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 아무도 모를, 전야제 (131/151)


#131. 아무도 모를, 전야제
2023.05.31.



 


“정확히 짚자면 마델레이네 공작뿐 아니라 그의 뻣뻣한 첫째 아들과 학습 능력 없는 둘째 아들도 함께 도착했죠.”

 


“…….”

얄밉다.

올리비아의 침묵이 어떤 뜻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 친절하게 덧붙이는 에드윈은 아주 얄밉다가도.


“올리비아의 훌륭한 정보통은 엘킨 공작의 은둔 사유뿐 아니라 비칸데르령에 도착한 마델레이네 공작가 사람 수까지 총 두 개를 빠트렸군요.”

 
검지와 중지를 펼친 채 손을 흔드는 모습조차도 예쁘고.


“뭐, 아직 정보통을 하기에는 어리니까요. 친애하는 정보통한테 선물을 보낼 생각은 없어요? 마침 스톤 남작이 에메랄드와 자수정으로 만든 팔찌를 보내왔는데.”

 
또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한없이 예쁘다가도.


“참. 친애하는 정보통이 그녀의 언니와 생각이 비슷하다면 제 초상화를 선물로 보내는 것도 좋을 듯싶어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현숙한 한 아가씨께서는 초상화로나마 약혼자보다는 그의 가족한테 인사를 먼저 하는 미덕을 몸소 실천하셨거든요.”

 
뒤끝 길게 보일 때면 아주아주…….


“……얄미워.”

“……래서, 네?”

조식을 마친 뒤.

편지를 주러 왔던 디안이 잔뜩 놀란 얼굴로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에드윈이 미려한 동작으로 찻잔을 들고 있었다.

어젯밤 남은 앙금을 아침까지 끌고 온 것으로 모자라, 그의 행동을 곱씹느라 디안의 말까지 놓쳐 버리게 만들다니.

저답지 않은 행동에 변명도 하기 전, 에드윈이 먼저 말했다.


“너무하네요. 올리비아. 디안이 용기 내어 제일 먼저 고백하고 싶었다는데.”

“아닙니다! 이제야 렌즈를 빼는 모양새가 얄미울 수도 있죠. 아하하.”

“……네?”

무슨 상황인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디안은 한층 더 수그러든 말투로 덧붙였다.


“……초록 눈이 많아지니까 겁쟁이처럼 시류에 편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 같고…….”

렌즈를 뺀다니, 디안이? 제가 조금 전에 한 말은……!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올리비아가 소리쳤다.


“제가 말한 얄미운 이는 에드윈이거든요?”

“……나요?”

갑작스러운 봉변에 에드윈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비아는 디안을 향해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했다.


“세상에.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고작 에드윈이 얄밉다고 집중도 못 하고.”

“아, 닙니다. 아가씨. 제가 얄밉다고 하신 게 아니라면 저는 다 괜찮습니다.”

바짝 굳어 있던 디안이 그제야 과장해서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아가씨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으신데. 긴장한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나야 디안 눈 안 아플 테니 좋은데. ……괜찮겠어요? 디안?”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성 내의 사람들은 대부분 제가 렌즈를 끼는 것을 다 알고 있었고, 그리고…….”

디안은 잠시 겸연쩍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계곡 사람들도 이주가 낯설 텐데, 저라도 비슷한 눈 색깔이면 경계를 덜 것 같기도 하고.”

 


“저희 같은 사람들도, 내려가면…… 비칸데르령에서 같이 살 수 있을까요?”

 
어젯밤 들었던 계곡 사람들의 말을, 디안은 밤새 곱씹었다.

밖의 사람들과 섞여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막연한 희망들. 커다란 옷으로 얼굴을 가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문득 거울을 바라보았을 때.

디안은 씩씩하게 웃으며 아가씨의 초록 눈을 바라보았다. 신뢰 가득한 눈빛이 디안의 마음에 켜켜이 용기를 쌓아 주었다.


“저는 그러면 렌즈 빼고, 출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 선명하고 예쁜 초록 눈만큼이나 디안에게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괜찮은, 연두색 눈이 있었다.

.
.
.



“……어쩜 저렇게 기특하죠?”

“……누가 들으면 나이 차이깨나 나는 막냇동생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알겠어요.”

심통 가득한 말에도 올리비아의 시선은 문만 향했다. 언제까지 시선을 안 주려나, 에드윈이 못마땅한 얼굴로 올리비아의 손을 끌어당기려 할 때였다.


“나도 이만 가 봐야겠어요.”

마음이 급한 나머지 올리비아는 벌떡 일어났다.

할 일이 많았다. 어젯밤을 광산에서 보낸 베서니한테 샌드위치도 가져다주고, 세누아의 계곡 사람들을 비칸데르령으로 이주시키고.


“잠깐만요. 리브."

“네?”

올리비아가 뒤를 돌았을 때, 에드윈은 서운하다는 얼굴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졸지에 얄미운 남자가 되어 버린 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얄미운 남자로 오늘 하루를 보내는 거겠죠?”

한 박자 늦게 이어진 말에 에드윈의 눈매가 얄궂게 휘었다. 올리비아는 모른 척 어깨를 으쓱이며 속으로 탄식했다.

때를 맞추듯 창문을 투과한 아침 햇살이 에드윈을 찬란하게 비추지만 않았어도, 오늘 입은 붉은 셔츠가 저렇게 잘 어울리지만 않았어도. 하다못해, 머리만 저렇게 멋지게 넘기지 않았어도.

수십 가지의 핑계를 찾았지만 새침하던 올리비아의 눈이 다정하게 휘는 이유는 하나로 통했다.

눈치 빠른 남자는 올리비아의 눈매에 웃음이 고이는 것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요요하게 반짝이는 눈이 인장을 찍듯 올리비아의 모든 시선을 따라잡았다.


“조금 이상하네요. 지금 리브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마냥 얄미운 이를 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안 웃으려고 했는데. 귓전을 녹이듯 나긋한 목소리에 결국 올리비아는 항복하듯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래요. 예뻐요. 아주 얄밉고, 예쁘고. 혼자 다 하네요!”

“그럼요. 혼자 다 해야죠. 지금은 아버지의 초상화에도 밀리는 판국인데.”

“……몰랐는데 뒤끝이 엄청 기네요. 에드윈.”

“큰일이네요. 리브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서.”

진짜 큰일이라도 난 듯 에드윈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죠. 내가 하나하나 알려 줄게요. 그러니.”

“…….”

“얼른 계곡 사람들의 이주를 끝내고, 내일부터는 나와 축제를 즐겨요.”

담백한 데이트 신청이었다. 그제야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축제에 대한 기대인 줄 알았는지 에드윈이 슬쩍 올리비아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기대를 조금 더 심어 주자면, 제도에서 하는 아버지의 날 축제는 비교도 안 될 거예요.”

당연히 그럴 거였다.

올리비아는 제도에서 하는 아버지의 날 축제 때마다 늘 제 방에서 터지는 폭죽만 바라보았으니까.


“좋은데요?”

“그렇죠? 사실 저도 조금 기대돼요. 아버지의 날 축제는 거의 십 년 만에 하는 거니까…….”

말끝이 흐려졌다. 아차 한 듯 에드윈은 다시 천연덕스레 웃었지만, 올리비아는 보았다. 십 년 만에 한다는 아버지의 날 축제 이야기를 할 때 에드윈 얼굴에 스쳐 지나간 애틋함을.


“……전하께서 아버지의 날 축제가 있으면 아주 조금, 기운이 없어지실 때가 있어요.”

 
베서니의 말이 스치는 동시에 올리비아는 불현듯 세누아의 계곡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계곡에 같이, 갈래요?”

계속 잠들어 있었다는 그 남자를.

제안 하나를 건네는 것에 이렇게 초조해질 줄이야. 하지만 에드윈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축제 준비를 하고 있어야죠.”

성대하고 화려하게.

아. 맞네요. 올리비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에드윈이 올리비아의 손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편지는 누구예요?”

“맞다. 편지.”

그제야 올리비아는 제 손에 들린 편지를 자각했다.

에셀라일까, 아니면 윈스터? 누가 되었든 기대하는 마음으로 수신인을 확인하던 올리비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한테 왔기에 그래요?”

“……트리스탄 영지의 영주 대리인?”

자브론 남작.

사적으로는 하나 아는 것 없이 오로지 황녀의 명에 의해 트리스탄에 갔을 때 몇 번 대화만 했던 그가 제게 편지를 보내다니.

무슨 일이지?


“준비가 다 되었다는데. 출발할 시간이네요. 리브.”

하지만 궁금함도 잠시였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뒤로한 채 응접실을 나섰다.

* * *



“……세상에.”

오늘 베서니는 놀랄 일투성이였다.

고집스레 렌즈를 끼던 디안이 연두색 눈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십수 년 만에 새로이 열리는 ‘아버지의 날 축제’ 규모가 너무 커져서.

마지막으로는.


“……이 마석 목걸이가, 공명을 하네요. 정말.”

십수 년간, 베서니가 보관하고 있었던 마석 목걸이의 새로운 모습을 보아서.

홀린 듯 반짝이는 마석 목걸이를 보며 당황스럽기는 올리비아도 매한가지였다.


“광산에서도 공명하는 줄은 몰랐는데. 세누아의 계곡에서도 계속 공명을 했어요.”

“세누아의 계곡에서도요?”

베서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순식간에 베서니의 연하늘색 눈에 치열한 갈등이 오갔다.

세누아의 계곡에 가고 싶은 마음과 광산을 조사해야 한다는 마음.


“함께 갈래요. 베서니?”

잔뜩 고심하다가도 베서니는 고개를 저었다.


“거긴 좀 특수한 곳이지 않습니까. 그때도 제 마법이 통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차피 저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 도움 될 만한 다른 이가 가는 게…….”

베서니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올리비아가 떨어지던 때를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한 창백한 얼굴에 올리비아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알겠어요. 아무튼, 그러면 베서니도 오늘은 꼭 일찍 돌아와요. 내일은 축제잖아요.”

애석하게도 ‘축제’ 자체만으로는 ‘공명’에 심취한 베서니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인 듯싶었다.

디안은 베서니를 빨리 오게 하고 싶으셨던 거면, ‘공명’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서는 안 되었다고 불쑥 생각했지만 바깥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베서니를 호위하는 기사한테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귀가를 당부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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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벌써 다 떠날 준비가 된 거예요. 제룬?”

처음 계곡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주 준비로 바쁘겠다, 생각했는데.

간소한 짐 몇 개가 덩그러니 놓인 가운데 사람들은 이미 이주 준비를 마친 듯 서 있었다.


“짐은 더 안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마차도 엄청 많이 왔어요.”

올리비아의 말에 제룬은 빙그레 웃었다.


“여기도 남겨 두어야죠. ……누군가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

애정 어린 눈이 ‘집’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아. 그제야 올리비아는 제룬의 마음을 헤아렸다. 추억을 뒤로한 채 가는 이치고는 초연하다 싶었는데.

마음을 두고 가는 모습이 올리비아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짧은 추억을 눈에 담은 제룬이 부러 환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저희가 가는 곳에도 정말 로웰의 사람이 많다는 거지 않습니까?”

“그럼요. 오늘만 해도 저렇게 용기 낸 이도 있는걸요.”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으며 제룬의 시선을 쫓았다. 정확히는 술렁이는 화제의 중심에 선 디안을 향해 말이다.


“기사님도 눈이 연두색이야.”

디안의 선택은 옳았다. 어제만 해도 강한 경계를 보였던 사람들은 모두 디안의 곁에 바짝 붙었다.


“부단장님. 오늘따라 눈이 더 영롱하십니다?”

덕분에 툭툭 장난을 치는 기사들의 모습에 쉽사리 녹아들었고.


“저, 저도 영지로 가면 기사도 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선망 어린 눈으로 디안을 따라다녔다.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 게 멋쩍은지 디안은 머리 색만큼이나 얼굴이 빨개졌지만, 기사들을 통솔하는 내내 앞머리를 열심히 걷어 올렸다.

모든 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손에서 공명하듯 반짝이던 마석의 빛이 한 곳을 향하는 것이 보이기 전만 해도 말이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올리비아가 서둘러 달려가며 외쳤다.


“잠깐만!”

무언가를 옮기던 기사 둘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무엇을 옮기나, 살펴보던 올리비아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기사들에 의해 안전히 이동되는 이는, 모포에 몇 겹이나 둘러싸인 잠들어 있는 백발의 남자였다.


“아가씨. 무슨 이상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분은…….”

강렬한 태양 빛이 눈을 더 상하게 할까, 성심껏 눈가를 두른 붕대를 보며 올리비아는 계속 망설였다.

이 남자는 선대 대공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새까만 머리카락도 아니고, 가린 붕대 아래 눈 색도 확인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11년 전, 황제가 직접 사망을 선포했다는 선대 대공이 살아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분은, 대공성으로 모시죠.”

올리비아는 이 반짝이는 공명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단호한 결정에 기사들은 대공성으로 가는 마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올리비아가 가만히 목걸이의 마석을 들여다보았다. 마석 안에서 초록색 빛이 반짝거리며 터져 내렸다.


 
마치.


“폭죽 같네.”

축제를 선포하는 폭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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