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자 (139/151)


#139.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자
2023.06.28.



 
붉은 노을이 긴 꼬리를 그리며 수평선 너머로 떨어졌다. 창을 투과하며 들어온 붉은 빛이 대리석 바닥 위로 슬금슬금 범위를 넓혔다.

편지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전부인 황후 궁 응접실.

시립한 어린 시녀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분명 불을 켜야 할 시간인데,

오늘따라 태자 궁에 다녀온 황후는 무표정했고, 그 숨 막히는 태도는 하필 오늘 늦게 입궁한 오프템 후작 부인이 한 통의 편지를 바쳤을 때에야 정점에 달했다.


“……그러니까.”

적막이 깨졌다. 황후의 고요한 목소리가 멈췄다. 그림자가 진 황후의 얼굴은 아름다움을 떠나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분위기를 알아챈 시녀들은 썰물처럼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오직 황후와 오프템 후작 부인만이 남은 곳에서, 오프템 후작 부인은 황후가 읽고 있는 편지를 바라보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 편지를 어떻게 받았다고?”

“저택으로 제게 온 초대장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초대장치고 조금 두껍다고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런, 그런 게 있을 줄은 추호도 몰랐습니다.”

- 버드나무 가지는 모두 한 뿌리에서 난 형제라고 합니다. 오늘 보아하니 엘킨 공작저에서 자란 버드나무 가지가 하나뿐이던데,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시름을 덜어드리고자 오늘 저녁 8시경에 에넨텔 커피 하우스에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엘킨 공작가의 상징인 버드나무를 들먹이다니! 완벽한 협박이었다. 황후의 눈에 독기가 번졌다. 감히 협박할 게 없어 황후의 동기를 두고 협박이라니…….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짐작 가는 이들이 번뜩 떠올랐다. 저를, 그리고 엘킨 공작을 동시에 적대시할 이라면.

……올리비아. 하지만…….


“……그것은 아직 안 들어왔다 했는데.”

황후는 중얼거렸다. 그렇게 눈에 띄는 외양이라면 들어오자마자 발견되었을 것이고, 태자가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보고자 나갔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와서 올리비아가 저를 적대시할 이유는 더 이상 없었다. 그 애를 황녀의 수족으로 부렸던 과거는 마리아 에텔이 다 까발렸으니……!

황후가 잠시 멈칫했다. 곱게 칠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한 명 더 있다. 올리비아만큼이나 저를 적대시할 이가.

마리아 에텔.


“그 발칙한 게 태자와의 관계를 들먹이며 오슬란에서 어느새 왕자까지 꼬여 냈다지.”

 
여름 연회의 마지막 날, 마리아 에텔의 얼굴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광인처럼 희번덕거리던 눈과 피를 흘리던 입까지.

불현듯 등 뒤가 오싹했다. 만약 음식에 약을 넣으라 지시한 게 황후라는 걸 마리아 에텔이 알고 있다면, 그래서 일부러 복수라도 하고자 오슬란 왕자의 정부를 자처한 거라면…….

황후는 급박한 눈으로 은쟁반 위의 편지를 다시 살폈다. 이 편지를 보낸 이가 마리아 에텔이 아니라는 흔적을 찾아야 했다.

오프템 후작 부인이 바친 편지 전체에서는 옅은 향수 향이 끼쳤다.

황후가 좋아하는 향유 향과 비슷한 향. 그건 제도 사교계에서도 이미 널리 번진 유행이었다.

그 외에도 편지를 보낸 자를 특정할 만한 특징은 없었다.

에넨텔 커피 하우스는 챈들러 극장에서 극을 본 귀족들이 선호하는 커피 하우스였다. 태자 같은 젊은 층이 제법 찾는다고 했는데, 도통 황후는 그 취향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오프템 후작 부인한테 동봉한 편지에는 밀봉한 편지를 황후인 제게 전달하라는 말뿐이고.

우아하지만 낯선 필체. 올리비아나 마리아 에텔의 것이었다면 황후는 물론 오프템 후작 부인이 몰라볼 리는 없었다.

분명 아랫것을 시켰을 텐데……. 황후는 다시 편지를 읽다가 눈을 깜빡였다.

어느덧 몰려온 어둠에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몇 시지?”

“6시가 다 되어 갑니다. 폐하.”

바로 고하는 목소리에 황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하우스까지 가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시간과 장소를 그쪽에서 제시한 게 걸렸지만.


“……에넨텔 커피 하우스 전체를 비우라 하게. 재밌는 손님이 찾아올 듯싶으니.”

누가 오든 대비만 하면 될 일이었다.

황후의 입술 곡선이 서늘하게 떨어졌다.

오프템 후작 부인은 명을 받들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 궁의 기사들이 에넨텔 커피 하우스 전체를 장악했다.

에넨텔 커피 하우스에 남은 자라고는 커피 하우스의 마담 이세도라와 주방장뿐이었을 때, 그제야 황후가 커피 하우스로 향했다.

* * *



“오, 오늘 예약은 8시, 크리스털 응접실 딱 한 건이 있기는 합니다만 손님으로 황후 폐하께서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당장이라도 다이아몬드 응접실로……!”

“됐네.”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황후는 미간을 좁혔다.

러헤이른 거리의 에넨텔 커피 하우스.

주인인 마담 이세도라는 여전했다. 황후의 방문에도 예법조차 잊은 채로 반가운 척을 해 대더니만, 여전히 시끄럽고 방정맞기 짝이 없었다.

목소리도 흥분이 가득 섞인 탓인지, 이리저리 튀는 게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커피 하우스는 주인의 품격을 따라간다는데, 그나마 건물은 유행이라도 맞춰 다행이었다.

마담은 기가 죽은 듯 예약 장부만 들고 서 있었다. 떨궈진 고개가 영 보기 싫었다.

황후가 턱짓을 하자, 오프템 후작 부인은 장부를 받아 들며 물었다.


“예약은 누가 한 건가.”

“어제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종업원이 예약 편지를 받았다는데, 거기 붙어 있을 겁니다.”

장부에 붙은 편지는 후작 부인에게 온 편지의 필체와 같았다.


“그러면, 크리스털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됐네. 기사들이 안내할 터이니.”

황후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미 전체 수색을 마친 기사들은 커피 하우스의 내부를 손바닥 보듯 훤히 읽고 있을 거였다.

하지만 마담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아무리 수색을 하셔도 크리스털 응접실에 딸린 방은 찾지 못하실 겁니다. 귀하신 분께만 제가 직접 알려드리는 저희 커피 하우스의 비밀이라서 말입니다.”

……응접실에 딸린 방이라니? 황후의 안색이 싸하게 굳었다. 기사가 조금 당황해서 말했다.


“설계도에는 그런 방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폐하.”

“새로 시공했습니다!”

분위기도 모르는 듯 마담은 해맑게 대답했다.


“그런 게 있다면 진작 말했어야지!”

오프템 후작 부인이 버럭 호통을 질렀다. 마담은 다시 기가 죽은 것처럼 어깨를 수그렸지만, 아무도 마담을 동정하지는 않았다.

.
.
.



“세, 세상에……!”

오프템 후작 부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마담이 말한 비밀의 방을 열자마자, 덜덜 떨고 있는 남자 한 명이 기사들을 보자마자 방의 침대 밑으로 숨어들었다.

기사들은 삼엄한 경계 태세를 갖추며 황후를 보호하는 동시에 남자를 제압했다. 황후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남자를 보았다.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 남자는 제 얼굴만 가리며 침대 밑으로 숨어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만일의 상황에 대한 대비로 기사는 남자의 입에 천 뭉치를 끼워 넣었다.

하지만 남자는 기사가 목에 칼을 대자 눈만 꼭 감지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네 주인이 누구인지 밝힐 의향이 있느냐?”

“…….”

“밝힐 의향이 있다면 입에서…….”

“그만.”

우렁찬 기사의 말을 중단시킨 황후가 뒤를 슬쩍 바라보았다. 마담의 얼굴이 희게 질린 채로 바르르 떨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마담은 그 자리에 털썩 엎드렸다.


“폐, 폐하!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저이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제가 이 방의 비밀을 폐하께 고할 수나 있었겠습니까?”

“또 모르지. 설계도도 황궁에 바치지 않고, 방이 딸린 것도 뒤늦게 말하지 않았나.”

황후의 나긋한 목소리에 마담은 덜덜 떨었다. 마담이 떠는 건 제 눈 밖이었다. 저렇게 허술한 남자를 이곳에 넣어 두고 저와 약속을 잡은 이는 과연 누구일까.

황후의 관심사는 바로 그것이었다. 황후는 고고하게 기사를 향해 명령했다.


“무조건 황궁 감옥으로 압송해 두게. 내 잠시 숨만 고르고 출발할 테니.”

저 허름한 자의 배후가 누구인지 캐내는 것은 이 밝은 곳보다 지하 감옥이 어울렸다. 황후의 말을 이해했는지 기사는 분노한 눈으로 명을 받들었다.

이내 우악스레 몸이 결박된 남자가 질질 끌려 나갔다. 기사들이 지키고 선 응접실 문이 닫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탁, 문이 닫힌 뒤 응접실에 남은 건 황후와 오프템 후작 부인, 그리고.


“정말, 정말,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라니. 폐하,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부디 자비를…….”

마담 이세도라뿐이었다. 황후는 사정하듯 흐느끼는 마담을 보지도 않은 채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했다.

8시 5분, 편지에 적힌 약속 시간이 지났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마음이 편안해진 황후가 눈매를 휘어 마담을 응시했다.


“자비는 되었고. 이 응접실에 방이 딸린 걸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태자 전하를 비롯해 고위 귀족 영식 세 분이 전부입니다. 그 외에는 이 방의 존재를 아는 이는 없습니다. 안다 해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지는 모를 겁니다!”

이 비밀을 아는 이들 중 태자가 있다니. 황후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되물었다.


“태자가?”

“예! 이전부터 마리아 에텔 영애와, 아니, 그게…….”

무심코 마리아 에텔 이야기를 꺼낸 마담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바닥을 짚었던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황후는 이미 똑똑히 들은 터였다.

마리아 에텔……. 정말 마리아 에텔일까?

하긴, 그 애는 늘 약은 척했지만 어설펐다. 평생을 비호만 받고 자란 철부지답게 일의 끝단이 늘 풀려 있었다.

태자비가 되기에는 한 뼘 모자란 가문도, 또다시 왕자의 정부가 된 처지도, 올리비아의 연회를 따라 하던 능력까지도 전부.

하. 황후는 그제야 비웃음을 터트렸다. 낭랑한 웃음이 점점 커져서 오프템 후작 부인이 당황할 정도였다. 하지만 황후는 그저 눈물이 날 정도로 마리아 에텔이 우스웠다.

정부가 되었다기에 내심 걱정거리가 되는 줄로 알았는데. 에텔 후작도 이미 제 영지로 내려간 지 오래였다. 분명 사람을 구할 재간이 안 되니 저리 형편없는 남자나 보냈겠지.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그림은 완벽했다. 곤두선 신경이 누그러지며, 응접실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마담과 어울리지 않게 제법 괜찮은 곳이었다.

황후는 천천히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눈치 빠르게 의자를 당긴 후작 부인이 옆에 시립했다.

테이블 위에는 다과가 한가득이었다. 먹지는 않을 테지만, 제법 꾸밈새가 황후의 취향이었다.


“담음새가 보기 좋군.”

기분이 좋아지니 말이 곱게 나갔다.


“그야 황후 폐하께서 직접 제게 알려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자네에게 언제…….”

무심코 대답을 하던 황후의 눈이 커다래졌다. 마담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것도 황후가 잘 아는 목소리로.

황후의 등골이 섬찟해졌다.

허락도 없이 마담이 몸을 일으켰다. 금발 머리카락이 천천히 서늘한 은발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경박하던 얼굴이 천천히 사라지며 황후가 잘 아는 얼굴이 드러났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오프템 후작 부인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경황이 없기는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흠잡을 데 없는 예법을 선보이는 이. 동시에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않던 자.


 


“제국의 달께 경배를.”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