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치유사 제룬의 응답받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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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치유사 제룬의 응답받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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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치유사 제룬의 응답받은 기도
2023.05.28.
“피하십시오! 성전이 불타고 있습니다!”
“세상에. 저자의 눈을 봤어? 초록색이라고! 천하디천한 게 여기가 어디라고!”
벌써 몇십 년 전 일이었지만, 제룬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상황이 훤히 보였다.
향락과 탐욕에 찌들어 무너진 제 나라 로웰과 한목숨 보전하기에 급급했던 자신 같은 사람들. 그리고 로웰을 자연스레 흡수한 제국 귀족들의 멸시.
늘 자랑이었던 제 눈동자 색이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간의 떠돌이 생활 후 겁에 질려 도망치듯 들어온 계곡.
아무도 살지 않는 이곳에서 제룬은 엉성한 솜씨나마 ‘집’을 지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일상을 찾기 위해 애썼다.
아침이 오면 마당을 쓸었고 때가 되면 식사를 했다. 습관처럼 기도를 하다 보면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아침이 왔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집’. 너무 외로워서 몸서리를 치다 보면 하루가 지나갔다.
제발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와 주길 바란다는 기도를 수없이 해 보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희망과 기대는 낡아 갔다. 기도도, 치유사로 신을 섬겼던 일도 모두 다 잊어 가던 때였다.
“계, 계세요?”
“누구……. 제, 냐?”
처음으로 이 ‘집’을 방문한 이는 함께 성전에 있었던 하급 치유사였다. 임신을 해 잔뜩 겁에 질렸던 그녀는 긴장이 풀린 듯 제룬을 잡고 펑펑 울었다.
그때부터 제룬은 로위나를 향해 다시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 제냐는 자신이 낳은 아이와 함께 ‘집’을 떠났다. 하지만 제룬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여자를 시작으로, 종종 로웰의 자손들이 ‘집’을 찾아왔으니까 말이다.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아침이 오면 마당을 쓸었고, ‘집’의 사람들과 식사를 했다. 틈틈이 기도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깨어나지 않는 이를 위해 빌었다. 그러다 보면 밤이 찾아왔다.
집을 울리는 소리가 여럿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룬의 마음에는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 벅찬 위안에도 제룬은 끊임없이 ‘집’을 거쳐 간 이들을 떠올렸다.
제룬은 자신의 안온한 터전 밖이 두려웠다. 무섭게 쏟아지던 돌덩이가, 비수처럼 날카로운 시선과 말들 전부가.
그래서 더욱 ‘집’을 거쳐 간 이들을 생각했다. 환하게 웃던 그들은 이 터전 바깥에서도 잘 지내고 있을까. 바깥에서도 그들이 환하게 웃었으면 했다.
“저 왔어요. 제룬.”
그래서 기적처럼 사제님이 나타났다 돌아간 어제, 제룬은 막연하게 새로운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 차 한잔 마시기로 약속했잖아요.”
저 환한 웃음의 사제님만큼이나 바깥으로 나간 이들이 행복하게 웃고 있기를.
그 헛된 기적이 이루어진다면…… 그다음에는…….
“더불어, 제가 깜짝 손님을 한 분 데려왔는데…….”
“할아버지! 치유사 할아버지!”
약속대로 디저트를 다섯 바구니나 들고 온 사제님이 빙그레 웃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깜짝 놀래 주려던 듯 숨어 있던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제룬을 향해 달려들었다.
엉겁결에 아이를 안아 든 제룬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벤, 너 벤이니?”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틀림없었다. 환하게 웃는 말간 연두색 눈의 이 아이는, 이 ‘집’을 거쳐 바깥으로 나갔던 벤이었다.
왈칵 치미는 반가움과 감격,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제룬은 아이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손이 제룬을 안아 주는 그 순간.
그는 제 기도가 늘 응답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룬의 주름진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벤을, 다시 볼 줄 몰라서.”
아이들은 금세 서로를 알아본 듯 잔디 위에서 뛰어놀았다. 한적한 호수 앞, 아이들을 바라보는 제룬은 민망한 듯 조금 웃었다. 하지만 아직도 벅찬 듯 붉은 눈시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었다.
“벤의 어머니도 기억하시나요? 오늘 함께 오고 싶어 했는데 일을 나가는 날이라 안부만 전해 달라 하더라고요. 다음에 꼭 온다고요.”
“일을, 한단 말입니까……?”
“네. 그것도 여러 사람이 다니는 여관에서요.”
툭툭 끊어지는 제룬의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강조하듯 말했다. 올리비아의 말을 곱씹듯 가만히 아이들을 바라보던 제룬은 한참 만에야 깊은숨을 토해 냈다.
“……세상에. 어디로 가든 잘살기만을 기도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잘살고 있었군요.”
어딘가 묘한 말이었다. 꼭 제룬은 벤이 비칸데르에 있는 것을 몰랐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벤의 말로는, 제룬이 비칸데르령으로 가는 것을 추천했다고 하던데.”
올리비아의 말에 제룬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가요?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벤!”
제룬의 부름에 놀고 있던 벤과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내가 너한테 비칸데르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니?”
“치유사 할아버지 말고요.”
벤이 거침없이 고개를 저으며 어느 곳을 가리켰다.
“흰머리 할아버지요!”
‘집’. 정확하게는 한 번도 깨어난 적이 없다는, 흰색 머리카락 남자의 방이었다
“그럴 리가. 저분은 계속 잠들어 계시잖니.”
그럴 리 없다는 제룬의 말에 고개를 저은 건 벤이 아닌 다른 아이였다.
“아닌데, 저도 지난번에 흰 머리 할아버지가 비칸데르, 라고 말하는 거 들었어요.”
티비였다.
진지한 아이들의 얼굴을 보던 제룬은 벌떡 일어나 ‘집’으로 달려갔다.
올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두근댔다.
.
.
.
“……차도는 따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참이나 남자를 짚어 본 다음에서야 제룬은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그가 모르는 사이 남자의 상태가 호전되었을까 기대했던 마음이 꺼졌다.
“그래도 십일 년이나 이렇게 생명을 유지해 온 걸 보면 분명히 살 사람인 듯싶었는데.”
“십, 일 년이요?”
남자의 상태를 듣고 함께 실망했던 올리비아는 제룬의 말을 따라 했다. 십일 년……. 공교롭게도 선대 비칸데르 대공이 사망했다는 시기와 맞물렸다.
“예. 십일 년 전입니다. 갑자기 이상한 파장이 느껴져서 황급히 나갔더니 이이가 호수 옆에 쓰러져 있었지 뭡니까.”
“…….”
“제가 치유사이긴 하지만 그때만큼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간절함을 느낀 적도 없었습니다. 기도로 치유의 힘을 넣긴 했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깨어나지는 못했지요.”
“…….”
“이번에야말로 깨어나실 줄 알았는데.”
“저, 제룬.”
“네. 사제님.”
큼큼, 아쉬움에 가라앉은 목소리를 높이며 제룬이 대답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사제님은 잠시간 제룬을 바라보았다.
초록 눈을 스치고 지나간 절박함에 제룬은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저분은 처음부터 흰머리셨나요? 혹시 검은 머리카락이라든가, 눈이 붉다거나 하지는 않았고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십일 년간의 시간 동안 머리카락이 희게 셌을 수도 있으니까.
올리비아는 제 가정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룬의 대답을 기다렸다. 입술이 말랐고 숄 자락을 그러쥔 손바닥에 땀이 찼다.
묘하게 간절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제룬은 신중한 얼굴로 말을 골랐다.
“눈은 심하게 다쳐 꺼풀조차 들어 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머리 색은 처음 올 때부터, 그러니까 십일 년 전부터 흰색이 맞았습니다.”
* * *
세누아의 계곡을 빠져나온 뒤, 마차는 느리게 성벽 쪽을 향해 달렸다. 백수정 광산을 보고 들어가겠다는 올리비아의 명 때문이었다.
올리비아는 어둑한 바깥을 보며 아까 제룬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화를 들으셨다니. 거기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다. 로웰 왕국의 초대 왕은 로위나의 선택을 받았다는 징표로 천사와 같은 초록 눈이 되었다죠.”
“…….”
“신화 속에 나오는 천사 역할을 제가 있던 성전에서는 사제님들이 하셨습니다. 이성적인 왕과 온건함을 베풀며 왕 옆을 지키는 사제님이 계셨지요. 사제님들을 비롯한 저희 하급 치유사까지는 모두 눈동자 색으로 발탁했었습니다.”
올리비아는 희게 웃으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언뜻 제 모습이 비칠 때마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제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 색이 선명한 초록색일수록 고위 사제의 자질을 타고났다니. 문득 노래로 염원을 발화할 수 있다는 제룬의 말이 떠올랐다.
“왕족은 특정 능력만 발화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사제님들은 능력의 한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타적인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소원만 빌 수 있는 거죠.”
“…….”
“……하지만 나라가 점차 향락에 기울자 사제를 뽑아 보필해야 할 귀족 가문들은 그러지 않았고, 결국 제가 모시던 사제님은 사제직을 물려줄 아이를 찾지 못한 채 열쇠라 불리던 그 마석 목걸이를 왕가에 빼앗기셨습니다.”
“이 목걸이요?”
“네. 제가 알기로 지금 사제님께서 하신 목걸이는 왕가에 하나, 그리고 사제님들께 하나, 이렇게 두 개였습니다.”
그러면 다른 하나는 어디에 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은 너무 많았다.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 올리비아는 잠시 걷겠다고 마차에서 내렸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출입하실 수 없으십니다.”
멀리서 실랑이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비아의 시야에 철옹성 같은 성문이 한눈에 보였다.
“무슨 일이지. 불청객이라도 온…….”
제 옆을 호위하던 디안이 잠시 멈칫하며 말을 멈추었을 때, 올리비아는 숨을 참았다.
사위가 어두웠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성문 앞에 선 것은마델레이네 공작가의 문양이 박힌 마차. 그리고,
“아…….”
올리비아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마델레이네 공작. 제국의 단 두 명뿐인 공작 중 한 명인 그가, 불청객 취급을 받으면서도 성문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순식간에 머릿속이 엉켜 버렸다. 올리비아는 황급히 돌아섰다.
“돌아가죠. 디안. 시간이 너무 늦,”
“올, 리비아?”
희미한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몸이 굳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저렇게 저를 다정히 부를 리가 없는 사람인데.
“……었네요.”
한 번 제대로 된 판단을 하니 어려울 게 없었다. 올리비아는 저를 걱정하듯 바라보는 디안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주문을 외듯 말했다.
공작은 오지 않은 거다. 조금 전에 본 것은 제 허상일지도 모른다.
* * *
“재밌는 소식 하나, 흥미로운 소식 셋, 그리고 물어볼 거 하나. 어떤 거부터 듣고 싶어요?”
저녁 식사 후의 응접실.
카드의 턴을 포기한 올리비아가 대뜸 말을 꺼냈을 때, 에드윈은 눈을 반짝이며 함께 카드를 엎고 물었다.
“순서대로 듣고 싶은데. 재밌는 소식은 뭐예요?”
“에드윈의 말대로 되었어요. 제룬이 세누아의 계곡을 떠나 비칸데르로 오고 싶대요.”
오호. 에드윈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남은 사람들은요?”
“다 같이요.”
“재밌는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이네요. 흥미로운 소식은요?”
“제도의 소식이에요. 황녀 전하의 칩거, 에텔 후작 영애의 결혼, 그리고 엘킨 공작님의 은둔이 파다하게 퍼졌대요.”
에드윈은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알고 있었어요?”
“대강은요. 엘킨 공작의 은둔 사유가 에텔 후작을 저지하지 못한 죄책감이라고 퍼진 것까지만요.”
“제 정보통이 하나를 빠트렸군요. 하지만 정말 소문은 믿을 만한 게 아니네요. 친히 자의로 비칸데르까지 방문하신 분이 은둔이라니.”
올리비아는 천연덕스레 말했다. 긴장감에 목소리 끝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 눈치 빠른 남자는, 마지막 말이 본론이라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제 하나 남았네요. 물어볼 거 하나는 뭐죠?”
진지하게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올리비아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천천히 질문을 던졌다.
“……마델레이네 공작님이 비칸데르령에 도착했다고 들었는데.”
“…….”
“……아니죠?”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는 올리비아의 속내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에드윈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그녀에게 사실로 자리할 거였다.
에드윈이 올리비아 몰래 다시 마델레이네 공작을 돌려보내든, 지친 공작이 알아서 돌아가든. 그녀가 보고 들은 건 모두 다 허상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에드윈은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착했다고 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