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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에드윈은 올리비아를 말릴 수 없다 (129/151)


#129. 에드윈은 올리비아를 말릴 수 없다
2023.05.24.



 
디안을 포함한 호위 기사 다섯 명과 제룬한테 약속한 디저트 다섯 바구니.

준비는 완벽했다.

……베서니 자신이 동행하지 못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시녀 아이 한 명이라도 데려가시면 좋을 텐데. 아니, 광산에서 특이 사항만 없었어도 제가 함께 가는 건데 말이에요.”

베서니는 심란한 마음을 누르지 못한 채 말했다. 오늘 아가씨의 일정은 예니브 거리를 들렀다 세누아의 계곡까지 다녀오는 대장정이었다.


“광산도 중요하잖아요. 다음에 같이 가요.”

“그러면 좋지만……. 오늘 다녀오신 뒤로도 또 계곡에 갈 수 있겠죠? 전 정말이지 그곳엘 다시 가신다는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이고 깜짝이야. 어느새 슬그머니 두 사람의 곁에 선 디안이 목소리를 낮춘 채 맞장구쳤다.


“어제 복귀 때 기억 안 나십니까? 세누아의 ‘세’자만 꺼내도 분위기 싸해지던 거.”

“그때뿐만이 아니야. 저녁 드시고 응접실에 계실 때, 나는 정말 두 분이 다투시는 줄 알았다니까?”

“그럼 지금 안 나오시는 게, 헙.”

무심코 말하던 디안이 제 입을 틀어막으며 올리비아의 눈치를 보았다. 내심 마음속에 걸리던 부분을 찔린 느낌에 올리비아가 잠시 시무룩해지던 찰나였다.


“그건 단순한 의견 조율이었어. 베서니.”

평소와 다름없는 에드윈의 목소리에 환하게 웃던 올리비아가 잠시 멈칫했다. 브록과 함께 오는 에드윈은 외출복 차림이 아니었다.


“잘 다녀와요. 리브.”

확인 사살이었다. 함께 가는 것은 고민해 본다더니, 결국 같이 가지는 않기로 결정했구나.

흐려진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는지 에드윈이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리브가 다녀오는 동안, 나 역시 내 일을 하고 있을게요. 아주, 잘, 열심히.”

옆에 있는 이들이 듣는다면 평범하고 무난한 인사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비아한테는 달랐다.

함께 가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싹 사라졌다. 에드윈은 짐짓 으스대듯 덧붙였다.


“뭐, 정 가는 길 내내 내가 보고 싶을 것 같거든 지금이라도 말해요.”

그의 말에 올리비아는 대답 대신 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보였다. 오늘 아침 식사 때 제도의 에셀라에게서 온 편지였다. 졌다는 듯 에드윈이 마주 웃었다.

모든 게 다 잘될 것만 같다는 긍정 속에서 올리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이내 마차가 출발했다. 에드윈은 마차가 점처럼 멀어지는 순간까지 소중히 눈에 담았다. 함께 배웅을 하던 브록이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정말 괜찮으실까요? 어제도 갑자기 떨어지셨, 아, 왜 그러십니까?”

베서니가 황급히 브록을 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치 없는 얼굴에 베서니가 마음을 졸였다.

안 그래도 탐탁지 않은 얼굴이신데. 설마 출발한 마차를 다시 붙잡지는 않겠지, 하며 대공의 반응을 기다릴 때였다.


“……그래도. 어떻게 말리겠어. 내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은 베서니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정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눈이 휘둥그레진 베서니의 반응은 아랑곳 않은 채 에드윈은 느리게 웃었다.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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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세누아의 계곡에 가겠다는 올리비아의 선언이 있고 나서.

세누아의 계곡에 다시 방문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올리비아의 에드윈의 의견 차는 평행선을 달렸다.


“……제룬이라고 했죠? 그자를 대공성으로 데려올게요. 그러면 올리비아가 계곡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 속에서 먼저 타협을 제시한 건 에드윈이었다.

힌트를 쥐고 있는 것은 치료사라는 그자였으니 제룬만 오면 올리비아가 다시 계곡으로 갈 이유는 완전히 없어지는 셈이었다.

에드윈은 다시 올리비아가 계곡에 가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눈앞에서 올리비아가 떨어지던 찰나 느꼈던 공포. 피가 얼어붙는 듯한 끔찍한 기억, 그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경험이었다

그 결정에 제룬의 마음이나, 계곡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에드윈은 올리비아가 그걸 알아채 주길 바랐다. 이 적당한 타협 속에서 부디 고집을 꺾고 안전하길 바랐다.


“에드윈, 저는 에드윈이 저를 걱정하는 게 좋아요. 걱정은 애정이랑 비례하거든요.”

하지만 올리비아가 끈질기게 에드윈과 시선을 맞추며 웃었을 때, 에드윈은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렇지만 에드윈이 저한테 줄 수 있는 건 애정과 걱정뿐만이 아니잖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용기도 줬잖아요.”

저는 이미 태자비 궁에서 제 아가씨의 승리를 바랐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그 믿음을 매번 이루어 줬다.


“그러니까, 용기를 준 만큼 저를 더 믿어 줘요.”

“…….”

“똑같은 위험에 두 번 빠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건 약속할 수 있어요.”

그러니 이번에도 이기는 건, 올리비아일 것이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에드윈은 나직한 숨을 뱉었다. 배포가 남다른 제 아가씨는 본능적으로 승리를 알아챈 듯 그의 손을 잡았다.


“에드윈이 비칸데르 대공으로서 비칸데르를 지켜 온 것처럼, 저도 제가 시작한 일을 완수하고 싶어요.”

어느새 차가웠던 에드윈의 손에 올리비아의 온기가 전달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올리비아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눈을 깜박이다 못을 박았다.


“어떻게 완수할 거냐고 묻는다면 아주, 잘, 열심히, 요.”

졌다. 아주 완벽히.

‘아주, 잘, 열심히’ 하겠다는 진지한 맹세에 에드윈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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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가 완전히 정원 사이로 사라졌다. 다정한 웃음이 가신 얼굴 위에 대공다운 위엄이 서렸다.

올리비아한테 말한 대로, 저 역시 다시 제 일을 할 시간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브록은 기다렸다는 듯 보고를 시작했다.

아직 광물 세액 협상에 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과 지난주 스톤 남작으로부터 받은 광산 채굴량에 대한 내용, 제도에 떠도는 이야기들까지.


“황녀는 칩거 중이며, 에텔 후작 영애는 오슬란 왕국으로 가 혼인을 마쳤습니다. 엘킨 공작은 은둔하고 있다고 소문이 퍼졌으며, 황후가 은밀히 엘킨 공작을 찾고 있으나 아직 비칸데르령으로 사람을 보내는 낌새는 없습니다.”

“…….”

“그리고 트리스탄에서 밀을 반출한 이후, 황궁에서 연일 성대한 연회를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칩거한 황녀를 대신해서 태자가 무리를 주도하고 있으며, 명분은…….”

막힘없이 보고 사항을 읊던 브록은 잠시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의 날’에 대한 축하연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날이 다가올 때, 대공 전하가 묘하게 가라앉는다는 건 아는 이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간은 전쟁터를 도느라 따로 ‘아버지의 날’을 챙길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브록의 예상과 달리 에드윈은 느슨하게 웃었다.


“재밌네. 황제가 아버지가 된 지 21년째인데.”

허울뿐인 명분 아래, 황궁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야욕이 가득했다.

광물 세율에 대한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 세금은 없다. 비칸데르가 전한 뜻이 제법 위협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무엇이 되든 비칸데르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에드윈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집무실의 문을 닫은 브록의 눈이 단단해졌다.


“경계 확인 작전을 위한 병력 완비되었으며, 이번 해 가을 광물 채굴이 끝나는 시점과 동시에 전원 어느 상황에든 출정 가능하게끔 태세를 갖췄습니다.”

맹렬한 적의가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에 에드윈은 시리게 웃었다.

준비 완료.

황제가 걱정해야 할 것은 고작 광물 세율 따위가 아닐 텐데. 어리석게도 그들은 한 치 앞만 보고 있었다.

공국으로의 독립이 머지않았다. 태자가 세율 협상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 * *

그 시각, 올리비아도 에드윈이 받은 보고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 언니, 잘 지내고 있나요? 어느덧 황금빛 가을이 오고 있어요. 비칸데르령은 춥다는데 언니는 어떨지 염려와 무탈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보내요.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격식을 갖춘 서두와 달리 다음 문단에는 뾰로통한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 저는 요즘 거의 모든 티 파티에 참석하고 있어요. 모두 제게 성녀인 언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안달을 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언니가 성녀인 줄도 몰랐는걸요.

- 제가 언니의 이야기를 모르는 것과 별개로, 언니한테는 제도의 상황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정보가 한쪽으로만 기우는 건 정말 공평치 않으니까요.

 
공평이라는 훌륭한 명분을 앞세우다니.

마냥 어리게만 느껴졌던 동생의 귀족적인 어법이 생경하고 기꺼웠다.

꾹꾹 눌러쓴 정보들은 생각보다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티 파티에서나 나올 법한 연애, 보석, 드레스 이야기를 읽어 내리던 올리비아의 시선이 멈춘 건 다음 대목에서였다.


- 언니의 소식이 신문에 난 뒤, 황녀 전하는 계속해서 칩거 중이세요. 그리고 마리아 에텔은 제도를 떠나 결혼을 했답니다. 상대는 오슬란 왕국의 중간 귀족이라고 들었어요. 아무도 그 결혼식에 가지 않았으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요.

 
황녀의 칩거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마리아 에텔이 결혼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언젠가는 마리아 에텔이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제 노력으로 태자를 바꿀 수 있다고 착각했을 때, 그 상상 속에서 마리아 에텔은 아주 먼 곳으로 떠나 결혼을 했었다.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게 말이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이제 더 이상 마리아 에텔이 상관없는 지금에서야.

우스운 일이었다. 기쁜 일인 것도 같았다.

올리비아는 이 후련함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편지의 다음 내용을 읽어 나갔다.


- 빨리 언니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어요. 그럼 이만 줄일게요.

 
편지의 말미, 쓸까 말까를 고민한 듯 펜촉 자국이 선연히 남은 자리에 적힌 건.


- ……혹시, 만나셨을까요?

 


“엘킨 공작이 비칸데르령에 들어온 김에 솔직히 이야기할게요. 마델레이네 공작과 소공자, 그리고 제이드 마델레이네 경까지 지금 비칸데르령으로 오고 있어요. 어차피 출입 금지 명령을 내려 둔 터라 리브 모르게 돌려보내고 싶었는데”

 
에드윈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올리비아는 멍하니 편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노크와 함께 들리는 디안의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 도착했는지, 멈춰 있는 마차 밖은 이미 예니브 거리의 초입이었다.

공사를 하는 인부를 제외하고는 한적할 거라 예상했는데, 바깥은 어린아이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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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매일매일 여기까지 뛰어와서 보고 가요. 얼마큼 지어졌나요!”

“저도요! 빨리 우리 집이 지어졌으면 좋겠어요! 판잣집이 아니라 진짜 집이잖아요.”

아이들은 올리비아를 에워싼 뒤 자신들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를 앞다퉈 말했다. 대화의 흐름은 올리비아가 미처 따라잡기도 전에 휙휙 변했다.


“나 옛날에 살던 집은 진짜 집이었는데. 지붕도 있었고.”

“나도! 나도 집에 살았었는데, 거기도 정말 좋았어.”

“바보야. 사는 곳은 다 집이잖아!”

“아니야! 거기 이름 자체가 집이었어! 할아버지가 집이라고 했단 말이야!”

순간 올리비아는 새된 고함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 법한 남자아이는 억울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얘야, ‘집’에 대해서 알아?”

‘집’을 나가 다른 곳으로 간 아이들이 더러 있다고 들었을 때부터, 누군가는 ‘집’을 거쳐 예니브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하긴 했다.

올리비아가 애써 기대를 누르는 사이, 아이는 올리비아의 관심이 반가운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얼마 전에 엄마랑 집에서 왔어요! 할아버지가 비칸데르가 살기 좋다고 해서요!”

할아버지라니. 제룬이 비칸데르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걸까? 올리비아가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에 아이, 벤은 다리를 달랑이며 순진하게 물었다.


“혹시 아가씨 할아버지 만나러 가시면 저도 같이 가도 돼요?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 * *



“아가씨의 아버지세요?”

그 시각, 비칸데르령의 성벽 바깥.

마차에 타려던 지오반니 마델레이네 공작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작은 여자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오반니를 올려다보며 종알거렸다.


“아가씨랑 머리카락 색깔이 똑같아요.”

비칸데르령 앞에 도착한 지 만 하루. 처음으로 적의 없이 다가온 말이었다. 동시에 해묵은 기억 하나를 수면 위로 끌어당기는 촉발제이기도 했다.


“아버지세요?”

 

 
허름한 검은 옷을 입었던 어린 올리비아, 그 아이가 처음 저를 올려다보던 순간.

지오반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기대감 차오르던 눈이 무감한 눈으로 변해 가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언제부턴가 차곡차곡 쌓이던 감정들이 단단한 둑을 툭툭, 밀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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