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남자 (126/151)


#126.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남자
2023.05.14.


집, 혹은 보호소.

이름 없는 그곳은 커다란 오두막이었다.


“내 말이 맞잖아! 예쁜 언니가 왔다고!”

투박한 나무 문을 열자마자, 창문 앞에 몰려 있던 아이들이 쪼르르 문가로 다가왔다.

그 사이에서 아까 보았던 꼬마 티비는 팔을 붕붕 흔들며 알은체를 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또래 친구들 네 명한테 으스대듯 콧대를 올렸다.

붉은 머리 아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웅얼거렸다.


“귀족 아가씨 아니야?”

“아니라고, 그랬는데.”

낭랑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올리비아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꼬마들과 달리 어른들은 기둥이나 문 뒤에 몸을 숨긴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꼭 예니브 거리에 갔던 첫날 같았다.

올리비아는 저를 탐색하는 눈빛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는 사이 제룬이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사제님이십니다. 다들, 괜찮아요.”

둥근 지붕 아래에서 제룬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제룬의 말에 사람들이 멈칫거렸다.

사제님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귀한 태를 봐서는 귀족이 분명한데, 초록 눈의 귀족이라니.


“사제님?”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질문이 다다다 쏟아졌다.


“정말 사제님이세요?”

“근데 사제님은 뭐 하는 분이세요?‘

“바보야. 치유사 할아버지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잖아.”

그만-. 제룬의 말에 아이들은 씩 웃었다. 으레 하는 장난인 것처럼. 제룬이 바깥에서 놀다 오라고 말하니 아이들은 올리비아한테 가졌던 호기심을 접은 채 와아-,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다들 할 일 해요. 나는 사제님께 우리 집을 소개해 드릴게요.”

긴가민가하는 사람들의 눈빛에도 아랑곳 않고 올리비아는 살며시 손에 감싸 쥔 마석을 내려다보았다.

여태껏 본 적 없이 반짝이는 걸 보니 분명 이곳에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 확신이 서자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올리비아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제룬은 언제부터 이렇게 지내셨어요?”

“여기에 자리를 잡은 건 사십 년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십 년 전에 로웰이 끝나고 계속 쫓겨 다니다 겨우 터를 잡았으니.”

까마득한 과거를 훑어 가듯 연두색 눈에 세월이 담겼다.

흐릿한 초점 너머에서 떠올린 게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찰나 사이에 제룬의 얼굴 위로 반짝이던 소년의 얼굴부터 중년과 장년이 스쳐 지나갔다.

느리게 처지는 눈꼬리의 웃음이 다시 제룬을 지금 나이대의 노인으로 만들었을 때, 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웃었다.


“묵은 이야기가 많아 다음에 방문하실 때까지 가볍게라도 정리를 해 놓아야겠습니다. 그때는 제가 좋아하는 차를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저는 차에 어울리는 디저트를 준비해 올게요.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아까 본 아이들과 저분들이 전부인가요?”

다양한 맛의 디저트라면 분명 사람들의 경계심도 녹여 버릴 게 분명했다.

혹시나 이곳을 거쳐 나온 이가 예니브에도 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은 제법 그럴듯했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묻기도 전에 제룬은 닫힌 문을 가리켰다.


“아닙니다. 저 방에도 한 분 있습니다. 이곳에 오신 후로 단 한 번도 깨어난 적이 없는 분이시지만요.”

한 번도 깨어난 적이 없다니. 무슨 말인지 몰라 올리비아가 잠시 머뭇대는 사이 제룬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시다면 사제님께서도 함께 그분의 쾌유를 빌어 주시겠습니까?”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닫힌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찬란한 햇살에 올리비아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채광이 제법 좋은 편인 이 집에서도 유독 창문이 큰 방이었다. 신선한 바람이 방을 가득 휘감고 있었고 은은한 꽃향기가 향기로웠다.

방의 주인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잘 관리된 흰 침구와 비견될 만큼 새하얀 머리의 남자였다. 두 눈 위에 두꺼운 면포를 얹고 있는 터라 나이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입매 끝에 잡힌 주름으로 본다면, 마델레이네 공작과 비슷한 연배일까.


“딱 사제님을 뵈었던 것처럼, 만났던 분입니다. 제가 이 집을 짓고 가장 오랫동안 이곳에 계셨던 분인데. 제 능력으로는 치유가 어려워서…….”

제룬의 말끝이 흐렸다. 그 말을 들으며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남자를 향해 기도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남자가 빨리 나아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럼 입구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제룬이 먼저 방을 나섰다. 그를 따라 나가던 올리비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깨어난 적 없었다는 남자의 손끝이 아주 조금 움직인 것 같다면, 착각일까?

빤히 이불 위에 올려진 손가락을 보던 올리비아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저 남자의 하관은 어디에선가 본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흰 머리가 아니라 빛 한 점 들지 않을 법한 새까만 머리카락이라면 에드윈을 닮은 것 같기도…….


“사제님?”

“아, 가요!”

올리비아가 경쾌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 * *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제룬은 습관이라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오히려 하나도 가리지 않는 올리비아가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요즘에는 다들 가리지 않고 다닙니까? 요 근래 마을로 내려간 적이 없어서 정말이지 아까 사제님 뵈었을 때도 깜짝 놀랐습니다.”

두 사람이 호수를 지나면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미풍의 끝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올리비아는 다시 이곳이 세누아의 계곡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어색해서 모자를 눌러쓰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편하게 다니고 있어요.”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간 멈춘 걸음만으로도 제룬이 얼마나 놀랐는지가 증명되었다.

아직 놀라기에는 이른데.

올리비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초록 눈, 그러니까 옛 로웰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리도 따로 있답니다. 지금은 거리 정비 중이라 다들 잠시 비칸데르령 이곳저곳에서 살고 있죠.”

“로웰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리도 있단 말이십니까?”

이제 걷는 것을 잊어버린 듯 멈춰 선 제룬은 띄엄띄엄 말을 떨어뜨렸다. 저를 돌아보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의 표정이 읽혔다.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요.”

“로, 위나시여…….”

정말 신실한 모양이었다. 감탄사처럼 터져 나온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올리비아는 제룬의 반응을 끝까지 기다린 다음 분위기를 환기하듯 슬쩍 물었다.


“비칸데르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데, 얼마나 안 내려왔기에 그래요?”

“……한 넉 달 된 듯싶습니다.”

생각보다 오래되지는 않았다. 예니브 거리가 정착한 게 적어도 몇 년은 되었는데. 올리비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제룬이 서둘러 덧붙였다.


“가끔은 비칸데르령이 아닌 국경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야 저희를 기억하는 이들이 없을 것 같아서.”

“…….”

“비칸데르령에 갈 때마다 약초만 팔고 필요한 것들만 빠르게 사 왔습니다. 달리 이야기할 거리도 없어서 짧게 다녀왔는데……. 그럴 줄은.”

말문이 막혀서 제룬은 한참이나 제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쿨럭이며 잊었던 숨을 다시 쉬었다. 폐부에 차오르는 숨에 놀란 기침이 계속 나왔다.

괜찮냐고 묻는 사제님의 말에도 제룬은 눈만 끔뻑거렸다.

아무리 사제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지금 들은 말 모두가 완전히 믿기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을 수 없었다.

로웰의 멸망 이후 홀로 떠돌아다녔던 게 십 년이었다. 그 십 년간 로웰의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어땠는지는 제룬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런데 그 시선이 바뀌고, 심지어 거리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고?


“올리비아!”

그 순간이었다.

공기의 흐름을 찢듯 날카로운 목소리에 제룬은 물론 올리비아도 깜짝 놀랄 때였다.

기척도 없이 지척에서 에드윈이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 가득 공포를 담은 채.


“에드,”

올리비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에드윈은 단숨에 다가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등에 닿은 온기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정말, 정말 놓치는 줄…….”

귓가에 중얼거리듯 나직한 에드윈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차마 가정으로조차 내뱉을 수 없는 말을 듣고서야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 생각이 짧았다.


“미, 안해요.”

로웰의 피가 섞인 자라면 자신의 무사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더라도 먼저 모습을 보였어야 맞다.

맞닿은 온기 탓일까, 아니면 안도감 때문일까. 차갑던 에드윈의 손이 점점 제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에드윈은 천천히 품에서 올리비아를 떼어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번졌던 눈앞이 느리게 초점을 되찾았다.

몇 번이고 막막하던 숨을 뱉어 낸 뒤에야 에드윈은 느릿하게 올리비아의 뺨을 쓸어내렸다.


“……어디, 다친 곳은.”

“하나도 없어요! 정말 괜찮아요!”

올리비아는 배시시 웃으며 에드윈의 다시 손을 끌어다 제 뺨에 대었다.

익숙한 온기가 더없이 귀했다.

에드윈은 문득 맥없이 제 옆을 떠나갔던 가족들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차게 비어 가던 제 옆자리도.

하마터면 이 온기를 다시 못 느낄 뻔했다는 사실에 에드윈의 눈앞이 다시 아찔해졌다.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올리비아였다.

풀리지 않은 비밀 따위가 아니라.


“……리브.”

무엇부터 말할까. 에드윈이 잠시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할 때였다.


“고, 고귀한 왕손께 경배를.”

분명 에드윈 자신을 향한 인사였다. 두꺼운 웃옷을 입은 노인이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에드윈에게 예를 갖추고 있었다.


“로위나의 충실한 종, 제룬이 왕손 저하를 뵙습니다.”

서둘러 모자를 벗은 제룬은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제 소개를 마쳤다. 눈이 부실 정도로 훤칠한 남자에게서는 분명 로웰 왕족의 기운이 흘렀다.

왕족의 혈통을 이은 자와 사제의 혈통을 이은 자. 제룬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로위나시여. 저를 여태껏 살리신 이유가 이것이라면…….


“아, 에드윈. 여기는 제룬이에요. 아까 저를 구해 준 치유사이고, 또.”

“아가씨!”

사제님의 말 위로 커다란 목소리가 덮였다. 제룬은 목소리들이 다가오는 곳을 바라보고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다행이에요. 괜찮으신 거죠? 어디 다치신 곳 없고요? 정말 아까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가씨께 우호적인 기운이……!”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놀란 듯 입을 막았다. 연하늘색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세상에.”

“……!”

“정말 로웰의 사람이군요? 세누아의 계곡에, 로웰의…….”

“로위나의 종, 제룬입니다. 왕손 저하의 마법사인가요……?”

마법사는 말문이 막힌 듯 눈만 깜빡였다.

빨간 머리 기사와 콧수염이 난 기사 역시 뒤이어 오고 있었다. 제룬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려다 말았다.

저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멸 따위가 묻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동질감. 혹은 그 이상.

매번 품기만 하고 삭여야 했던 기대감이 제룬의 마음에서 다시 피어났다.

사제님의 말이 정말이라면, 이제 집이라 불리는 오두막의 모든 이들이 정말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벅찬 건 베서니도, 디안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세누아의 계곡에 로웰의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대공을 왕손이라 부를 정도로 로웰에 익숙해 보이는 자가.

분명 이 노인이라면 여태껏 자신들이 풀지 못한 로웰의 비밀을 단번에 풀어낼지도 몰랐다.

서로 다른 기대감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할 때였다.


“드로윈 경.”

“예, 전하.”

“바로 돌아갈 준비를 하지. 성으로 먼저 사람을 보내 아가씨께서 진찰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 명해.”

“에드윈?”

분명 괜찮다고 말했는데. 에드윈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에드윈을 불렀다. 평소라면 바로 대답했을 그는 올리비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세누아의 계곡에서…….”

“…….”

“더 확인할 건 없으니 이만 철수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