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 명분과 실리, 황후를 향한 계책 (137/151)


#137. 명분과 실리, 황후를 향한 계책
2023.06.21.



 
디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뭔가,”

정적을 가르며 말이 퍼져 나갔다. 동시에 껄끄러운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싱긋 올라간 입매가 어색했지만 놀란 마음 때문이라고 애써 치부했다.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뭔가 잘못 아셨을 겁니다. 아가씨. 무려 칼터 경과 인터필드 경입니다. 인터필드 경은 귀족이고 비칸데르를 대표해서 황궁에 있는데. 또 칼터 경은 제도로 간 것 자체도 아는 이가 별로 없……!”

점점 매끄러워지던 디안의 말이 뚝 멈췄다. 간절히 바라보던 베서니의 얼굴 역시 굳어졌다.

올리비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내가 잘못 알았을 확률이 높아요. 하지만 적어도 태자가 칼터 경이 제도에 있다는 걸 안다는 건 좋지 않은 상황이죠.”

“당장, 당장 전하께 말씀드리고 기사단을 대동하시죠. 아가씨.”

디안의 연두색 눈이 맹렬히 빛났다. 감히 비칸데르의 부기사단장들을, 그것도 둘씩이나 감금했다고 말하다니.


“비칸데르는 제국이 두렵지 않습니다. 아가씨. 당장 돌아가서 전하께 말씀드리면, 십 일 내로 그 둘을 구출할 수 있습니다.”

잇새로 내뱉는 목소리가 섬뜩했다. 터질 듯 붉은 얼굴과 달리 풍기는 기운은 섬찟할 정도로 고요했다. 디안 스젤린. 그는 지금 기사로서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기사단을 대동한다면 황궁에서는 이를 반역으로 몰아갈 거예요.”

“반역이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비칸데르는 곧 공국으로……!”

“내가 중요시 여기는 건 둘의 목숨이에요.”

“하지만……!”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면, 초반에는 볼모인 양 칼터 경과 인터필드 경을 살려 둘 겁니다. 하지만 스젤린 경의 말대로, 승패가 확실히 보인다면 그들은 비칸데르의 두 기사를 국법에 맞게 처리할 겁니다.”

국법? 그 말에서야 디안은 두 기사가 무슨 사유로 구속이 되었는지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억지로 묶어 둔 것이 아니었나?


“……두 사람은 황족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있어요.”

“하지만 아가씨. 어떤 멍청이가 쓸모 있는 포로를 처리하겠습니까? 승패가 확연해질수록 그들은 결국 저희에게 경들을 내어 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는 전쟁은 모르지만, 황족 모독으로 인해 분란이 생긴다면 결과적으로 황족을 모독한 이들은 모두 죽습니다.”

순간 디안이 멈칫했다. 숱하게 겪어 온 전쟁과 결이 다른 모습에 당혹스러운 듯싶었다.


“……어째서.”

“프란츠는 제국이니까요.”

디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올리비아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륙에 하나뿐인 제국에서 ‘황족 모독’은 대역죄로 여겨져요. 또한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전쟁을 일으킨 불씨’ 그 자체가 되는 거죠.”

“…….”

“전쟁의 승패가 나뉘기 전까지는 반역자들을 한 번에 처리하겠다는 명분으로 살려 두겠지만, 승패가 가려졌을 때에는 단칼에 처리한 다음 ‘전쟁을 일으킨 불씨’를 없앴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끝내려고 할 거예요.”

“……볼모가 사라졌는데 누가 그 상황에서 전쟁을 멈추겠습니까.”

상상만으로도 아득했다. 디안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안 멈추겠죠. 그러면 동맹국들은 제국을 돕는다는 핑계로 참전을 선언할 겁니다. 아무리 제국의 강건함을 비칸데르가 주도했다고 해도, 우호국들과 동맹을 맺은 건 엄연히 ‘프란츠’를 성으로 쓰는 황실이니까요.”

“참전이 결국은…….”

디안은 말하다 말고 주먹을 쥐었다. 올리비아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동맹국들이 황실을 도우면 더 큰 전쟁이 될 수도 있겠죠. 당연히, 비칸데르 역시 위험해질 수 있고요.”

“이, 미친 자가 제국의 태자라고…….”

베서니가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올리비아는 베서니의 말에 동의했다.

레오포드는 정말이지 미쳤다. 지금 제게 내민 조건은 그가 가장 중시 여기던 ‘명분과 실리’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 타고 있었다.

황족 모독으로 시작한 반역과 내전이라는 훌륭한 명분 아래 얼마든 숨길 수 있는 실리.

지난 여름 연회 때, 프란츠를 방문한 왕국들은 이미 비칸데르와 황실 간의 균열을 보았다.

제국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검과 황실의 틈.

헤페르티처럼 비칸데르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나라가 있는 한편에는 분명 비칸데르를 눈엣가시로 보는 왕국도 있을 것이다.

올리비아의 비약은 얼마든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기사를 되찾아 오겠다고 기사단과 동행했다가는 황실에게 반역의 명분만 주는 꼴이 된다.

올리비아는 다시 디안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이 엉성하고 또 권력적인 상황에 대해 실감이 가는지, 디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희망을 놓치지 않은 듯 베서니한테 매달렸다.


“베서니 님! 베서니 님의 마법은 어떻습니까?”

“……황궁에는 결계 마법이 처져 있어서 불가능해.”

베서니는 애가 끓는 마음을 겨우 삼키며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황궁이라니.

거기에 제 마법을 모두 무용하게 만들 수많은 궁정 마법사들까지. 베서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세누아의 계곡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법사인 제가 이렇게 무능하게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제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그깟 경계 마법 따위는 하나도 문제 될 게 없었을 텐데.

그사이 아가씨가 또렷하게 말했다.


“내 목표는, 칼터 경과 인터필드 경을 비칸데르령으로 무사히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전하께는 말씀드리셔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두 부기사단장의 행방을 아셔야…….”

“에드윈한테 말하는 건 가장 최후로 남기고 싶어요. 에드윈이 알면 바로 제도로 올라올 테니.”

그러다가 올리비아는 작게 덧붙였다.


“……선대 대공 전하의 곁을 떠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선대 대공의 곁에서 그를 떼어 낼 수는 없었다.

모든 설명이 끝났다. 더 이상 올리비아를 막을 수 있는 사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베서니는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 태자를 만나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태자요?”

“네?”

“제가 황궁으로 가는 건 태자를 보기 위함이 아니에요. 쓸모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측에도 나름 인질이 한 명 있잖아요.”

“인질, 이라뇨?”

“황후의 오라비이자 귀족파의 구심점.”

엘킨 공작?

어벙하던 디안과 베서니의 얼굴에 잠시간 깨달음이 스쳤다.


“황제와 태자는 몰라도, 적어도 황후만큼은 그를 되찾기 위해 성의를 다하지 않겠어요?”

핏줄의 귀함은 모르겠으나, 황후와 엘킨 공작이 서로를 앞세워 귀족파를 쥐락펴락하려던 것은 잘 안다.

아마도 황녀가 칩거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쯤이면 황후는 엘킨 공작을 통해 어떻게든 황녀의 이미지 쇄신을 노리려 할 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베서니는 불안한 얼굴이었다.


“알아요. 방벽은 사방으로 두는 게 좋죠.”

올리비아는 베서니와 디안의 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자브론 남작이 결심한 얼굴로 출발 준비가 된 기사를 바라보았다.


“……남작뿐 아니라 ‘성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영지가 참 많더군요.”

 
올리비아에게 편지를 보낸 영지는 트리스탄뿐만이 아니었다.

리테일 영지, 미네르 영토, 하비엘 지대. 그 외에도 황녀가 영주로 있는 크고 작은 영지들.


“모든 영지 대리인들에게 전하세요. 남작이 들었던 것과 똑같이. 그렇게 하면 당장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곡식과 빵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황녀가 시킨 일들은 저를 영주 대리인들에게 각인시켰다. 황녀도 저도 예상하지 못한, 우스운 일이었다.

거절하는 이도 있겠지만, 적어도 춘궁기를 겪은 리테일만큼은 제 편에 서리라 생각했다.


“두 가지 방벽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나 더 있다면…….”

디안의 말에 대답을 하던 올리비아가 말을 삼켰다.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손이 뚝 멈췄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듯 감긴 은빛 머리카락을 보자, 문득 저를 바라보던 애달픈 얼굴들이 떠올랐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 그 표정들은 확실치 못한 패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완벽하게 제 편을 들어 줄 거라 확신할 수 없는, 완전하지 않은 조커.


“걱정하지 말아요.”

올리비아는 일부러 힘주어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의식처럼, 허전한 제 목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기도하고 왔어요. 칼터 경과 인터필드 경이 무사히 우리와 돌아가길.”

 

* * *



“폐하. 저 좀 봐 주시옵소서. 이리 말없이 계속 폐하의 허락만을 기다리는 제가 안쓰럽지도 않으십니까?”

집무실에 서 있은 지 두 시간이 흘렀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수치스럽게도 황제의 집무실에 서서 그의 부름만 간절히 바란 게.

결국 황후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으며 읍소했다.

서러운 눈물방울이 고운 얼굴을 타고 흘렀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황제는 시선 한 줌 주지 않았다.


“세상에, 폐하. 일이 다 잘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비칸데르의 두 놈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태자가 공녀를 불렀다는데, 이제는 노여움을 거두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그만 가시오. 황후.”

하지만 황제의 말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며칠째 울며 드러누운 황녀는 이미 피골이 상접해 말라 있었다.


“황후 폐하, 어머니. 이대로 황제 폐하께서 저를 버리시는 건 아니시겠죠? 어머니. 한 번만 황제 폐하께 제 이야기를 해 주세요.”

 
신경 써서 뿌린 향유 향기가 황제한테 영향을 미치길 간절히 바라면서, 황후는 우는 목소리에 간드러짐을 섞었다.


“황녀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폐하.”

“…….”

“폐하.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이지 않,”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이기에 내 마리아 에텔처럼 보내지 않은 거요.”

“폐하, 어찌 황녀를 고작 후작 영애와 비교……!”

“황후!”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쩌렁하게 울렸다. 황후는 숨을 참고 눈을 깜빡였다.

오늘의 고요함이 적기라 생각했는데, 황후의 생각은 틀렸다. 바다 빛 눈동자에 스민 성성한 분노에 황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시리게 올라간 비웃음이 황후를 향해 말했다.


“황후, 아직도 모르오? 황후가 무시하는 그 후작 영애는 벌써 오슬란에서 왕자의 정부를 자처하고 있다는 걸?”

“……예?”

순간 황후는 제 귀를 의심했다. 분명 마리아 에텔 그것이 다시는 올라올 수 없게 중간 귀족한테 보냈는데. 갑자기 왜 왕자가 나온단 말인가.

오슬란의 왕자라면, 마리아 에텔을 보내기 전까지 황녀의 혼처로 생각한 자이기도 한데.

황후의 반응이 우습다는 듯, 황제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그 발칙한 게 태자와의 관계를 들먹이며 오슬란에서 어느새 왕자까지 꼬여 냈다지.”

“…….”

“차라리 황녀한테 그런 재주라도 있었더라면, 내 진즉 대공 그놈을 휘어잡고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어, 어떻게……!”

 

 
순간 황후의 손이 벌벌 떨렸다. 단박에 눈물이 마를 정도로 경악스러운 말이었다. 마치 황녀를…….


“어떻게 황녀를 두고 그런…….”

“그러기에. 황후가 잘 좀 하시지 그러셨소. 황녀가 성녀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 때 경거망동 못 하게 막았어야지.”

싸늘한 일갈이 비수처럼 황후의 심장을 꿰뚫었다. 차디찬 시선이 그녀에게 쐐기를 박았다.


“어미가 되어 딸을 지키지 못했으면서 내게 바라는 것만 많군. 황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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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황후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프템 후작 부인은 문이 완벽히 닫힌 것을 확인한 뒤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화장대에 있는 모든 물건을 쓸어 내팽개쳤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황후는 독살스러운 눈으로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화가 치밀다 못해 수치스러웠다.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가……!”

황제가 되어서 스스로 대공의 일을 해결 못 해 자식들에게 맡긴 것은 생각도 안 하고는, 결국 한다는 게 황후인 저의 탓이라니……!

그러고서는 감히 천박하기 짝이 없는 마리아 에텔과 제 귀한 딸을 비교해?

황후는 이를 으득 갈았다.


“……내, 오라버니만 있었어도 이리 손이 묶이지는 않았을 텐데.”

잇새로 분한 숨이 들썩였다.

마리아 에텔을 그리 밀어주더니 일이 잘못된 후로 나 몰라라 하던 엘킨 공작은 황녀의 망신 이후로 황후한테 고개를 조아렸다.

다시 황녀가 우뚝 설 수 있게 돕겠다던 말이 순수한 의도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엘킨 공작만 있었어도, 황녀를 다시 연회의 중심으로 밀어 넣어 재기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얼마 전, 귀족파의 구심점인 엘킨 공작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황후는 히스테릭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오프템 후작 부인을 비롯한 시녀들은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엘킨 공작의 행방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단 말이냐?”

날카로운 고함이 방을 짜랑하게 울렸다. 이 모든 것이, 황후에게 이상한 편지가 도착하기 불과 삼 일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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