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 마델레이네 공작의 후회 (134/151)


#134. 마델레이네 공작의 후회
2023.06.11.



 
고요한 숲속.

마차가 멈춰 설 때만 하더라도 지오반니 마델레이네는 제가 할 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은 그치가 했지.”

 
그 애가 온 지 얼마 안 되던 날 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헤이즐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들었던 말. 그 말 그대로였다.

외면해 왔던 작은 얼굴이 밀려왔을 때, 지오반니는 몇 번이고 그 서러움을 마주했다. 그리고 속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서러운 얼굴을 닦아 줄 수 있을지는 올리비아 그 애의 선택이지만,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건넬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무슨 기운을 느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세 분은 곧 제도로 돌아가실 테니 괜한 억측이 나오지 않게 직접 확인해 보고자 나왔습니다.”

정작 올리비아를 마주했을 때, 지오반니는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가정했을 때보다 훨씬 더 숨이 막혔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공작을 마주 보는 올리비아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웃었다.


“해서, 어떤 기운을 느끼신 건가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낯설고도 정중하게.


“……올리, 비아…….”

제이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가 퍽 절절했다. 마치 누군가 보면 저희가 제법 애틋한 사이라도 되는 줄 착각할 정도로.

콘라드 역시 제이드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 밑이 거뭇한 게 잠도 제대로 못 잔 듯한 얼굴. 하지만 이제 올리비아는 겨우 저런 것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대신 의심을 품었다.

저들이 왜 여기까지 와 제게 이러는 걸까?

황궁에서 에셀라를 간절히 원하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저를 회유하기 위해 저런 얼굴이라도 하는 걸까?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꽉 다문 입술이 조금 떨렸지만 그녀는 제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다들 말씀을 하시지 않으니 어떤 기운인지는 모르겠으나, 저희 비칸데르 성안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의문을 풀어드리는 건 이 정도로 충분할 듯싶어요. 그밖에,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올리비아는 여상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몇 초간 기다려도 공작은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는 성의도 없었다.

남이 그랬다면 몸이라도 굳은 걸까, 잠시라도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자수정 빛 눈동자가 조금 생경하기는 했지만 올리비아는 더 이상의 배려를 멈추기로 했다. 그녀의 기색을 읽은 콘라드가 황급히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무어라 말했다.


“그게, 올…….”

“괜찮습니다. 소공작님.”

순간 콘라드의 두 눈이 상처로 일렁였다. 불현듯 올리비아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물론 그때는 콘라드가 나서서 스스로를 소공작이라고 부르라 명했고, 올리비아가 상처받았었지만 말이다.

올리비아가 살포시 웃자, 콘라드의 두 뺨이 떨렸다. 아무래도 콘라드도 같은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자수정 빛 눈 위로 잔물결이 일었다.

믿기지 않게도, 콘라드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무슨 속셈일까. 그제야 올리비아는 다시금 찬찬히 마델레이네 공작을, 그의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

늘 완벽하게 다려진 옷을 입고, 냉담하게 사람을 내려다볼 줄만 알던 이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은 애절하게.


“할 말이 없다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제가 지금 더 할 말씀이 있는지 여쭤본 건 기어코 짜낸 제 호의니까요.”

그럴 리 없는데. 올리비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평소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박동이 불안함인지, 아버지의 날이 주는 해묵은 설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전에 공작님께서 권해 주신 마차에 대한 보답으로요.”

그래서 올리비아는 더 반듯하게 선을 그었다.

타인에게 빚을 지어 놓을 수는 없다. 지극히 귀족적이고 상식적인 말에 제이드가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풀이 꺾인 그 눈이 무서울 리 없었다.

다만 혼란과 미움이 교차하며 그녀를 어지럽혔다. 올리비아는 불쑥 말을 꺼냈다.


“엘킨 공작님께 들었어요. 공작님께서, 의도치 않게 약을 먹은 뒤 제 어머니와 하룻밤을 보내셨다고요.”

콘라드와 제이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처음 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표정도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놀란 얼굴이었다.

차라리. 올리비아는 마델레이네 공작도 저런 얼굴이길 바랐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며, 이제라도 화가 올바른 길로 향했으면 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야 할 마델레이네 공작은 더없이 침착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입맛이 썼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공작님은 알고 계셨군요.”

“……그럼. 약이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으니까.”

공작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날의 또렷한 기억은 평생의 한처럼 그를 옭아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지오반니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한순간 흐려졌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가 다시 한번 자신의 딸을 벼랑 끝으로 밀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다음에 이어진 올리비아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면 알고서도, 저를 미워하셨던 거군요.”

덤덤한 중얼거림에 공작은 순간 얼어붙었다. 저를 바라보는 초록색 눈 위로 짧은 헛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공작님을 음해했고, 때문에 공작님께서는 제가 생겨 명예롭지 못한 소문을 얻었고, 그리고 제가 정말 존경했던 분도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올리비아는 잠시 말을 삼켰다. 무심코 공작 부인을 언급했는데도 아무도 저를 보고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너무 이상해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진심을 뱉었다.


“저는 그때 겨우, 여섯 살이었어요.”

“…….”

“그리고 아직도 겨우, 스물이에요.”

아직도 겨우, 스물.

올리비아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바위처럼 지오반니의 마음에 얹혔다. 돌아오라는 말, 수없이 생각했던 모든 말들이 부질없이 짓이겨졌다. 한참 만에야 지오반니가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이런 거였다.


“……내가, 많이 밉겠구나.”

차마 할 수 없는 대답에 올리비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힘없이 내려간 공작의 어깨를 보고 다른 대답을 했다.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요.”

턱 하니 차오른 숨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그 숨이 제이드의 것인지, 콘라드의 것인지 올리비아는 애써 분간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작은 아닐 테니까.

대신 바람결에 실려 온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도 영지 내에서는 축제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깔깔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어른들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딱 제가 바랐던 아버지의 날이었다.

다 함께 아버지의 날 축제를 준비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한편에 끼어 노래를 부르고, 다정하게 닿는 온기를 느끼며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것.

이제 에드윈은 충분히 아버지의 날을 즐길 수 있었다. 저는 그 옆에서 함께 축제를 즐길 거고. 그러니 이 만남은 이제 그만 마쳐야 할 시간이었다.

올리비아는 옅게 웃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예요. 그럼, 부디 돌아가시는 길이 편안하시길.”

올리비아는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미련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여기까지가 제 최선이었다.


“올리비아! 잠깐만!”

“아직, 너한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애걸하듯 제이드와 콘라드가 번갈아 말했다. 올리비아에게 쏟아지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절절한 목소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여동생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걸음의 끝이 한참 떨어져 있는 마차라는 것을 알았을 때, 콘라드는 무작정 소리쳤다.


“네, 일기장을 보았어!”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일기라……. 지금 쓰고 있는 일기를 제외한 모든 일기를 저택에 두고 오긴 했다.

누군가 그걸 읽을 줄은 몰랐는데.

올리비아는 경멸 어린 눈으로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뜻을 알면서도 강직했던 콘라드는 올리비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 나는 그래서는 안 되었어. 진심이야. 너한테 그런 말을 했던 걸…….”

무슨 말을 해야 올리비아한테 가장 닿을까. 콘라드는 잠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초록색 눈을 보자 콘라드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후회해.”

후회라.

올리비아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콘라드의 말을 곱씹었다.

그가 말하는 ‘후회’가 도무지 와 닿지 않는 건, 지금 이 상황이 낯설어서일까, 아니면 저 말이 도통 믿기지 않아서일까.

올리비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간절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그녀를 쿵쿵 때리고 있었다. 후회한다는 말이 기꺼우면서도 동시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피곤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이들과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한 건, 다 아버지의 날 때문이었다. 할 말은 끝났다. 이제 완전히 볼 일은 없어졌고 자신은 비칸데르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올리비아.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 줘.”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불안을 예고하는 북소리처럼 올리비아의 심장이 뛰었다.

마차로 향하는 올리비아의 걸음이 빨라졌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제 숨소리가 크게 들렸고, 디안이 저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뒤에서 간절하게 외치는 소리 역시 점점 커졌다.


“너한테,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올리비아, 제발!”

순간 올리비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디안이 걱정 어린 얼굴로 저를 향해 달려오려다 멈칫했다. 어쩔 줄 모르는 황망한 얼굴의 그가 주변의 모든 기사들을 쫓아내듯 멀리 떨어뜨리는 게 느리게 보였다.

그러는 사이 올리비아는 숲속에 메아리치는 단어를 인지했다.

제발, 제발, 그리고 또 제발.

이 밤의 모든 소리가 이명처럼 번졌다. 이내 웃음이 차올랐다.

밤하늘을 찢듯 낭랑한 웃음이 들려왔다. 순간 제이드와 콘라드는 올리비아를 붙잡는 것도 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는 희게 웃고 있었다.


“하지 마세요.”

“……뭐?”

“그 말, 그렇게 가벼운 말이 아니에요.”

“……무슨 말이야, 그…….”

“제발.”

올리비아는 잇새로 내뱉듯 말했다. 더 이상 마델레이네를 향해 하고 싶지 않았던 말…….


“제발, 한 번만 저를 보호해 주세요. 연회 때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이제는 웃으면서도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귓가에 들리는 제 목소리가 낯설었다. 늘 속으로만 바랐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처음이라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온몸에 오물이 묻은 것 같았던 그때의 그녀의 심경과 달리 지금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건 올리비아가 아니었다.

가만히 선 채 제 아들들의 모습을 보던 마델레이네 공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각하지 못하는 새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올리비아의 얼굴 아래로 무언가 스치듯이 지나갔다. 순간의 절박함과 애써 웃는 얼굴.

그건……. 지오반니 마델레이네가 수십 번이나 외면했던, 과거의 올리비아였다.


“제발, 주스 한 번만 가져가 주세요. 정말 신경 많이 쓴 주스예요.”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지오반니는 눈을 꽉 감았다. 역류하듯 제가 무시하고 넘겼던 모든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건 올리비아가 떠난 후 그가 간혹 떠올렸던 찻물이나, 황궁에서의 잔상 따위와는 비견될 수도 없이 날카롭고 강렬했다.


“제발, 방 한편에 제 초상화도 걸어 주세요.”

부러운 듯 방 안을 흘끔거리다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던 아이부터…….


“제발, 저를 한 번만 봐 주세요.”

에셀라를 안아 줄 때마다 저만치 떨어져 있어 애써 웃던 소녀가.


“제발, 저를 인정해 주세요.”

어느 순간부터 태자와의 데이트를 보고하러 오던 아이가.


“제발, 제발, 제발, 아버지.”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건조했다. 꿰뚫린 기억의 편린들이 우수수 그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독하리만큼 웃고 있던 올리비아. 그 아이가 점차 웃음을 삼키기까지의 과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잔인한 모습들을 보면서 지오반니는 깨달았다. 이마저도 제 죄책감이 만들어 내는 환영이라는 것을.

지오반니는 결코 그 시절의 고통스러워하는 올리비아를 마주한 적이 없으니까.

그 사실을 자각했을 때에야, 지오반니는 숨 쉴 틈 없이 저들을 몰아붙이던 목소리가 끊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애가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번쩍 눈을 떴을 때, 올리비아의 끊어진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 주세요.”

저 아이 스스로 까발린 진심.

공작은 올리비아를 바라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제 올리비아의 눈은 완전히 저를 비껴가고 있었다.

지금 올리비아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영영 떠나갈 듯한 그 시선을 잡기 위해 공작은 황급히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올, 리비아.”

마치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낯선 감각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공작은 목 안쪽이 날카롭게 긁힌 듯한 통증을 느꼈다.

올리비아가 희게 웃었다.


“……제게는 그런 게 ‘제발’이었어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던 것.”

“…….”

“그러니 제게 제발을 바라지 마세요. 그건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 거거든요.”

나직한 중얼거림은 지독하게도 날것이었다. 그토록 꼭꼭 숨겨 왔던 감정이 드러나서인지, 올리비아의 눈가가 붉게 번져 갔다.


“참으려고 했는데, 왜 계속 저를 이렇게 몰아붙이세요?”

초록색 눈에 엷은 눈물이 서렸다. 동시에 공작은 숨을 쉴 수 없었다. 코끝을 스치는 건 눈물처럼 서러운, 올리비아한테서 나던 냄새였다.


“정말, 저는 정말이지. 공작님이 너무 미워요.”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짙고, 아픈 농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지만,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이는 대신 끝까지 공작을 응시했다.


“마델레이네 공작가가 너무 미워요.”

뾰족한 속내를 드러내는 건 이만하면 족하다는 듯, 올리비아가 뒤돌아섰다. 자박자박, 걸음이 멀어졌다.

그러는 사이 지오반니는, 올리비아가 우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랑찰랑, 넘칠 듯 차오르던 둑이 터져 버렸다. 동시에 켜켜이 쌓인 원망이, 미움이 마델레이네 공작을 휩쓸고 지나갔다.

원죄는,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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