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 공녀의 세 가지 소원 (138/151)


#138. 공녀의 세 가지 소원
2023.06.25.


눈을 감으면 모든 전쟁이 생생히 떠올랐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부터 대지 위로 작열하는 열기와 습한 기후. 끝나지 않는 전투 속에서 고통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던 때.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조차 모를 때는 날씨만이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전부이던 시절.

옆을 지켜 주는 건 비칸데르의 기사들뿐이던, 열망만 가득 품고 독기를 양분으로 삼았던 시기.

에드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무뎌진 기억은 단번에 사라졌다.

빛이라고는 통유리를 투과하는 달빛이 전부인 방. 피부에 닿는 공기는 적당히 따뜻했고, 제 앞에는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 쥐어진 마석의 커팅 면이 반짝거렸다.


“느리지만 선대 대공 전하께서는 분명한 차도를 보이고 계십니다.”

 
에드윈은 조금 전, 의원이 했던 말을 곱씹고 또 되새겼다. 잘생긴 입매가 느리게 올라갔다.

지금 그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순간 안에서 살고 있었다. 모든 건 완벽했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그리운 아버지는 눈앞에 계셨고, 그에게 모든 행복을 가져다준 연인은.


“전하. 아가씨께 편지가 왔습니다.”

제게 귀여운 소꿉장난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것도 애간장을 아찔하게 태우는 방식으로 말이다.

에드윈은 날쌔게 브록이 내민 보라색 편지 봉투를 잡아 조심스레 뜯었다.

편지 첫 문장은 놀랍도록 그리운 단어로 시작했다.


- 이름 모를 기사님께. 벌써 여섯 번째 편지예요. 설마 아직까지 첫 번째 편지를 못 찾은 건 아니죠?

 
찾았다. 올리비아가 떠난 그날 밤, 제 집무실 책상 위에서.

얼른 가서 잠을 청하라는 엄하고도 다정한 말이 가득한 편지.

에드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당겨졌다.

놓고 간 편지를 시작으로 올리비아는 하루에 한 통씩 편지가 도착하게끔 제게 편지를 썼다. 한 통, 두 통, 세 통……. 그리고 지금 여섯 번째 편지까지. 올리비아가 트리스탄으로 떠난 지 벌써 6일째였다.

보라색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글씨는 꼭 전쟁터 막사에서 편지를 받던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언제 편지가 올까, 때를 모르고 기다렸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저녁마다 편지가 올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지만 말이다.


- 여긴 트리스탄이에요. 소풍을 즐기며 천천히 가느라 조금 늦었어요. 하지만 제 건강 상태는 아주 좋으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서둘러 간다면 이틀, 삼 일이 걸리는 곳을 장장 육 일이 걸린 게 조금 의아했지만, 소풍이라는 말에 에드윈은 느리게 눈을 휘었다.

이어지는 편지에는 트리스탄에서 할 일들에 대한 설렘과 선대 대공을 향해 기도를 하고 있다는 상냥한 마음, 그리고 모두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따뜻한 안부가 적혀 있었다.

여섯 통의 편지 모두 마지막 단락은 같았다.


- 무척이나 에드윈의 답장이 받고 싶지만, 꼭꼭 써서 모아 둬요. 에드윈의 편지는 돌아가서 에드윈 앞에서 직접 읽고 싶으니까요. 잘 참고 기다려 주면, 제가 아주 근사한 선물과 함께 돌아갈게요.

- 에드윈의 최선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함께 기도하는 리브 그린이. 마음을 담아.

 
에드윈이 편지를 읽고 또 읽는 새, 브록은 심각한 표정으로 편지 봉투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께 저희가 쓰는 편지 봉투를 보내 드릴까요?”

보라색은 너무 눈에 띄었다. 지금처럼 일반 잡부가 편지를 배달하는 형식이라면 유실되거나 누군가 가로챌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비칸데르 대공가는 적이 아주 많았으니까.

대공의 레이디가 보내는 편지였다. 이 말인즉, 필체를 흉내 내거나 편지의 색상을 따라 보내며 혼선을 줄 확률이 없지 않다는 거였다.

하지만 에드윈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필체를 흉내 내든 같은 편지지를 사용하든 상관없어.”

“되게 자신만만하십니다. 전하.”

“그야 당연하지. 리브의 필체는 이미 외우고도 남았는데.”

“겨우 여섯 통 받으시고요?”

브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성안에 제법 퍼진 ‘리브 그린’ 이야기를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친절한 안내 대신 축객령을 내렸다.

그리고 브록이 나간 뒤에도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편지 위 글씨를 살폈다.


 
꾹꾹 눌러쓴 단정한 필체. 삐침과 정자가 어우러진 우아한 글씨. 이미 전쟁터에서 인이 박이게 봐 온 필체였다.

.
.
.

갈 길이 멀었다. 가장 먼저 리테일 영지, 미네르 영토, 하비엘 지대.

명단을 보던 자브론 남작은 막막한 숨을 삼켰다. 그나마 경계를 가까이하는 영지여서 다행이었다.

남작은 가볍게 말의 고삐를 휘둘렀다. 기사 세 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공기를 가르는 바람 사이로 벼가 익어 가는 냄새가 났다. 삼 일 전, 아가씨가 있을 때보다 조금 더 무르익은 내음이었다. 자연스레 곡식을 둘러보며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더불어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게 세 가지 있어요.”

 
부탁이라는 표면 아래 명령이 더 자연스러운 위엄이었다.


“첫째는, 매일매일 일꾼을 보내 순서대로 이 편지들을 비칸데르로 보내 줘요. 꼭 이 편지 봉투, 그리고 이 편지 그대로여야 합니다. 오늘은 이 4번 편지를 보내야 해요.”

 
미리 써 둔 듯 4번부터 15번까지. 총 12일 치의 편지였다. 대공성으로 하여금 트리스탄에 아가씨가 있다고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는…… 제도로 가는 마차 행렬이 있을까요?”

 
제도로 가는 행렬에 끼어들 참인가?

자브론 남작은 한눈에 봐도 반짝이는 은발과 눈에 띄는 초록 눈을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영지를 경유해 제도로 들어가는 상인들의 마차 행렬을 알려 주었다.

모든 요청을 그러려니 받아들인 그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건 마지막 부탁이었다.


“셋째는 아주 화려한 기사 정복을 하나 준비해 주었으면 하는데. 레이스가 풍성하고 값싼 장식이 우스꽝스럽게 달린 걸로, 치수는 딱 저 기사만 하면 좋겠네요.”

 
그걸 어디에다가 쓰시려고……?


“남작님! 편지가!”

다급한 기사의 목소리에 놀란 남작은 고삐를 낚아채듯 잡았다. 아주 조금 열린 짐 가방 틈으로 삐져나온 편지가 바람에 하늘하늘 날려 길 위에 내려앉았다.

그것도 하필 진흙 자국 위에.

황급히 달려간 남작이 얼른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모레 보낼 편지인데! 모서리에 제법 넓은 진흙 얼룩이 남아 있었다.

끙-. 아무리 봐도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남작은 조금 전의 자신을 탓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남작은 잠시 갈등했다. 그러는 사이에 기사가 말했다.


“남작님, 리테일 영지에 제법 큰 상단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똑같은 편지 봉투를 사 오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었다. 갈등은 순식간에 끝났다. 남작은 환하게 웃으며 기사를 칭찬했다.

그래. 겨우 봉투 하나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도 ‘기사님께’라고 단 네 글자밖에 안 적힌 봉투 하나.

* * *

햇빛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아침. 레오포드는 근래 들어 가장 완벽한 아침을 맞이했다.

꿈에는 올리비아가 나왔고, 깨어났을 때는 기꺼운 보고를 듣기도 했다.


“트리스탄에서 출발한 마차 행렬이 오전 중에 북문으로 제도에 입성한다고 합니다!”

 
하지스 백작의 보고에 레오포드는 오전 내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하지만 채 점심이 되기 전, 그의 기분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분명 닷새 전, 공녀가 비칸데르령에서 출발했다고 고했지. 백작.”

고저 없는 목소리가 서늘했다. 베르탱도 하지스 백작도 아닌 백작이라는 호칭.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났지만 하지스 백작은 묵묵히 이 공포를 맨몸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삼 일 전에는 트리스탄 영지에 들른 뒤 바로 마차가 나왔다고 했고.”

“…….”

“그런데 왜!”

쾅-! 책상을 내리치는 파열음이 매서웠다. 하지스 백작은 절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려 애썼다. 하지만 번뜩이는 태자의 눈앞에서는 뭐든 무용지물이었다.


“왜 아직도 오전에 북문을 통과했어야 할 올리비아가 제도 성문을 통과했다는 보고조차 없는 거야?”

잇새로 짓이기듯 나오는 목소리는 위협적이었다. 하지스 백작은 아교를 바른 양 꽉 막힌 입술 새로 겨우 대답했다.


“송, 구합니다. 전하.”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트리스탄 영지까지 보냈던 세작이 제게 보고하지 않은 게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송구합니다. 백작님. 사실은, 트리스탄에서 나오던 마차 행렬이 제법 길어 정확히 공녀가 어느 마차에 탔었는지 내부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마차들이 한 번 타 영지로 이탈하던 때가 있긴 했습니다만, 줄곧 제도로 오는 마차들의 행렬을 따라왔는데……. 정작 제도에 입성한 행렬에서 공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차들이 들어온다는 북문에 지키고 섰는데, 정작 공녀가 보이지 않았을 때. 그때의 아득함이 다시 밀려왔다.

하지만 백작은 차마 그 사실을 태자한테 고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저 눈을 딱 감고 태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중이라 먹힐 리가 없었지만, 죽는소리라도 해야 했다.


“전하. 네 개의 성문에 초상화는 물론 태자 궁의 시종들까지 보내 놓았습니다. 은발에 초록 눈. 제도의 누구든 공녀에 대해 잘 알지 않습니까?”

태자의 미간이 조금 풀어졌다. 기회였다.


“또한 공녀가 제 사람들을 끔찍이 아끼지 않습니까? 분명 공녀는 올 것입니다!”

정신없는 터에 하지스 백작은 눈치채지 못했다. 공녀의 제도행을 확실시하는 제 말 중 태자의 심기를 비트는 단어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제 사람들’. 순식간에 올리비아의 경계 밖으로 쫓겨난 레오포드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날카로운 기세가 흉흉히 피어나던 참이었다.


“태자……! 정녕 내가 찾아와야 합니까?”

허락도 없이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황후가 들어왔다. 보나 마나 황녀의 편을 들어 달라는 청이겠지. 며칠 새 해쓱하게 마른 뺨은 황후의 미모와 위엄을 죽였다.

치미는 화에 벌컥 성을 내려던 레오포드는 쯧, 혀를 차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덜덜 떠는 하지스 백작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네놈 말대로 눈에 띄는 외양이니. 빠르게 찾아 모시고 와라.”

눈에 띄는 외양. 단번에 문맥을 파악한 황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공녀 그것이 제도로 온 겁니까? 태자?”

 

.
.
.

태양이 가장 높이 뜬 한낮.

동문을 지키고 선 태자 궁의 시종은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지루한 눈으로 동문에 늘어진 마차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마차 수색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 소식도 못 들었소? 황궁에서 누군가 황족을 모욕했다던데……!”

수군대는 소리가 컸다.

이미 북문으로 마차 행렬이 들어갔다는 소식이 아침부터 흘러들어 왔는데. 무슨 일인지 하지스 백작은 씩씩거리며 더욱 철통같은 경계 태세를 갖출 것을 명했다.

덕분에 저는 지금 점심도 못 먹고 이 신세였다. 경계병들이 마차를 수색하는 사이 그 마차에서 내린 이들을 모두 살피는 것.

점심을 전후하여 들어오는 마차의 주인들은 대개 비슷했다. 축제가 끝났어도 제도를 구경 오는 시골뜨기들, 혹은 상인들.

시큰둥한 얼굴로 사람들을 살피던 시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흔한 조합이었다.

통통한 중년의 하녀와 알록달록 낡은 숄로 머리카락과 얼굴을 온통 가린 시골뜨기 아가씨.

하지만 이상하게도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하녀가 아가씨를 막아서며 물었다.


“저희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십니까?”

“후드를 벗어 주시겠어요. 아가씨?”

시종의 청에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듯, 경계병 셋이 다가왔다.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경계병들을 보자 하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시종은 아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뜻언뜻 보았던 공녀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어딘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안 그래도 태자 전하가 공녀에 대해 집요하게 군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혹시나 이곳에서 제가 공녀를 발견한다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떨리는 시종의 손이 아가씨의 숄로 향할 때였다.


“……무슨 일이슈.”

……응?

이상한 말투와 함께 마차 뒤에서 요란한 기사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시종은 제 눈을 의심했다.

저건 기사보다는 광대가 입을 법한 옷이었다. 허리춤에 찬 칼조차 기사가 아닌 시골뜨기 용병이 찰 법한 싸구려였다.

김이 샜다. 설마, 공녀가 저런 이를 기사로 데리고 다니려고.

기대감이 식어 가는 와중에 아가씨는 숄을 조금 내렸다. 밀짚 색 머리카락과 평범한 얼굴.


“아이고, 아가씨. 싸게 싸게 얼굴 숨기시죠. 마님이 아시면 제가 죽습니다.”

상스러운 말투의 기사가 못내 창피한 듯 주눅 든 표정까지.

하…… 그가 기억하는 공녀는 분위기는 음울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품위가 있었다.

이 여자는 공녀가 절대 아니었다.


“……가시오.”

시종은 낙담하듯 한숨을 쉬었다. 순식간에 제 꿈이 물거품처럼 날아갔다. 허락을 받은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 바람에 기사의 치렁치렁한 장식이 휘날렸다.

아직까지 공녀는 제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동문을 지키는 시종은 다시 길게 늘어진 마차를 바라보며 하품을 했다. 덕분에 그는 볼 수 없었다.

성문을 지나는 동시에 참았던 창피함이 몰려온 듯 붉게 물든 기사의 얼굴을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