저희를 기다릴 거였다.


“안타깝게도 제 첫 번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니. 이제는 두 번째 계획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폐하.”

다정한 목소리가 황후를 농락하고 있었다.


“엘킨 공작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비칸데르의 감옥은 황궁의 감옥처럼 잘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감히, 제국의 공작을 두고 나와 거래라도 하자는 거냐?”

감옥이라니! 황후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올리비아는 희게 웃었다.


“아뇨. 저는 거래가 아닌 협박을 하러 온 것입니다. 정말, 황후 폐하의 손발이 되었던 엘킨 공작이 제 손아귀에 있는 걸…… 두고 보실 겁니까?”

황후는 독살스러운 눈으로 제 눈앞의 천것을 쏘아보았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차라리, 태자비 자리를 달라고 해라. 그렇다면 내 허락을 할 테니.”

황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짜랑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올리비아는 아까 황후가 그랬던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조롱했다.


“폐하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제가 태자비가 되는 걸 막으셔야죠. 제가 태자비가 된다면…….”

올리비아는 잠시 말을 끊고 유연하게 입술을 올렸다.

태자비가 된다면……. 그 악의적인 웃음은 황후로 하여금 온갖 상상을 하기에 충분한 여지를 주었다.

성녀로 추앙받을 태자비와 가련하게 묻힐 제 딸. 제 동생의 안위보다 올리비아를 먼저 챙기던 태자. 대공과의 추문이 묻은 얼룩덜룩한 태자비.

가장 나쁜 상상만이 황후의 머릿속을 채웠을 때, 올리비아가 말한 건 황후의 예상 바깥의 이야기였다.


“황녀 전하를 니켈 왕국으로 보내 버릴 텐데 말입니다.”

“……공녀. 못 본 새 많이 아둔해진 모양이야. 니켈 왕국의 왕은 이미 예순이 넘었고, 그 후계는 공주가 이미…….”

새되게 쏘아붙이던 황후의 눈이 흔들렸다. 올리비아는 정답을 알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현왕의 후궁으로 보낼 것입니다.”

“이 천한 게……!”

황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침착함을 가장했던 눈 아래로 분노와 두려움이 혼재된 게 똑똑히 보였다.


“가장 강력한 제국, 그다음 가는 왕국과의 동맹 관계는 무엇보다 탄탄해야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그 멍청한 청을 들어주실 성싶으냐? 황녀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의 여인을 황제께서 고작 후궁 따위로 던져 준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냔 말이다!”

“태자는 이미 저를 되찾겠다며 무모한 수를 던졌고, 황제 폐하께 황녀의 가치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황녀와 달리 저는…….”

올리비아는 스스로를 가리켰다.


“제국의 성녀가 되어 지금 가장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황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창백해지길 반복했다. 올리비아는 마음껏 웃었다. 그리고 황후가 했듯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폐하께서 생각하시기에 어느 쪽을 가까이 두는 게 이로울 것 같으십니까?”

올리비아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지금 저는 두 명의 목숨을 내걸고 도박을 하고 있었다.

가장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 했다. 황후가 넘어오기 가장 좋을 법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그녀의 딸과 아들을 어떻게든 진창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혀가 움직이는 대로 말했다.


“엘킨 공작님의 행적은 모르셔도 마델레이네 공작님이 비칸데르령을 들렀다는 이야기는 들으셨겠죠? 그분께서도 제 편이 되어 준다 하시더군요.”

그 말에 거짓이 얼마고 진실이 얼마든 상관없었다.

황후의 눈은 떨리고 있었고, 올리비아는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 엘킨 공작과 황녀 전하를 영영 제게 내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황후의 눈에 붉은 실핏줄이 터졌다.


“기꺼이 저를 제 기사들과 함께 제도 밖으로 내보내 주시겠습니까?”

“이…….”

황후가 주먹을 꽉 쥔 채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소름 끼치게 독한 것.”

올리비아는 환하게 웃었다.

극찬이었다.


 

.
.
.

황궁의 지하 감옥.

똑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머리에 쓰인 자루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가려진 곳에서 청각은 놀랍도록 예민해졌다. 윈스터는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에 신경을 쏟으려 애썼다.

그러지 않는다면 몸 위로 기어 온 쥐가 새로 생긴 상처를 파헤치는 고통만 상기될 뿐이었으니까.

윈스터는 입안 가득 들어찬 천 뭉치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이따위 게 없어도 스스로 숨통을 끊는 일은 없다는 걸 태자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계속되니 나 또한 지겹군. 공녀가 빨리 오길 바라지.”

 
아가씨가 이곳에 올 일은 없다. 어떻게든 저희 힘으로 탈출해야 했다. 하워드와 위르겐도 비슷한 처지이겠지.

다행히 윈스터는 황궁을 드나들며 제법 이곳의 길을 익혔다.

한 번의 기회만 있다면 얼마든 가능할 텐데. 안타깝게도 그 한 번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통탄을 금치 못하던 사이, 윈스터가 움찔했다. 쥐가 후다닥 멀리 달아나는 순간 들린 건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태자 전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황후 폐하의 명으로, 두 죄인을 잠시 심문코자 데려가려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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