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다시없을, 최고의 아버지의 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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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다시없을, 최고의 아버지의 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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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다시없을, 최고의 아버지의 날 (2)
2023.06.07.
어두운 방 안이 대낮처럼 환해졌던 것도 잠시.
흰 이불을 투과하듯 또렷하게 보이는 남자의 몸속 초록색의 빛무리들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제룬과 의원이 황급히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요하던 그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다급한 제룬과 의원의 목소리, 어렴풋하게 사라지는 빛들,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숨소리.
이 모든 것이 올리비아의 현실과 무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렸을 때, 불현듯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제 손을 붙잡은 에드윈의 손은 화들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에드…….”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부르던 말을 삼켰다. 제 손이 마치 유일한 구원인 것처럼 움켜잡은 손이 떨렸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시선은 오롯이 누워 있는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벼랑 끝으로 밀려난 듯한 얼굴을 보는 건 두 번째였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에드윈의 손을 잡아끌어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때 닿아야 했다. 진작 보여 줄 것을, 무엇을 그리 확신하기 위해 재고 따졌을까.
“아, 아버…….”
가빠진 호흡이 차마 끝을 맺지 못하고, 차가운 에드윈의 손이 남자의 손에 닿은 순간. 꺼져 가던 빛이 마치 깨진 보석 파편처럼 반짝였다.
저 파편이 무엇인지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디에 있었는지 몰랐던, 둘 중 나머지 하나인 마석 목걸이의 조각.
동시에 제룬의 말이 번뜩 떠올랐다.
“왕족은 특정 능력만 발화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사제님들은 능력의 한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타적인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소원만 빌 수 있는 거죠.”
신이 있다면, 로위나가 정말로 저 같은 초록 눈들을 사제로 이 땅에 보낸 게 맞는다면……!
올리비아는 황급히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끊어 내듯 잡아당겼다. 목덜미의 희미한 통증이 가시기 전에, 올리비아는 남자의 손과 에드윈의 손이 겹친 곳으로 마석을 가져갔다.
“에드윈, 이거 같이 잡아 줘요.”
차마 울지도 못하는 붉은 눈이 올리비아를 향하자, 그녀는 다시 한번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묘한 믿음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에드윈은 올리비아의 뜻대로 마석을 잡았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올리비아의 입술 새에서 나지막한 기도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마석을 겹쳐진 두 사람의 손 사이로 가져다 대는 동시에 말문이 막힐 정도로 정순하고 기묘한 힘이 폭발하듯 방 안 전체를 장악했다.
남자의 몸 안에 맴돌던 초록색의 기류들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배로, 발끝에서 다시 머리끝으로. 얼굴과 가슴 등 남자의 전신을 휘감은 빛은 순환하기 시작했다.
응축된 힘을 사용하듯, 마지막 빛을 내는 것처럼. 멈춘 기운을 뚫어 가기 시작하던 빛들이 느리지만 완벽하게 남자의 몸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빛무리들이 완벽하게 사라졌을 때.
다시 방 안에는 은색의 달빛이 쏟아졌다.
숨소리조차 커다랗게 들릴 정도로 적막해진 가운데, 올리비아는 황급히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거친 호흡이 안정되고 온기는 여전했다. 그리고 남자의 눈을 감은 붕대가 꿈틀거렸다. 마치 눈을 뜨려는 것처럼.
그것을 느낀 건 에드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숨을 삼킨 채, 에드윈은 떨리는 손으로 붕대를 내렸다.
아버지, 아버지였다.
백발에 속눈썹마저 하얗게 세었어도 오래전 출정식 때 아버지의 얼굴 그대로였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였고, 이내 숨 막히도록 에드윈과 닮은 붉은 눈이 드러났다.
“……비칸데르로, 가야 돼.”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에드윈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다 꺼질 듯 힘겨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 버지. 아, 버지. 아버지…….”
마치 처음 아버지라는 단어를 배운 것처럼, 에드윈은 연거푸 아버지를 불렀다. 그 한마디만큼은 들렸는지 남자가 가물가물한 눈을 뜨고 에드윈이 선 곳을 바라보았다.
“에, 드윈?”
“네, 저예요.”
기다렸던 대답이라는 듯, 남자의 눈매가 둥글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에드윈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안으로 생경한 감정이 차올랐다.
십일 년. 소리 내어서 울 수 없는 시간은 길었다. 에드윈 자신이 약하게 보이면 그 순간 비칸데르는 산산이 분해되어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이 기적 같은 일을 맞이한 순간에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드윈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코끝이 따갑고, 머릿속이 다시금 새하얗게 번질 때였다.
“……축하해요. 에드윈.”
제 등 뒤를 감싸는 온기에 에드윈은 몸을 바짝 굳혔다. 다정한 말이 귓전을 훑었다.
“최고의 아버지의 날이 되어, 정말 다행이에요.”
때마침 통유리 너머로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밤하늘 위를 수놓는 알록달록한 글씨.
그건 ‘최고의 아버지의 날’. 자정을 넘기고 아버지의 날이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폭죽이었다.
펑펑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에드윈은 그제야 이 모든 일들이 실제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의 날에 다시 아버지를 보길 바랐던 때도 있었는데……. 밀려오는 현실에 에드윈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십일 년 만에 잡은 아버지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마주 잡은 손은 따뜻했고, 제 등을 안아 주는 온기는 다정했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들. 돌아온 아버지와 언제나 있을 올리비아, 비칸데르의 동료들과 제가 쟁취한 모든 것들.
그 사실 앞에서 늘 강해야 했던 대공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는 아주 잠시 어렸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모든 것을 빼앗겨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던 처절함, 그리고 결국 다시금 되찾은 영광들.
둑이 터져 내린 듯, 입술 밖으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십일 년 만에, 죽었다고 공표된 선대 대공이 귀환했다.
* * *
희미한 빛이 안정되었을 때, 조심히 방 밖으로 나온 제룬과 의원은 이 믿기지 않는 사실에 한참이나 침묵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제룬은 제가 돌보았던 남자가 비칸데르의 선대 대공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의원은 죽었다고 공표되었던 선대 대공이 이렇게 가까이에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기쁨과 먹먹함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적막을 깨트린 건 다급히 달려온 기사 브록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던데……!”
브록은 난생처음 느껴 보는 기운에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아가씨가 나왔다.
“……두 분 다 나와 계셨네요. 드로윈 경도.”
아가씨는 이상할 정도로 초연했다. 운 티가 가득한 붉은 눈가를 보던 브록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필 바라본 곳이 닫히는 방문 안이었다. 브록은 다시 제 눈을 의심했다.
스치듯 지나갔지만, 침대 가에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묻고 있는 건 분명 대공 전하……. 브록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대공,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올리비아는 차례로 브록과 의원, 그리고 제룬을 바라보았다. 둘 다 먼저 나온 자신을 바라보며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운이라면 어떤 기운이 느껴진 건가요?”
“그게, 위험한 기운은 아니고. 오히려 좋은 기운 같은데, 갑자기 폭발적으로 감지된 기운이라…….”
브록이 더듬거렸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영지 경계를 강화하고, 기운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확인하세요.”
에드윈은 지금 오롯이 이 기쁨을 만끽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브록 경은, 베서니가 오기 전까지 아무도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이 앞을 지켜 주세요. 무슨 일이 있는지는, 전하께서 직접 공표하실 거예요.“
브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는 다시 제룬과 의원인 오닐을 바라보았다.
“제룬과 오닐은 저와 함께 축제 현장을 방문해 주시겠어요?”
브록이 느꼈다면 영지에서도 이 기운을 느낀 자들이 있을 거다. 기운에 가장 예민할 법한 이들은 초록 눈의 사람들이니 그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더불어 조금 전에 본 것에 대해 정리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듯 제룬과 의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브록이 다시 조심스레 말했다.
“저, 아가씨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머뭇대는 브록의 얼굴을 보며 올리비아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바로 파악했다.
“그때…… 세누아의 계곡에서는…….”
브록은 그때 아가씨를 구하려는 대공 전하를 막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내 찜찜하긴 했다. 적어도 기사라면……. 뒤늦은 아쉬움에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를 때였다.
“괜찮아요.”
아가씨는 브록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는 것처럼 한쪽 눈을 찡긋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 좁혀졌다. 아가씨는 바깥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아버지의 날이잖아요.”
아가씨가 뒤돌아섰을 때,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흰 목선에 언뜻 붉은 상처 한 줄이 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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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브록 외에는 마석의 기운을 느낀 이가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까 대공성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다급히 달려온 디안 말고 다른 기사들은 멀뚱한 얼굴이었다. 브록의 보고도 마찬가지였다.
“저 외에는 성에서 따로 기운을 느낀 이가 없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뛰어나기 때문에 미세한 기운 등은 남달리 잘 느끼는 편이라.”
가장 걱정했던 이는 엘킨 공작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계속 갇힌 방 안에서 화만 내고 있다고 했다.
초록 눈의 사람들은 대부분 느낀 듯했지만, 제룬이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고 하니 그런대로 잘 먹힌 모양이었다. 더불어 자신들을 검진해 준 의원까지 나서 괜찮다고 하니 사람들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축제의 분위기에 동화되었다.
“……기적을 발화하셨습니다. 사제님.”
함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룬이 사실을 일깨웠다.
기적이라면 기적일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윈에게 쥐여 준 마석을 떠올렸다.
선대 대공비는 언젠가 찾아올 이런 날을 기대하셨던 걸까. 그래서 이정표처럼 그 마석 목걸이를 남긴 걸까?
하지만 이내 올리비아는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되었든, 다행이었다. 에드윈에게 가장 기쁜 아버지의 날이 될 수 있어서.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몸의 힘이 쭉 빠져 왔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천막들에 새겨진 ‘아버지의 날’ 글자를 보며 올리비아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찬란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에드윈을 떠올렸다.
그때, 기사들 사이에서 무언가 동요가 느껴졌다. 무슨 일인지 보고를 받은 듯한 디안이 살짝 얼굴을 굳혔다. 올리비아가 바라보자 금세 웃으며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성문 밖에서 잠시 소란이 생긴 모양입니다.”
성문 밖.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올리비아는 물끄러미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마델레이네 경 정도면, 기운을 느꼈겠죠?”
디안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단순한 치기일까 오기일까.
아니면 해묵은 미움일까.
삼키려고 했는데, 자꾸만 올라오는 이 감정의 정체를 분간할 수 없어서, 올리비아는 나직이 말했다.
“내가 성문 쪽으로 직접 간다고 전해 줘요.”
* * *
그 시각 황궁. 올리비아로서는 꿈에도 모를 일 하나가 더 있었다.
“아버지의 날 축제를 맞아, 황제 폐하께서…….”
화려한 연회장. 매끄러운 태자의 연설이 끝나고 모두가 ‘위하여!’를 외치던 때였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성대한 만찬에 환하게 웃고 있던 레오포드의 얼굴이 굳는 것은 순간이었다.
동시에 하워드와 윈스터 등 몇몇 기사 역시 몸을 굳혔다. 본능적으로 그들은 서로가 느낀 이상함을 감지했다.
왁자지껄한 대화 속, 묘한 대치 상태를 깨트린 건 레오포드였다.
하지스 백작의 보고를 듣고 연회장을 나선 레오포드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를 갈듯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마법사가 말하길…….”
하지스 백작은 난처한 듯 한 번 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북쪽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 * *
비칸데르 성문 밖.
제이드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성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건 아버지도, 형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오신다 하셨습니다.”
디안 스젤린이 안내한 숲속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때였다. 마차가 다가오더니 그들의 앞에서 멈췄다. 이내 달빛 아래에서 올리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이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올리비아, 너 괜찮아? 성안에서 이상한 기운이 폭……!”
“가까이 오지는 마세요. 마델레이네 경.”
단호한 목소리가 선을 그었다. 제이드는 물론이고 콘라드와 마델레이네 공작까지 멈칫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 뒤에는 한마디가 더 이어졌다.
“괜찮아요. 디안.”
그 두 문장만으로도 가족과 가족이 아닌 자가 나뉘었다.
제이드는 막막하게 차오르는 절망감에 상처받은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초연한 초록 눈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족들을 마주했다.
“마델레이네 공작님을, 두 공자님을 뵙습니다.”
“…….”
“기운을 느끼셨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