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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선대 대공 부부의 초상화 (2) (128/151)


#128. 선대 대공 부부의 초상화 (2)
2023.05.21.


통창을 흠뻑 적시는 흰 달빛이 들어오는 곳. 그곳이 바로 베서니의 침실에 달린 응접실. 정확히는 선대 대공비의 초상화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베서니가 휘장을 걷는 동시에 올리비아는 숨을 삼켰다.


“선대 대공비 역시 초록 눈이라 했으니 그대가 받는 사랑은 선대 대공비의 대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왜 몰라!”

 
태자는 틀렸다. 제가 선대 대공비 전하와 닮은 건 오로지 눈 색깔뿐이었다.

황금을 녹여 빚은 듯한 찬란한 금발과 신비롭고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 호흡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드리워진 환한 웃음, 그리고 초상화만으로도 전달되는 위엄과 기품까지.

선대 대공비를 쏙 빼닮은 건 정말이지.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선대 대공비를 계승한 유일한 로웰의 핏줄. 그뿐이었다.


“……내 어머니세요.”

에드윈은 흰 달빛만큼이나 투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주 아름답고 강하고, 장난기 많은 분이셨죠.”

“에드윈은 정말 어머니를 많이 닮았군요.”

에드윈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아주 쏙 빼닮았죠. 어머니가 때때로 나를 유심히 보며 아버지와 닮은 구석을 찾아볼 정도로.”

올리비아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작은 의문을 확인할 시간. 그래서 심장이 콩콩 뛰는 것과 달리 태연하게 웃었다.


“궁금하네요. 저도 보고 싶은데.”

“그게, 선대 전하의 초상화는…….”

“아쉽게도 없어요.”

머뭇거리던 베서니 뒤로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 초상화는. 그때 다 태워 버렸어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에드윈을 보며, 올리비아는 제 혀끝을 깨물었다.

패배한 전쟁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총사령관의 잃어버린 명예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가문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올리비아가 책으로만 배웠던 것을 에드윈은 직접 겪었다. 초상화뿐 아니라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태웠을 거였다.

그의 상처를 미처 배려하지 못한 미안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조심스러움.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간 얼굴에 드러나는 속내에 에드윈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눈매를 휘며 올리비아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올리비아의 손가락에 낀 두 개의 보석 반지의 차가운 느낌이 소름 끼치게 만족스럽고, 열 손가락 가득 끼우지 않았다는 게…….


“……서운하네요. 리브.”

“네?”

올리비아가 화들짝 놀라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고심하던 초록 눈이 오롯이 에드윈을 향했을 때, 그는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화는 궁금해하면서, 왜 내 어린 시절 초상화는 안 찾는 거죠?”

“…….”

“아, 하긴. 실물로도 밀렸는데 초상화인들 안 밀릴 리가 있나.”

우스운 질투라고 해도 좋고, 투정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올리비아의 눈이 저에게만 고정될 수 있다면 에드윈은 그 무엇도 괜찮았다.

미안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던 제 말은 거짓말로 남을 것이었다.

올리비아가 궁금해하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올리비아까지도 어디론가 사라지는 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새까맣게 타들어 간 속내를 숨긴 채, 이제 에드윈은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깍지를 낀 손을 제 얼굴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여린 손목부터 손바닥까지 차근히 입술을 찍어 내렸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 아기 천사처럼 예뻤다는데."

몇 살이든, 분명 예뻤을 거다.

꽉 다문 입술 새로 가쁜 호흡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올리비아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정신 없는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린 에드윈이 증식했다.


“리브는 궁금하지도 않아요?”

입을 맞추는 손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이 느리게 올리비아를 향했다.

시선이 얽히자 에드윈은 눈을 깜빡였다. 마치 생각을 읽은 듯 붉은 시선이 요요히 반짝였다.

손끝이 곱아들었다. 뱃속 어딘가가 간지럽고 심장이 조마조마해서 올리비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애써 태연한 척 웃으니 에드윈도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올리비아, 자꾸 입술 깨물면 나도 깨물 거예요.”

“저를요?”

“네.”

이거야말로 농담이겠지, 하고 조금 웃던 올리비아가 순간 창백해졌다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부드럽게 올리비아의 검지를 편 에드윈은 보란 듯 눈매를 휘어 웃으며 입술 새로 검지 끝을 물었다.


 
예민한 손끝에 닿는 더운 숨과 선연히 닿은 감각. 저를 바라보는 날것의 시선에 잠식되어 버릴 것만 같은 때였다.


“제가 그림을……!”

“베, 베서니?”

그러고 보니……! 화들짝 꿈에서 깨어난 듯 에드윈을 뿌리친 올리비아가 문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디를 다녀왔는지 액자를 들고 있는 베서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문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가져왔는데, 생각해 보니 뭘 놓고 온 것 같아서…….”

“아니에요! 베서니!”

 

.
.
.



“그, 아가씨께서 선대 대공 전하의 그림을 보고 싶어 하신 것 같아서요. 전하께서 아주 작은 도련님이던 시절에 그리셨던 가족 그림은 몰래 보관하고 있었거든요.”

혹시나 싶어 기대했던 올리비아는 그림을 보자마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말씀하신 닮은 점이 혹 머리 색깔과 눈 색깔일까요?”

“정답이에요. 올리비아. 내 화풍을 잘 이해하고 있군요.”

어린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은 머리 색깔과 눈 색깔만 달리한 세 명이 나란히 웃고 있었다. 키 차이로 선대 대공 부부와 에드윈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집’에서 본 흰머리 남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하긴, 그 남자가 선대 대공 전하이실 거라고 추측하는 데 명확한 사유조차 없는데. 괜히 웃음이 나와서 올리비아는 꼼꼼히 그림을 바라보다 짓궂게 웃었다.


“정말, 아기 천사였군요. 에드윈. 날개는 직접 달았나요?”

“글쎄요. 어쩌면 진짜 천사님이 그려 준 걸지도 모르죠.”

어쩌면 하나도 당황하지 않을까. 못 말리겠다는 듯 웃던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번뜩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제 동화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림책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던 로웰의 옛날이야기는?”

어렸을 때 에드윈이 선대 대공비한테 들었다는 옛날이야기. 에드윈이 직접 그려 준다는 말은 안 했지만, 올리비아는 뻔뻔하게 굴었다.

아까 저를 당황하게 군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주 가벼운 놀림이었다.

베서니가 “옛날이야기?” 하며 갸웃거리는 사이 에드윈은 응접실 소파에 편하게 기대며 웃었다.


“그림 실력이 탄로 났으니, 직접 들려줘야죠.”

너무 오래되어서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에드윈은 느릿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한 용감한 소년이 살았다고 해요. 세상이 온통 어두울 때, 그는 짐승과 외부 침략자들로부터 마을을 보살폈고…….”

올리비아는 가만히 에드윈 쪽으로 몸을 기댔다.

나른해지는 응접실의 분위기에 베서니는 눈치 빠르게 차를 가져오겠다며 문을 나섰다.

귓가가 아릴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가 이야기를 죽 이어 나갔다. 제도의 건국 신화와도 비슷한 결의 이야기였다.

용감한 이가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

제국의 초대 왕은 용을 죽이고 그 용이 내린 축복 위에 나라를 세웠다고 했는데……. 흥미롭게 에드윈의 이야기를 듣던 올리비아가 몸을 굳힌 건 한순간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신을 향해 기도를 했죠.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한 신은 세 번의 시험의 끝에 소년을 믿기로 했고, 천사를 내려보내셨대요.”

“…….”

“천사는 왕이 된 소년의 나라에 영원히 보살핌을 주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천사들을 끊임없이 보냈어요.”

연속성.

여느 신화에서도 끊임없는 축복을 위해 연속적으로 천사를 보낸다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단발의 축복 아래에서 인간의 힘으로 뻗어 가는 나라. 그게 황권을 강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신화였다.

하지만 나라에 계속해서 천사의 도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리고 왕국에서는, 천사를 보내 준 신께 감사의 표시로…….”

막힘없이 이어 가던 이야기가 끊어졌다. 에드윈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뒷이야기를 떠올리려 했다. 무언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흐린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혹시 천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의례를 지냈나요?”

“리브,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어요?”

이제야 기억난 듯 반가워하던 에드윈한테 올리비아는 놀란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베서니한테 들었던 로웰의 이야기와 겹치는 것 같아서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로웰의 건국 신화. 그것도 사제와 관련되었을지 모를, 천사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깨달은 것은 에드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저는 정말 제룬을 봐야겠어요.”

단단한 올리비아의 말에 잔잔하던 그의 얼굴에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 * *

제도의 대공저.

하워드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브록이 아가씨의 호위를?”

그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윈스터는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울분을 토했다.


“그러니까. 브록이 아가씨의 호위라니. 말이 돼? 맹세도 아직 안 바친 기사가 호위라니!”

삼 일이 걸릴 거리를 이틀 하고도 반나절 만에 도착한 그는 혼자 칠면조 두 마리를 먹어 치운 뒤에야 겨우 힘이 난 듯 긴 하소연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가 브록이었다면 그 잘난 콧수염 싹 밀어 버리고 여기로 조사를 나왔을 거야. 나에 비하면 별로지만, 그래도 브록도 호감형인데. 정보 정도야 가져오겠지!”

“그러니까 네가 브록이 아닌 거야. 콧수염을 포기하면 그건 브록이 아니지.”

새로운 차를 가져온 소벨이 어깃장을 두었다. 아하. 졸지에 깨달음을 얻은 윈스터가 괜히 하워드에게 시비를 걸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천하의 인터필드 경께서는 협상을 마무리하는 데 왜 그리 오래 걸리십니까?”

기실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협상이었다.

광물 세율에 비밀 문서까지. 난다 긴다 하는 협상가라도 수 달이 걸릴 일이었다. 하지만 하워드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잠시간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윈스터는 조바심을 냈다.

혹시 계획이 어그러진 걸까. 설마 태자가 비밀 문서도 못 이용하는 멍청이일까? 아니면 비칸데르가 세금을 내지 않는 이 다급한 와중에 다른 걸 가지고 뻗대기라도 하는 걸까.

온갖 생각이 윈스터를 덮칠 때였다. 신중히 말을 고르던 하워드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태자가 내게…….”

“태자가 너한테……?”

윈스터가 말을 따라 한 뒤에도 하워드는 쉽사리 뒷말을 잇지 않았다. 속이 탄 윈스터가 식어 가는 차를 들이켤 때였다.


“……친근하게 굴어.”

풉-! 윈스터는 마시던 차를 대차게 뿜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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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쨍하게 뜬 한낮, 제도의 러헤이른 거리.

활기찬 거리에는 향기로운 꽃과 리본이 가득했다. 곧 다가올 ‘아버지의 날’을 준비하는 상점들의 입구에는 화려한 홍보물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와 달리 에딩튼 거리로 가는 길은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접어들자마자 음울하고 그늘진 길목.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처럼 끈적이는 과거의 향락가. 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거리에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낡고 해진 셔츠에 밑창이 다 떨어져 나간 신발, 군데군데 얼룩진 바지를 입은 윈스터는 여느 사람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눈으로 거리를 살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하워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자가 그렇게 의뭉스러운 이인 줄은 처음 알았어. 늘 무슨 꿍꿍이인지 티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내가 뭐라 하든, 웃으면서 다음 약속을 잡으려 해.”

 
태자가 변했다. 그 변화가 이쪽에 있어서는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아가씨의 명을 완수하는 대로 하워드를 도와야지.

윈스터 칼터 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빙그레 웃었다. 햇빛 한 줌이 그를 비추는 사이, 그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고 호감형인, 더불어 조금 굶주린 청년이 되었다.


“저, 정말 배가 고픈데 일을 도와드리고 빵 반 덩어리만 얻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굶주린 청년이 애걸하듯 말한 이는 이 거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파였다. 한참이나 눈을 홉뜨고 청년을 보던 노파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빵도 못 얻어먹을 얼굴이 꼭 매년 보는 얼굴이랑 비슷하구먼.”

“매년 본 것 같긴요. 저처럼 잘생긴 사람을 어디에서, 아!”

나무 지팡이로 한 대 얻어맞은 청년은 금세 노파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세월 모두를 이 에딩튼 거리에서 보낸 노파의 이야기를 이렇게 잘 들어 주는 청년은 근 몇 년 동안 처음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던 청년은 어느 순간 은근하게 이야기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어쩜 모르는 이야기가 없으시네. 그렇다면 그분들도 아시려나? 여기에 아주 오래전에 살았다는데, 초록 눈의 노파와 같이 살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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