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 선대 대공 부부의 초상화 (1) (127/151)


#127. 선대 대공 부부의 초상화 (1)
2023.05.17.



 


“잠깐만요. 에드윈.”

올리비아는 서둘러 에드윈을 잡았다. 바로 앞이 ‘집’이었다.

그것도 이 겨울 같은 세누아의 계곡에서 오로지 봄을 유지하는 신비한 곳. 마석 목걸이가 공명하듯 반짝이는 곳.


“여기 조금만 들어가면 진짜 신기한 곳이 있어요. 이 추운 날씨에도,”

“올리비아.”

설득하는 말 위로 간절한 목소리가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여긴 너무 위험했어요. 위험할 시에는 돌아가겠다고 한 거 잊지 않았죠? 특히나 떨,”

에드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미끄러졌다는 것만으로도 성으로 돌아가 진료를 받을 이유는 충분하네요.”

“미끄러진 게 아니에요!”

진료라니! 이전에 제도 대공저에서 받았던 과한 처방들이 떠올랐다. 책까지 금지당한 채 휴식만 했던 시간들.

올리비아는 제가 하나도 다치지 않았으며, 그의 생각만큼 이곳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피력했다.


“미끄러진 게 아니라, 목걸이를 잡기 위해서 손을 뻗다가 갑자기 이상한 바람이 당기듯이 나를…….”

“아하.”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저를 바라보는 에드윈의 눈이 한순간 짙어졌다.


“위험한 건 안 된다고 우리 약속했었는데.”

“…….”

“이곳은 정말 위험한 곳이군요.”

아, 큰일이다. 아무래도 영 잘못 말한 것 같다.

* * *

태양이 한창 높은 시간이었다.

말을 타고 있는 그대로 디안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분위기 탓이겠지만, 마차가 있는 곳만 온도가 훨씬 낮아 보였다.


“……정말, 저도 이렇게 놀랐으니. 전하께서는 오죽하실까요.”

“더 놀라시는 게 당연하시지. 어쨌든 아가씨께서 떨어지신 게 단순히 미끄러진 게 아니라 수상한 힘 때문이라면 더더욱 가는 걸 반대하실 법도 하고.”

“그래도…….”

베서니의 대답에 디안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정말로 저도 노인이 있는 곳까지 갔었던 걸까? 저 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걸까?


“정말 전하께서 세누아의 계곡에 다시 못 들어가게 하시면 어떻게 하죠?”

“글쎄. 그건 우선 나중에 생각하고. 급한 건 따로 있는 듯싶다?”

태평한 베서니의 말에 앞을 바라본 디안의 미간이 설핏 찡그려졌다.

성문을 가로막듯 선 마차에 새겨진 건,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마차 앞에는 장신의 남자 세 명이 서 있었다. 철통같이 성문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은 몹시도 반갑다는 얼굴로 디안을 바라보았다.

아가씨와 똑같이 시릴 정도로 반짝이는 은발. 그 아래 무감한 자수정 빛 눈동자.

디안이 천천히 말을 멈추었다. 제국의 단 두 명뿐인 공작을 대하면서도 말에서 내리는 예우 따위는 걷어치웠다. 도발과도 같은 대접에도 공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를 보러 왔소.”

마치 남을 이야기하는 듯한 덤덤한 목소리였다. 내심 무슨 말을 할까, 하고 긴장했던 제가 다 우스울 정도였다.


“정말로 내가 마델레이네의 보호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디안은 그날 밤, 정원에서 아가씨가 했던 말들을 토씨 하나 빠짐없이 기억했다.

보호가 아닌 방치, 혹은 부추김일지도 몰랐다. 그 수많은 추문이 쌓이는 동안 한 번도 신문에 정정 기사를 내 주지 않았던 공작님은 이렇게 생긴 분이었구나.

다행이었다. 제가 싫어하는 제이드 마델레이네와 닮아서. 그래서 디안은 빙그레 웃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애석하시겠지만 돌아가 주시길 권고드립니다, 공작님. 마델레이네 경은 두 번째 방문이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비꼬는 데에 재주가 없었지만, 보고 배운 게 하워드였고 윈스터였다.


“비칸데르 대공령은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방문을 일체 금한다고.”

심술궂다고 생각했던 윈스터의 말이 술술 제 입에서 튀어나왔다. 자존심 상할 법도 한데 공작은 빤히 디안을 보다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올리비아를 보러 왔소.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일이요.”

“비켜 주시죠. 이제껏 찾아오지 않으시다 이리 급히 오신 걸 보면 적어도 아가씨께 잘 보이셔야 할 필요는 있으실 텐데.”

이번에는 조금 먹힌 모양이었다. 표정 없는 공작은 둘째 치고, 옆에 있던 두 아들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내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마부한테 마차를 비키라 지시했다. 아쉬운 듯 성을 바라보는 콘라드 마델레이네가 공작한테 무어라 말을 했고, 공작 역시 그를 따르는 듯했다.

그 일련의 모습들을 보는 순간 디안은 윈스터가 왜 그리 제이드 마델레이네에게 매몰찼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뒤늦게 찾아오는 저런 모습이,

이제 와 가족인 양 ‘마델레이네’라는 성을 운운하는 말들이.

아주 같잖고 뱃속에 벌레라도 든 것처럼 아주 부글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 * *

대공성의 올리비아 방.

올리비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방에 들어온 사람의 수라도 세는 날에는 제 얼굴이 터져 버릴 듯했다.

손만 잠시 꼼질거렸음에도 그녀를 매만지는 단단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건, 진료를 받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느껴져서는 안 될 만큼 짙고 밀접했다. 에드윈이 마치 올리비아를 둘러싸듯 껴안고 있는 모양새였으니까.

마차 안에서야 저를 껴안은 채 진정하려는 듯 파르르 떠는 에드윈의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했다. 동시에 제가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리는 에드윈을 보며 반성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마치 환자를 대하듯 안고 올라오는 것으로 모자라 품에 껴안은 채로 진찰을 받다니.

그것도 의원부터 베서니, 디안, 브록, 그리고 시녀들까지 있는 와중에……!

부끄러움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올리비아는 겨우 말했다.


“……제발, 에드윈. 좀 저를 내려놓아 줄래요?”

“환자 말은 하나도 안 들을 거예요. 리브.”

찌릿 노려보는 눈매가 금세 축 처졌다. 부끄러움 탓인지 사과처럼 물든 뺨이 더없이 예뻤지만 에드윈은 모른 척하며 의원의 진료를 살폈다.

여기저기 올리비아의 관절을 확인한 의원은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 없으십니다. 오히려 아주 건강하십니다.”

의원의 확답을 듣고서야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향해 보란 듯 일부러 의원의 말을 따라 했다.


“아주, 건강하다는 말이죠?”

“예. 그럼요.”

“그것참 다행이군.”

“오히려 놀라신 건 전하 같으신데, 진찰 필요하실까요?”

싫으시다면 말고요.

찡그려진 얼굴만으로도 척하면 척이었는지, 의원은 바로 말을 돌렸다. 눈썹까지 새하얗게 샌 의원은 에구구, 하면서 “어렸을 때는 안 그러시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제룬을 닮았다. 생각보다 먼저 말이 나갔다.


“아, 저…….”

“네. 아가씨. 뭐 더 확인할 게 있으실까요?”

“어디 더 아픈 곳이라도 있어요. 리브?”

의원과 에드윈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올리비아는 애써 에드윈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제 이야기는 아니고, 오랫동안 안 깨어나는, 계속 잠들어 있는 사람을 보았는데……. 어떻게 해야 깨어날까요?”

저를 보는 에드윈의 눈이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환자분은 얼마나 안 깨어난 걸까요. 아가씨?”

아차. 그걸 안 들었다. 올리비아는 슬쩍 대중을 잡아 보았다.


“한, 오 년……?”

음. 신중하던 의원의 눈이 한순간 번뜩였다.


“환자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씀드리는 건 조심스러우니, 한번 봐야 알 듯싶습니다. 오 년이라니. 일어나지 않는 환자를 두고 오 년이나 버틸 정도면 담당 의원의 실력도 엄청난 듯한데요?”

“의원은 아니고 치유사라고 하던데.”

올리비아의 대답에 의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마법사와 의원, 그 사이에 치유사라는 이는 없었다. 약초꾼도 아니고 뭉뚱그린 말일까? 의원의 눈이 반짝였다.


“치유사요? 치유사면 정확히 어떤 걸 하는 겁니까. 아가씨?”

“그게…….”

“그만.”

냉랭한 목소리가 대화를 끊었다. 에드윈은 애써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어요. 올리비아. 아무리 괜찮다 해도, 내 아가씨한테는 지금 휴식이 필요하잖아요. 그렇죠?”

의원은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아가씨의 이야기가 궁금했어도 대공의 말이 맞았다. 이내 썰물처럼 모두가 나간 방에서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다 나가고서야 날 보는 거예요. 리브? 섭섭한데요?”

의원의 말대로였다. 아까보다는 나아졌지만 씩 웃는 얼굴에는 여전히 창백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세누아의 계곡 이야기를 피하는 모습, 마차 내에서 매달리듯 저를 붙잡던 손. 그 떨림 가득한 호흡까지.


“꼭, 다시 올게요. 디저트 갖고 티타임에.”

 
제룬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룬은 에드윈을 왕손이라 불렀잖아요. 저를 사제라고 불렀고요.”

본론부터 말하는 올리비아의 눈이 반짝였다. 에드윈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의 아가씨는 늘 순하게 웃는 얼굴을 하면서도 이럴 때는 그 누구보다 맹렬하게 나아갔다.


“그는 뭔가 더 아는 게 있었어요. 에드윈. 저는 지금이라도 다시 갈 수 있어요. 딱 하루만 쉬고 우리 같이 내일 가요. 네?”

“위험한 건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세누아의 계곡은 올리비아한테 너무 위험한 곳이었어요.”

“안 다쳤어요. 어쩌면 그 힘이 나를 이끈 걸지도 몰라요. 아까만 해도 마석이 반짝거렸으니 거기에 가면 정말 비밀이 풀릴지도 몰라요.”

마석이 어떻게 반짝였는지만 설명한다면 에드윈도 제 말에 훨씬 관심을 가질 텐데. 하지만 이어지는 에드윈의 말에 올리비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비밀 그런 것보다 올리비아 당신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해.”

말문이 턱 막혔다. 단 한 문장을 말하는 에드윈의 얼굴이 꼭 공포로 점철되었던 아까와 똑같아서. 올리비아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드윈에게 광산이, 로웰과 관련된 비밀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알아서. 그래서 더 그랬다.

에드윈은 잠시 쓴웃음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다시는 리브 당신이 계곡 쪽은 발도 디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호한 권유. 올리비아는 품에 안기듯 몸을 기대 오는 에드윈을 마주 안으며 그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오늘은, 일단 계곡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어요. 대신 다른 걸 할까요?”

“우선은, 나는 지금 안심해야겠어요. 리브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계속 만끽하고 싶어요.”

올리비아의 귓가에 닿는 소리가 몽롱하게 젖어 들었다. 어딘가 묘하게 사람을 매혹하는 듯한 조름에 멍하니 안겨 있던 올리비아는 순간 힘 빠진 손길로 에드윈을 밀어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도 충분히 같이 있지 않았어요?”

막, 사람들 다 있는 데서도 안 놓아주고!

이제야 다시 생각났는지 올리비아가 빨개진 얼굴로 다다다 말했다.

순순히 밀려나던 에드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올리비아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리브.”

귓가를 울리듯 감미로운 목소리에 올리비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코끝이 닿을 듯, 호흡이 얽힐 듯, 달싹이는 입술이 서로를 끌어당길 만큼 가까운 거리.

그 짧은 거리에서 붉은 눈이 유혹적으로 휘어졌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고픈데.”

어느새 올리비아를 안아 올리듯 파고드는 팔이 단단했다. 드레스와 셔츠를 경계로 둔 채 느껴지는 감촉들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겨우 해갈될까 말까인데. 아까 너무 겁에 질려서 이번엔 삼 일은 붙어 있어야겠어요.”

에드윈에게서는 좋은 향이 났다. 그래서 그녀는 몽롱하게 어지러웠다.

올리비아는 침만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에 나직이 웃던 에드윈이 올리비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내 아가씨. 당신은요?”

“저…….”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올리비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달콤한 향 아래, 올리비아의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질 때였다.


“……선대 대공 전하의 초상화를 봐야 할 것 같은데요?”

한참 만에야 에드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아니라,”

“…….”

“내 아버지의 초상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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