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로위나를 섬기는 치유사, 제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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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로위나를 섬기는 치유사, 제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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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로위나를 섬기는 치유사, 제룬
2023.05.10.
“괜찮으세요?”
이제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밀짚 색 머리카락에 진한 연두색 눈이 마치 예니브의 아이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응, 고마워.”
저를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주춤거리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아이는 다정한 한마디에 금세 바투 다가왔다.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올리비아를 보며 종알거렸다.
“언니 예뻐요. 혹시 언니는 귀족이세요? 귀족 아가씨들만 이런 옷을 입는다고 그랬는데.”
귀족인지를 물으면서도 낯 하나 가리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 생경했다.
올리비아가 대답 없이 웃기만 하자, 아이는 편한 대로 해석했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만져 봐도 돼요? 사실 호수까지 혼자 오면 혼나는데 할아버지가 며칠째 안 일어나서 꽃 가져다주고 싶어서 나왔거든요. 언니가 보기에는 어떤 꽃이 제일 예뻐요?”
아이가 내민 꽃들에서는 물씬 향기가 풍겼다. 올리비아는 멍하니 대답했다.
“다 예쁜데…….”
“그렇죠? 원래 할아버지는 빨간 꽃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이건 저기 핀 것 중에 제일 빨개요.”
신이 난 아이는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올리비아는 이 믿기지 않는 상황을 천천히 곱씹었다.
별천지처럼 온화한 공기 속 꽃과 나무가 아름답게 피어난 봄 같은 곳. 얼어붙은 듯 하얗던 세누아의 계곡과는 달리 쾌청한 하늘. 그리고 졸졸 흐르는 계곡까지.
문득 올리비아는 푹신한 잔디를 짚고 있는 손이 어딘가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의식하지 못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꽉 쥐고 있는 손바닥 안, 목걸이의 마석이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다행히 목걸이는 잡았구나.
처한 현실을 자각하는 동시에 올리비아의 몸이 떨려 왔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절벽에서 떨어지던 아찔한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금 몸을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들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속이 뒤집어졌다. 올리비아는 바닥을 짚은 채 헛구역질을 했다.
“괜찮으세요?”
아이가 걱정스레 묻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속이 진정되었을 때서야, 올리비아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손끝이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살았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다. 동시에 에드윈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공포에 질린 듯 저를 바라보던 붉은 눈과 피를 토하듯 부르던 제 이름까지. 심장이 훅 떨어지며 지독한 아릿함이 가슴을 싸하게 울렸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가, 어디야?”
정말 이곳은 어디일까.
이곳과 세누아의 계곡의 접점이라고는 호수처럼 너른 계곡 위에 낀 흰 살얼음밖에 없었다.
“여기는,”
세누아의 계곡이라든지, 혹은 비칸데르령 그 어디의 지명이라도 나왔으면 했다.
아니, 그저 이 별천지 같은 곳이 제가 아는 제국의 한 곳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대답을 하던 아이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마냥 천진한 아이는 그저 배시시 웃었다.
“몰라요. 그냥 집이에요! 아빠는 보호소라고 했는데, 나는 그냥 집이라고 불러요.”
더 이상 생각하기 싫은 듯 단순하게 대답하는 아이의 말에 올리비아의 애가 바싹 타들어 갔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조금 더 차분하고 부드럽게 다시 물었다.
“이름이라든가, 뭐든 좋아. 그래, 여기에 올 때 어디라고 들었어? 누가 산다든가 어떻게 왔다든가.”
“여기는 이름이 따로 없어요! 그래서 나랑 아빠도 여기 올 때 힘들었어요.”
이름이 없는 곳이라니. 눈앞이 깜깜해졌지만, 올리비아는 애써 힘주어 마석 목걸이를 쓸어내렸다. 오지 중에는 지명이 붙지 않은 곳도 많다고 했다. 이곳이 어디든…… 아! 아빠?
“그러면, 네 아빠는,”
“언니도 이끌려서 온 거 아니에요?”
아이의 명랑한 목소리가 올리비아의 목소리를 뒤덮었다. 어른의 도움을 구하려던 올리비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이끌리다니. 아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심장이 콩닥거렸다. 어떠한 예감이 올리비아를 부추겼다.
혹시나 여기가 디안이 말했던 연기가 났다는 곳이 아닐까, 하고.
이 급박한 와중에도 계곡의 비밀을 파헤칠 생각이라니. 피식 웃으며 마석 목걸이를 내려다보던 올리비아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어쩐지 마석은 올리비아의 말이 맞는다는 듯 열심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는 입술을 비죽이며 투정을 부렸다.
“언니는 훨씬 쉽게 왔나 봐요. 나랑 아빠는 진짜 추웠어요. 눈이 너무 많아서.”
눈이라니. 세누아 계곡의 특징이었다. 반가움에 덜컥 목이 메었다. 아이는 쉬지 않고 자신이 이곳에 오던 날의 일을 묘사했다.
“그때 치유사 할아버지가 안 나타났더라면 정말 너무너무 추웠을 거예요. 원래 나는 발이 꽁꽁 얼었는데, 아! 치유사 할아버지다!”
말을 하다 말고 아이가 벌떡 일어나 올리비아의 뒤를 향해 힘껏 팔을 흔들었다. 저 멀리에서 백발이 완연한 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굴곡진 지팡이를 짚어 가며 걸어오는 걸음이 느렸다.
“아차, 여기까지 혼자 온 걸 알면 혼날 텐데.”
이제야 깨달은 듯 아이는 올리비아의 뒤로 몸을 숨겼다. 혹시 저 노인이 이곳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일까?
기대감에 올리비아가 일어서려는 사이,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들었지만, 단단함을 품은 목소리였다.
“티비. 왜 혼자 여기까지 나온 거야? 그분은 누구시,”
눈이 마주친 순간, 올리비아는 제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의 눈은 분명 저와 비슷한 초록색이었다.
노인 역시 그것을 알아챘는지, 잔잔히 이어지던 말이 뚝 끊어졌다. 이내 노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지팡이를 짚고 있던 노인이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아이가 황급히 달려가서 노인을 부축했다. 아이의 손을 잡으면서도 노인의 시선은 올리비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노인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물었다.
“……사제님, 이십니까?”
사제. 사제 귀족. 베서니한테 들었던 단어.
올리비아는 대답 대신 노인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이야기가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내 노인이 몸을 낮추었다.
“로위나의 미천한 종, 제룬이 드디어, 드디어…… 사제님을 뵙습니다.”
울음을 토하듯 성긴 목소리의 끝이 덜덜 떨렸다. 목소리에 담긴 해묵은 염원이 올리비아한테 와 닿아 사르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
.
.
“저는 그러면 할아버지한테 가 볼래요!”
눈치를 본 것인지 아이, 티바는 저 멀리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이 언덕 아래로 사라졌을 때에야 한동안 말을 못 하던 노인은 띄엄띄엄 말을 잇기 시작했다.
“……평생을 살면서, 사제님을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막연히 바라기만 했는데.”
회한에 젖은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를 사제로 단정 짓는 노인의 말에 올리비아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제가, 사제인가요?”
“그 선명한 초록 눈은 분명 로위나께서 사제님께 내리신 증표입니다.”
단언하는 말 사이에 다시 처음 듣는 단어가 나타났다. 로위나. 로웰과 관련된 이름일까. 하지만 묻기도 전에 노인은 흥분과 떨림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이곳까지는 어떻게 오셨, 아니. 정말로 여길 느껴서 오신 겁니까?”
“저는, 우연히 이곳으로 떨어졌어요. 목걸이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제 손을 펼쳤다. 반짝이는 마석을 보고 노인은 아까 올리비아를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경악했다.
“그건……!”
“이 목걸이에 대해 아세요?”
“……제가 이걸, 마지막으로 본 게 오십 년도 더 되었지만 똑똑히 기억합니다. 이건 제사 때 사용하던 열쇠입니다.”
오십 년도 더 된 시간, 열쇠, 로위나, 사제.
잘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이 올리비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저, 궁금한 게 많아요. 할아버지께서는…….”
무어라 호칭해야 할지 몰라 한 말에 노인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제룬입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사제님. 저는 로위나를 섬기고 사제님을 따르는 일개 치유사일 뿐입니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다 싶더니, 베서니의 모습과 비슷했다. 성성한 눈 가득 황망함이 깃들었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제룬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궁금한 것보다 먼저. 저는, 같이 온 일행이 있어요. 그들에게 제가 무사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혹시 일행분께서도 로웰의 후손이신가요?”
로웰의 후손이라면.
디안, 베서니, 그리고……. 에드윈도.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룬이 빙그레 웃었다. 세월을 따라 팬 주름이 자연스레 웃음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느꼈을 겁니다. 사제님이 무사하시다는 걸.”
느끼다니. 아까 아이도 그렇고 제룬도 그렇고,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로웰의 후손끼리 공유하는 무언가 신호 같은 거라도 있는 걸까?
“그래도 돌아가셔야 하실 테니. 일행분들이 계신 근처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꼭, 다시 이곳에 방문해 주십시오.”
신신당부를 한 제룬이 아차 하며 팔을 들어 보였다.
“급히 나오느라 가릴 것도 안 가져왔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무얼 가린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지런히 앞서 가던 제룬이 잠시 멈칫하며 올리비아를 돌아보았다.
“……저, 사제님께서는 안 가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짐짓 염려하는 듯한 말에 영문을 모르는 올리비아가 되물었다.
“뭘요?”
“그, 아직 바깥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망설이듯 하는 말에 올리비아는 제룬이 얼마나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설마 이런 사람이 아직도 많을까.
먹먹한 현실을 자각하던 때였다.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감각에 올리비아는 다시 마석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유독 반짝이는 빛은 마치 어젯밤, 방을 밝히던 빛처럼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빛의 반짝임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뛰어간 곳과 일치했다.
“저, 혹시. 저쪽에는 무엇이 있나요?”
“제가 보살피는 집이 있습니다. 갈 곳 없이 떠도는 로웰의 후손들이 잠시 묵어가는 곳이죠. 괜찮으시다면 지금 한번 보시겠습니까?”
손바닥 위로 마석 목걸이가 뜨겁게 반짝였다. 마치 무언가와 공명을 원하듯 손바닥으로 두근대는 기운이 퍼졌다. 저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마석 목걸이는 올리비아가 저쪽으로 가길 강력히 바라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안 됩니다. 전하!”
피를 토하듯 브록이 외쳤다. 날뛰는 짐승처럼 격렬한 몸짓에도 브록이 대공을 놓치지 않았던 것은 신의 도움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였다면 저를 단번에 뿌리쳤을 대공을 잡다니. 하지만 안도의 숨을 내뱉기도 전에 본 대공의 얼굴에 브록은 뒷걸음질 쳤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로 창백한 얼굴.
공포로 이지러진 얼굴, 매몰되듯 천천히 가라앉는 붉은 눈은 그 어떤 전쟁에서도 본 적 없었다.
대공은 한 꺼풀, 한 꺼풀, 죽어 가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직후의 사람처럼. 공기의 농도마저도 무겁게 침전되고 있었다.
에드윈은 멍한 눈으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험준한 벼랑 아래로 제가 불렀던 올리비아의 이름이 동굴에서처럼 메아리쳤다.
호흡조차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숨이 기도를 막아 왔다. 에드윈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마지막 떨어지던 올리비아의 얼굴만 가득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도 웃고 있었다. 에드윈의 머릿속 어딘가가 뚝 하고 끊어졌을 때, 그는 미련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다.
“마력이! 마력이 느껴졌습니다, 전하!”
다시 한번 뛰어내리려는 에드윈보다 베서니의 고함이 아주 조금 더 빨랐다. 저를 바라보는 대공의 눈을 마주하며 베서니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떨어지는 그 순간, 베서니는 당연하게 마법을 걸려 했다. 하지만 더 강한 마력이 베서니의 마법을 저지했다.
그건, 분명…….
“아가씨께, 아가씨께 우호적인 힘이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있던 디안 역시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하며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동조했다.
“분명, 아가씨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마력이 느껴지는 곳은 어디야.”
억누른 감정에서 배어나는 선연한 두려움에 베서니는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했다.
베서니의 한마디에 부옇던 눈앞만큼이나 에드윈을 잠식하던 공포가 가시고 있었다. 이성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에드윈 역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던 찰나였다. 그에게도 문득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순하고, 온화한 느낌의…….
그리고 그 기운이 흐르는 곳을 바라보았을 때.
“저쪽, 저쪽입니다!”
“저쪽, 같습니다.”
거의 동시에 베서니와 디안이 한곳을 가리켰다. 에드윈까지 공통된 곳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모습에 브록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금, 나만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거야?”
중얼거리는 브록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에드윈은 서둘러 그곳으로 뛰었다.
아무도 정확히 알려 주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는 명확한 목적지에 그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저 끝에는 분명, 올리비아가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