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다시없을, 최고의 아버지의 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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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다시없을, 최고의 아버지의 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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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다시없을, 최고의 아버지의 날 (1)
2023.06.04.
달이 밤하늘 높이 뜬 늦은 밤이었다.
윈스터는 묵묵히 달빛이 비추는 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감이 죽으셨습니다. 칼터 경. 그러기에 진작 저를 부르시지.”
바로 옆에서 걷던 정보상 위르겐이 낄낄거렸다. 가슴을 탕탕 치며 자랑스레 말하는 것도 윈스터한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초록 눈이라고 하면 그 노인네들이 알아듣습니까? 그냥 무희라든가, 천것,”
“시끄러워, 위르겐.”
으르렁대는 음성 한 번에 위르겐이 목을 쑥 집어넣고 눈치를 봤다. 천성이 능글맞은 남자가 대놓고 화를 내는 일은 드문데……. 그러거나 말거나 윈스터는 노파의 말을 곱씹었다.
“진작 무희라고 이야기하지 그랬어! 알다마다, 아무리 이 에딩튼 거리라도 천한 무희가 온 건 제법 이야깃거리였는데.”
입이 썼다.
며칠이나 노파의 허드렛일을 도우면서도 못 들었던 이야기는 위르겐이 ‘천한 무희 이야기는 없소?’ 하며 나타났을 때 터져 나왔다.
“천한 것들 둘이 아주 죽고 못 살았지. 나이도 어린 게 효성이 아주 지극해서, 약값으로 인생을 저당 잡히면서도 제 할머니를 섬기더라니까.”
윈스터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단어가 노파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나왔다.
“진즉 무희로 나섰으면 그렇게까지 빚을 지지는 않았을 거야. 얼굴이야 예쁘장하니 제법 쓸 만했으니까. 그런데 그 할멈도 끔찍이 애를 아꼈어. 아주 귀한 일을 하는 아이라나 뭐라나. 노망이 든 거지.”
처음 보는 청년에게도 친절을 베풀었던 노파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눈앞의 노파는 낄낄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애가 어느 날부턴가 배가 부른 것 같았는데. 할멈이 죽고는 여자애만 홀랑 사라졌다지? 그 시신이 묘지 어딘가에 묻혔다고 내가 알고 있는데. 가만있자, 어디였더라…….”
에딩튼 거리 끝자락의 공동묘지. 그 누구도 관리하지 않는 듯 부서진 석판이며 이끼로 뒤덮인 무덤 속에서 윈스터는 겨우 발견했다.
“석판이 부서지지만 않았으면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독특한 애는 제 할머니를 이상하게 불렀거든. 최고, 최고, 뭐라고 했었는데.”
- 최고 사제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편히 쉬세요. 사랑을 담아. 니니안이.
“……그런데 최고 사제가 뭡, 읍……!”
윈스터는 날쌔게 위르겐의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은 대공저 벽 그림자에 숨어든 뒤 대공저 정문을 살폈다. 낯선 기사 몇 명이 대공저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마차 두 대가 그 앞에 대기 중이었다.
멍하니 걸어오는 틈에 이 수많은 기척들을 허투루 넘겼던 모양이다. 윈스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차의 문양은 태자궁의 것이었다. 대공저에는 올 일이 전혀 없는…….
그 순간 윈스터의 머릿속으로 번뜩 하워드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태자가 내게…… 친근하게 굴어.”
아무리 친근하게 군다 한들, 저렇게까지 마차를 보낼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얼마나 있다가 가려나. 하지만 수 분이 지나도 그들이 돌아가지 않자, 윈스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위르겐을 돌아보았다.
“자네를 대공저에 초대하는 건 다음에 해야겠어. 전하께는 꼭 위르겐 자네의 공을 말씀드리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차하면 저희 가게로 오시는 게…….”
눈치 빠른 위르겐은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이었다. 목소리를 낮추고 주변을 경계했다. 윈스터는 픽 웃었다.
“그럴 것 있나.”
“…….”
“아무리 제도라도, 여긴 대공저인데.”
하여튼 허세하고는. 투덜대면서도 위르겐은 한결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옹성 비칸데르 대공저.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위르겐 역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
.
.
대공저에는 제법 많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황궁에 보관된 대공저의 설계도에 그려진 수도관과 실제 설계된 수도관이 차이를 보인다는 거였다.
으차.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며 일어난 윈스터는 자연스레 복도로 나갔다.
쓰지도 않는 방에서 나오는 윈스터를 보고 놀라는 시종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놀랄 시간조차 없이 부산하다는 게 맞았다.
“기사님, 여기 계셨습니까? 예복은 준비되었습니다. 얼른 환복하십시오.”
“예복이라니?”
“왔어?”
마침 소벨이 윈스터 앞을 지나쳤다. 그가 심란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영문을 모르겠어서, 윈스터는 그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밖에는 뭐고……. 이 밤에 인터필드 경은 정말 태자궁으로 가는 거야?”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인데, 하워드는 멀끔한 예복 차림이었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선 하워드가 윈스터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황궁이야. 곧 아버지의 날 축제를 시작한다네. 너도 서둘러 준비해.”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아가씨께 가야 돼!”
이제야 겨우 아가씨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최고 사제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서 베서니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하지만 하워드의 얼굴은 진지했다.
“황궁에서 정식으로 윈스터 칼터한테 초대장이 왔어.”
“남작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난 귀족 작위도 없는…….”
콧방귀를 뀌던 윈스터의 안색이 굳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황궁에서 정식 귀족도 아닌 제가 제도에 왔는지 어떻게 파악하고 있단 말인가. 제도 성문 안으로 들어올 때도 저는 단지 ‘평민 윈스터 칼터’로 들어왔는데……!
“귀족 작위도 없는 네가 제도에 왔다는 것까지 태자가 주시하고 있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는 거지.”
언제부터……?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와중에 하워드가 물었다.
“뒤 밟힌 적 있어?”
“적어도 에딩튼에서는, 없어.”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여러 전장을 거치며 윈스터의 감은 놀랍도록 발달했다. 태자가 어디에서 저를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딩튼에서 들은 아가씨의 정보가 새었을 리는…… 위르겐!
윈스터는 황급히 협탁의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제가 알아낸 정보를 휘갈겨 적으며 다급히 물었다.
“전하께 전보는 쳤어? 아니, 그보다 위르겐한테 사람 좀 보내 줘. 에딩튼 거리의 노파한테도.”
하지만 윈스터의 요청은 둘 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공식적인 루트로는 말이다.
“대공저는 손님 접대가 엉망이군. 이렇게까지 오래 손님을 정문 밖에 세워 둘 줄은 몰랐는데.”
정문 앞은 물론이고, 어느새 대공저 담 너머 곳곳에 태자의 기사들이 가득했다.
줄지어 선 마차 앞에서, 하지스 백작은 냉랭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하워드 인터필드와 윈스터 칼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행하러 왔소. 남작. 그리고, 칼터 경.”
“……그토록 협상 자리를 마련해 달라 청했을 때는 바쁘시다 저를 피하셨으면서, 이제는 제법 시간이 마련되신 모양입니다. 백작님.”
하워드가 덤덤한 얼굴로 비꼬았다. 하지스 백작은 동요 한 점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어깨를 으쓱했다.
“없는 시간도 쪼개서 내야지. 아무리 남작이라도 지금은 엄연히 광물 세율을 두고 협상을 논하는 비칸데르령의 대표 아닌가. 태자 전하께서도 귀한 손님을 소중히 모시라 명했으니 내가 오는 게 맞지.”
“하나 칼터 경은 아쉽게도 초대에 응하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급히 찾으셔서 말이죠.”
“……그런가?”
하지스 백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대공저를 살폈다. 확실히 철옹성이라는 말답게 정문이 닫히면 육안으로 저택 겉조차 보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하워드 인터필드의 정보를 캐려다 우연찮게 윈스터 칼터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을 때, 행운의 기쁨은 배가 되었다.
“행운의 여신은 내 편인가 보네. 마침 힌트를 발견했을 때 내 리브를 제도로 돌아오게 할 도구가 둘씩이나 생기고.”
그건 태자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 에텔을 완전히 치워 버린 뒤, 원래의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되찾은 태자는 비스듬히 웃으며 백수정 광산의 비밀문서를 흔들었다.
“올리비아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라 말할지, 아니며 올리비아라 말할지. 다시 한번 황궁에 돌아와서 그 예쁜 입으로 종알거리는 걸 지켜보자고.”
비밀문서의 양도자 란에는 유려한 필체로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라고 적혀 있었다.
그제야 하지스 백작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백작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문서의 양도를 증명하려면…….”
“올리비아는 마델레이네 공녀로 존재해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자연히 아비인 마델레이네 공작의 뜻에 따라 공녀는 나와 혼인을 해야겠지. 뭐, 아니라면 그 광산 자체가 다시 황궁 소유로 돌아올 테니 대공이 마법에 지져져 타 죽겠군”
그때 태자의 웃음에는 지배자다운 잔혹함이 가득했다. 하지스 백작을 꼼짝 못 하게 하는 그 위엄으로, 태자는 명령했다.
“그러니, 내 체스 말들을 둘 다 궁으로 데려와.”
냉혹함이 번들거리는 바다 빛 눈동자를 떠올리며, 하지스 백작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참, 집사는 대공저 단속을 좀 해야겠어. 웬 비렁뱅이들이 감히 대공저의 담벼락을 서성이니 말이야.”
그 말에서야 적개심 가득한 윈스터 칼터가 잠시 멈칫했다.
하지스 백작이 씩 웃었다.
윈스터 칼터야 하도 빠른 놈이라 어디로 향하는지 번번이 놓쳤지만, 오늘 발견한 놈은 아니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입이 아주 무거운 놈.
“물론 걱정은 말게. 둘 중 한 명은 행방을 놓쳤지만, 한 명은 내 친히 잡아다가 황궁 치안대에 처넣었으니 말이야.”
“…….”
“어떤가. 대공저를 지키는 기사로서, 한번 그놈의 얼굴이라도 확인해야 하지 않겠나?”
은근한 권유의 끝에 윈스터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크메이트.
하지스 백작은 빙그레 웃으며 마차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를 데려올 체스 말 두 개가 오롯이 황궁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 * *
“로위나의 충실한 종, 제룬이 왕손 저하를 뵙습니다.”
늦은 밤, 대공성.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공손한 예법에 에드윈은 곱지 않은 눈으로 제룬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함께라 소네어 거리로 안 왔군요. 리브.”
“대신 디안이 같이 갔잖아요.”
올리비아가 멋쩍게 웃으며 혀를 빼꼼 내밀었다. 한 번 봐 달라는 애교에 에드윈은 피식 웃으며 올리비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스미는 향기, 가냘픈 어깨선, 따스한 온기. 그제야 제게 올리비아가 조금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몇 시간 전. 축제 준비가 한창이던 소네어 거리에 초록 눈의 사람들이 등장했을 때, 에드윈은 당연하게도 올리비아를 찾았다.
이 경계심 많은 사람들을 통솔하려면 당연히 올리비아가 있을 테니까.
“전하! 아직도 나와 계셨습니까?”
로웰의 사람들, 그 중심에 있는 자는 디안이었다. 마치 영웅처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에 마음을 놓았던 것도 잠시였다.
올리비아가 어디 있느냐는 말에 디안이 했던 말은 간단했다.
“아가씨께서는 손님과 함께 대공성으로 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올리비아를 찾아 대공성으로 온 참이었다. 그런 에드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리비아는 대수롭지 않게 그의 뒤를 따라오던 의원을 향해 말했다.
“오닐. 피곤하겠지만, 환자 한 명만 더 봐 줄 수 있어요?”
손님은 둘이었던 모양이었다.
“혹시 그 환자입니까? 계속 잠들어 있다던.”
하루 종일 로웰 사람들의 건강 상태를 검진하느라 피곤했던 의원의 눈이 반짝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쭉 잠든 채로 생명을 유지해 왔다는 환자의 이야기는 의원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윈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곧 자정이에요. 리브. 나와 함께 축제 구경 가기로 한 거 잊었어요?”
“축제는 내일부터잖아요.”
“전야제를 잊은 거예요? 폭죽도 터지고, 꽃가루도 날아다니고. 무엇보다 로웰의 사람들도 이주를 완료했잖아요. 책임감 강한 내 아가씨는 그들을 확인하는 게 우선일 텐데?”
농밀하게 낮아지는 목소리인 것치고 상당히 귀여운 조름이었다.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그러면, 진료만 보고 바로 갈까요?”
“초상화에 이어서 진료에까지 내가 밀리는 거예요?”
에드윈이 낙담한 척 부러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기며 도리어 에드윈을 졸랐다. 결국 마음이 움직인 듯 에드윈의 한쪽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같이, 진료만 보고 가요. 자정이 되려면 조금 남았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가요.”
피식 웃은 에드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이 난 올리비아가 에드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쪽이에요.”
아무리 데이트가 좋아도, 이왕 잠들어 있는 남자가 대공성에 온 지금으로서는 에드윈이 그 남자를 꼭 한번 보았으면 했다.
차라리 눈앞에서 아무런 감흥 없는 에드윈을 본다면 이상할 정도로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남자에 대한 괜한 미련을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못 이기는 척 걸어가던 에드윈은 올리비아가 가리키는 방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아침이면 가장 볕이 잘 쏟아지는 이 방. 공교롭게도 이 방은…….
순간 방의 문이 열렸다. 달빛만이 밀려오는 방 안을 바라보자 에드윈의 시야에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햇살이 쏟아지는 통유리창, 열린 틈으로 펄럭이던 얇은 커튼과 함께 저를 향해 돌아보던 다정한 음성.
“에드윈.”
그리고 올리비아가 이끄는 대로 침대 쪽으로 다가간 에드윈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분이세요.”
올리비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계속 누워 계셔서 들이치는 빛에 눈을 보호하기 위해 붕대만 감아 둔 거예요.”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남자.
그를 보는 순간 에드윈은 누군가 제 숨통을 조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눈앞에 마법이라도 걸렸거나.
“아…….”
하루 종일 축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듣고 본 단어였다. 차마 입 밖으로 내기에는 어딘가 애틋하고 목이 메는 그 단어.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숨이 헐떡여졌다. 무의식적으로 에드윈은 쥐고 있는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상함을 감지한 듯 올리비아가 에드윈을 바라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드윈. 에드윈? 괜찮아요?”
제 이름을 불러 주는 온기는 절대 떠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명제에 에드윈은 그제야 뜨거운 숨과 함께 믿기 힘든 사실을 마주했다.
“아, 버지…….”
올리비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누워 있는 남자의 몸에서 폭발하듯 초록색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