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 비칸데르의 ‘것’을 내건 협박 (135/151)


#135. 비칸데르의 ‘것’을 내건 협박
2023.06.14.



 
한편 황궁의 연회장.

갑작스레 태자가 나간 뒤, 코모데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하워드 인터필드 남작을 에워쌌다. 한발 늦은 귀족들은 애타는 눈빛으로 그들을 관망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남작. 회의가 아니면 볼 일이 없으니.”

“그러게 말입니다. 세율도 세율이지만 이번 기회에 귀족끼리도 모여야 하는데. 태자 전하께서 어찌나 남작을 귀히 여기시는지, 데려가시고선 저희까지는 끼워 주지 않으시지 뭡니까. 하하하.”

사교적인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인터필드 남작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무리 뒤에 있는 갈색 머리 기사와 시선을 맞췄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애가 탄 귀족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그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초조의 기저에는 그들이 공통으로 받지 못한 전후 배상금이라든가, 또는 광물 세율 책정이라든가 하는 돈 문제가 있었다.

젠장. 코모데 백작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시야에 꽉 차게 보이는 연회장은 여름 연회보다 훨씬 웅장했다.

부유한 황궁이야 으레 있던 아버지의 날 축제를 이렇게 성대하게 치를 만큼 건재한 모양이지만 저희는 사정이 달랐다.

해결하지 못한 어음이 쌓였다.

전쟁 배상금을 기대하며 펼친 사업들은 누군가 훼방이라도 놓은 것처럼 줄줄이 망해 부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광물 세율까지 떨어진다는 말이 돌자 투자자들 역시 투자금을 회수하고 있었다.

이건 안 될 말이었다. 저 같은 고위 귀족이 그깟 푼돈 때문에 고작 대공의 가신 따위에게 절절매다니.

하지만 닥친 현실 앞에서 백작은 눈을 벌겋게 뜬 채 끙, 하고 탁음만 흘렸다. 무슨 말을 해야 배상금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그러는 사이 조바심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먼저 배상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남작. 내가 딸의 장례를 치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딸을 챙기지 못한 후회가 뒤늦게서야 밀려오더라고. 하지만 어쩌겠나. 슬프게도 내게는 딸을 추억할 것이 하나 없으니 지금이라도 딸을 위해 재단을 세워 내 딸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후원이라도 하고 싶은데.”

“나, 나도 마찬가지일세! 그리고 대공께서 광물 세율을 낮춰 백성을 돕는다는 좋은 뜻을 품으셨으니, 제도 사정을 훤히 아는 이가 함께하는 게 어떻겠나? 내가 도와드리리다!”

뒤늦게 코모데 백작이 덧붙였다. 하지만 인터필드 남작의 시선은 뒤에 있는 평민 기사를 향하기에 급급했다.

저자를 치우는 게 먼저였구나!


“그나저나, 아무리 대공 전하의 가신이라지만 행정 일을 해 본 적 없을 법한 평민 기사가 듣기에는 좀 어려운 이야기인 듯싶은데. ……경은 성이 칼트, 라고 했나?”

평민의 성 따위를 기억하는 건 격에 맞지 않았다.

다행히 얼추 맞았는지, 갈색 머리 기사가 백작을 마주했다. 백작은 턱짓으로 다른 곳을 가리켰다. 말을 섞는 것조차 불쾌했다.


“정식으로 연회에 왔으니 조금 즐겨 보는 게 어떻겠나?”

“……그렇게 배려해 주신다면, 저도 좋죠.”

비칸데르의 가신이랍시고, 거들먹거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예상보다 더 순순한 모습에 코모데 백작은 마음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다른 귀족들이 다가와 기사를 밀어내고 인터필드 남작을 감싸듯 섰다.

만약 귀족들이 조금만 눈썰미가 있었더라면 그들이 깔본 평민의 입매 끝이 바르르 떨렸다는 것을, 갈색 눈동자가 마지막까지 인터필드 남작을 보며 믿으라는 듯 깜빡였던 걸 발견했을 텐데.

하지만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아슬아슬하게 손에 닿을락 말락 하는 배상금과 광물 세액으로 어떻게든 이득을 얻어 볼까 궁리하기에 바빴으니까.

그리고 고작 남작 따위한테 고개 숙인 채 애걸해야 한다는 상황에 대한 분노를 숨기기에도 급급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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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의 상당수가 하워드 쪽으로 달라붙었다. 역시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조금 전, 한순간이지만 폭발하듯 훅 끼친 이상한 기운을 말이다.

윈스터는 무의식적으로 제 팔을 쓸어내렸다. 팽팽하게 곤두선 긴장감을 삼키려 애쓰며 그는 탐색하듯 주변을 살폈다.

저와 같이 기운을 느낀 자는 하워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황궁 2기사단 단장과 4기사단 부단장 등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기사들.

그리고 태자.

성대한 만찬 속에서 돌연 굳어졌던 그 표정을 윈스터는 똑똑히 보았다. 저희를 훑듯 바라보던 묘한 시선과 한순간 경직되었던 공기의 흐름까지.

태자가 나갈 때 바로 따라붙어야 했는데. 귀족들이 에워싸기 전, 찰나의 시간 동안 윈스터는 멍청하게도 그 기운의 정체와 발현지부터 생각했다.

위르겐을 찾기 위해 온 황궁에서 신경 쓰이는 일까지 벌어지다니.

어쨌든 위르겐을 찾기 위해선 지금이 적기였다. 모든 시선이 하워드에게 쏠린 지금. 윈스터는 당장 치안대 감옥으로 가야 했다.

그는 연회장 바깥으로 향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머릿속에서는 치안대의 감옥으로 가는 길을 떠올리는 대신 아까 느낀 기운을 분석하고 있었다.

순간을 강렬하게 물들인 기운, 그렇지만 어쩐지 좋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분명히……!


“저런…….”

생각을 끊듯 오만하고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단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색채.


“대공의 충실한 기사가 아닌가.”

태자였다. 뒤따르는 하지스 백작까지 보고 나서야, 윈스터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작은 태양께 영…….”

윈스터는 잠시 멈칫했다. 평소 남의 말을 잘도 뚝뚝 끊어 먹는 태자가 그답지 않게 윈스터의 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메스꺼웠지만, 윈스터는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광을.”

“아직 연회가 끝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내 연회가 마음에 안 드나 보군. 아니면…….”

태자가 비스듬히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바다 빛 눈동자 속 새까만 동공이 얄팍하게 세로로 찢기는 순간이었다.


“비칸데르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나쁜 짓을 저질렀거나?”

“…….”

이상했다. 분명 태자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등신인데. 지금 태자의 시선은 마치 쥐를 앞에 둔 뱀처럼 여유만만했다.

윈스터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자는 빙그레 웃으며 윈스터에게로 바투 다가갔다.


“내 안 그래도 그대를 비롯하여 인터필드 경과 함께하는 작은 시간이라도 만들고 싶었는데.”

“…….”

“같이 들어가지.”

권유형의 문장과 달리, 연회장의 문은 다시 열렸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것임에도, 연회장의 귀족들은 다시 태자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아주 많을 테니.”

흘리듯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윈스터는 걸음을 멈추고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의 시선이 지나치게 번들거렸다. 그 기이한 시선이 조롱하듯 윈스터와 하워드, 그 둘을 친친 휘감을 때였다.

닫히는 연회장의 문 사이로 누군가 다급히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폐하!”

순간 윈스터는 태자의 입술 끝이 만족스럽다는 듯 올라가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찰나에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태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허락하듯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킨슨, 마법사인 그대가 연회에서 이 무슨 소란인가!”

“이 무엄함을 용서하소서. 전하. 급한 사안이라.”

연로한 황궁 마법사가 안절부절못하며 태자와 윈스터를 번갈아 바라보았을 때, 윈스터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저,”

황급히 저자의 말을 멈춰야 했다. 하지만 윈스터가 움직이기도 전에 마법사가 눈을 꼭 감으며 외쳤다.


“북쪽 비칸데르령으로부터 폭발적인 마력이 느껴졌습니다!”

황궁을 제외하고 마법사가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인 비칸데르.

마법사는 피를 토하듯 말을 이었다.


“차마 입에 올리기도 무엄하지만……! 그건 분명히 이 제도를 향한 공격적이고 매서운 기운이었습니다!”

연주자도 놀란 듯 우아하게 흐르던 선율이 날카롭게 끝났다. 모두가 아연한 기색을 숨길 수 없는 사이, 태자는 느른한 얼굴로 좌중을 살폈다.


“매서운 기운이라니, 설마…….”

“…….”

“……역모의 기운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역모라니……! 태자, 어떻게 그렇게 발칙한 말을!”

황제가 노성을 내질렀다. 연회장을 쩌렁하게 울리는 노여움에 태자는 예를 갖추듯 황제를 돌아보았다.


“송구합니다. 폐하.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는 뜻에서 꺼낸 말입니다. 다만…….”

거친 숨소리가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린 태자는 다시 한번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윈스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제가 그것을 걱정하는 이유는, 대공이 지난번에 했던 말 때문입니다. 그가 원하는 건 고작 재산 같은 부스러기가 아니라고 했던 그 말을, 저만 기억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폐하.”

마치, 대공이 바라는 게 반역이라는 듯한 은근한 흐름으로.


“태, 태자 전하. 그런 황망한 말씀은 거둬 주시옵소서!”

이걸 알아챈 게 비단 윈스터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귀족들 중 누군가가 몸을 낮추며 읍소했다. 태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 괜히 심각한 말을 꺼낸 듯하군. 대공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속단하지는 말게. 내가 한 말은 엄연히, 만약을 가정한 것이니. 그렇지 않은가, 칼터 경.”

다시 화살은 윈스터를 향했다. 화살의 궤적을 따라 날아든 주변 귀족들의 눈초리가 심상찮았다.

다수와 소수. 비단 그것이 아니라도, 비칸데르의 부귀를 시기하던 귀족들의 시선이 윈스터와 하워드를 옴짝달싹 못 하게 조였다.

어느샌가 다가온 기사는 윈스터와 하워드를 태자의 가까이로 밀어붙였다.

태자는 모르는 척 좌중을 살폈다.


“이 이상한 기운을 또 느낀 자가 있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저와 부단장 또한 조금 전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황궁의 기사단장과 부단장, 이렇게 둘씩이나 느꼈는데, 당연히 비칸데르의 기사인 그대들 또한 느꼈겠지?”

“……그렇습니다.”

“거참 이상한 일이군. 생전 느껴 본 적 없던 강렬한 기운이 제도에 오지 않던 비칸데르 식솔들이 연회에 참석함과 동시에 느껴지다니.”

혼잣말이라고 치기에는 몹시 큰 목소리였다. 태자가 윈스터와 하워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 상황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게 있나?”

“……없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이 우연을 설명하겠는가?”

“저희가 이곳에 있는 건 광물 세율의 조정 때문이지 않습니까. 전하. 세율 책정에 대한 결정을 미루신 건 전하이시고요.”

“그래? 그대들이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게…….”

느릿하게 독니를 드러내는 잔혹한 웃음이었다.


“……광산에 대한 황궁의 비밀문서 때문은 아니고?”

그러더니 레오포드는 윈스터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황궁의 보물을 갈취하기 위해 고작 광물 세율 따위로 우위를 점하려 들더니, 내가 허용치 않자 이토록 무엄한 방법으로 시위를 하는 건가?”

“황궁의 보물이라뇨, 그건 원래 비칸데르의……!”

아차. 광산의 원소유주에 대해 아는 것은 황족과 비칸데르 측근 가신들 뿐이었다. 눈앞까지 몰려든 화에 소리쳤던 윈스터는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귀족들이 들은 건 ‘황궁의 보물’뿐이었다. 이미 그들의 시선에서 저희는 반역을 조장한 죄인이었다.

때를 맞추듯 태자가 소리쳤다.


“지금부터 제도의 모든 귀족들을 비롯해 상인, 평민, 하다못해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이 제도를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마치 연극을 하듯 좌중을 압도하는 목소리가 연회장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제국을 어지럽게 만드는 이 불경한 자들은 황궁 감옥에 처박아 두게. 죄명은…….”

이 모든 상황이 진짜 연극이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이 눈에 빤한 덫을 눈치채지 못하고 제 발로 황궁으로 들어왔다.

기운이 느껴졌든 아니든 오늘의 결말은 똑같았을 거다. 그를 확인해 주듯 태자는 비웃음을 그린 채 윈스터와 하워드를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황족 시해 혐의로 하지.”

시니컬한 목소리가 떨어짐과 동시에 윈스터는 차갑게 웃으며 태자와 하지스 백작을 번갈아 보았다. 사전에 준비라도 한 듯 수십 명의 기사가 순식간에 윈스터와 하워드를 억눌렀다.

부유한 대공가의 가신에서 단번에 황궁의 범법자가 된 윈스터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비칸데르로 추방하는 대신 황궁에 가두어 놓는다. 그들을 인질 삼겠다는 명백한 의도에 윈스터는 주먹이 새하얗게 질릴 때까지 주먹을 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하지스 백작은 오싹함을 가라앉혔다. 무거운 표정과 달리, 지금 태자는 그 누구보다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마치, 아까 폭발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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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인 마력이라……. 반역인가?”

 
차마 입에 올리기도 무엄한 말이었다. 하지스 백작은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뭐, 상관없어.”


“…….”


“오히려 잘된 일이지. 연회장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모두 비칸데르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지 않은가.”

 
태자의 말대로였다. 오히려 잘된 일.

솟구치던 귀족들의 분노가 명확히 방향을 잡았다. 귀족들은 비칸데르의 가신들을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았다.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뻣뻣하게 구는 데에 당연히 믿을 구석이 있었을 테지! 세상에!”

“고작 전리품 가지고 기세등등할 때부터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비칸데르 대공 또한 제국의 귀족 아닙니까? 고작 가솔이 감히 무도하게도 어떻게 그런……!”

대공가에 대한 열등감, 이제까지 쩔쩔맸다는 수치스러움, 그리고 그 부를 노리는 탐욕스러움까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합쳐진 채, 귀족들은 서로 아우성을 쳤다.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며 레오포드는 황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전권을 주었던 황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오포드는 개운하다는 얼굴로 읊조렸다.


“이제 리브한테 편지를 보내. 두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소유욕으로 얼룩진 시선이 저 먼 티아제 궁을 바라보았다. 레오포드의 잇새로 섬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공조차 알지 못하게 당장 내 옆으로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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