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 세누아의 계곡, 추락 (124/151)


#124. 세누아의 계곡, 추락
2023.05.07.



 


“……제가 잘못 짚었습니다. 폐하.”

“뭐?”

고저 없는 태자의 목소리에 황제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잘못 짚다니! 지금 트리스탄의 곡물을 모조리 가져왔어도 비칸데르령의 광물 세액의 절반가량밖에 안 되는 이 상황에 태자로서 그게 할 말이야?”

노여움을 품은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동시에 뜨거운 분노가 솟아올랐다.

마리아 에텔의 진창 같은 폭로로 인해 황녀는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 품위를 잃은 채 황녀 궁에서 칩거 중이었다.

황녀를 영주로 모셔 왔던 영지들은 혼란 상태에 빠졌고, 황실의 이미지는 추락했다.

성녀의 뒷모습, 성녀의 두 얼굴 등 타국에서는 이미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냈다고 했다. 이거야말로 제국의 망신이었다.


“대공의 그 수하 놈이 고작 5%의 세율을 주장한다면서! 그래서야 다시 황궁의 건재함을 보여 줄 수 있겠어?”

붉어진 황제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도드라졌다.

흔들리는 제국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황궁의 건재함을 계속 보여 줘야 했다. 강건한 기사단과 화려한 연회, 헛소문을 너그럽게 넘기면서도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모습.

하지만 거칠게 화를 내는 황제와 달리 태자는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존경하는 폐하. 아무리 귀족들의 분노를 이용한다 해도, 백성들에게 대공 그자는 여전히 전쟁 영웅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이제껏 빛을 받지 못했던 성녀와 함께 있는 전쟁 영웅.”

순간 황제는 멈칫했다. 귀족들의 수군거림에 잠시 백성을 잊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질 낮은 소문들이 백성들 사이에 돌고 있습니다. 황녀에 대한 것들도 그렇고…….”

“황녀에 대한 건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거라.”

무거운 분노에 레오포드는 잠시 어깨를 으쓱인 후 말을 이었다.


“……예, 폐하. 여하튼 그들이 쑥덕이는 말 사이에서는 대공과 공녀의 만남을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하며 신화처럼 추앙하려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발칙한 일이!”

황제가 벌컥 화를 냈다.

그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은 어느 아이가 종이에 삐뚤빼뚤 그린 올리비아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레오포드의 반응과 비슷했다.

색칠하지 않은 머리카락과 나뭇잎을 으깨 물들인 눈동자. 영락없이 올리비아의 특징을 빼닮은 그림을 보고 애틋해졌던 마음은 이내 뒤에 서 있는 새까만 머리의 남자를 보고 분노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의 레오포드는 실체 없는 그림 따위에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살이 빠져 더 날카로워진 얼굴로 유하게 웃었다.


“그런 영웅한테 바로 칼날을 들이댄다면, 역풍을 맞기 십상일 겁니다.”

황제는 한층 짙어진 눈으로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역풍, 입 밖으로 내뱉기 아찔한 단어를 잘도 말하는 얼굴은 여유만만했다.


“……무슨 수라도 있는 거냐?”

“이 동화의 물꼬를 아주 조금만 비틀면 어떻겠습니까?”

레오포드가 진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리고 티 테이블 위, 항상 펼쳐져 있는 체스판을 바라보며 웃었다.


“대공은 살육귀이지 않습니까. 난폭한 대공을 견디지 못한 성녀가 제 발로 황궁으로 찾아오고.”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레오포드는 흰색 퀸을 집어 으스러져라 감싸 쥐었다.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태자의 모습에도 황제는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레오포드는 다른 손으로 흰색 킹을 들어 굴러다니는 새까만 폰 하나를 툭 밀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에 광분해 미친 대공이, 감히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칼을 황궁에 디미는 그런 장면으로 말입니다.”

섬찟하리만큼 다정한 목소리 끝에 잘 깎인 목각 폰이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태자의 목소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황제는 물끄러미 두 동강 난 폰을 바라보았다. 오싹한 동시에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가슴이 뻐근해졌다.

제가 선대 대공의 최후로 그토록 바랐던 모습이 아들 대에서 실현되는 걸까? 목줄을 끊고 달아난 제 개의 결말이 저렇다면 속 시원하기 그지없을 텐데.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말끔히 해결된 게 하나도 없었다. 특히나 엘킨 공작.


“……아직 공녀를 회유하러 간 엘킨 공작도 돌아오지 않았어.”

“공작은 공작대로 일을 진행하라 하십시오. 저는 제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제게는 폐하께서 주신 비밀문서가 있지 않습니까?”

“대공이 그것을 놓고 갔다는 점을 유념해라. 뭔가 이상해. 그놈이 공주와 관련된 것을 얼마나 아꼈는데.”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녀에게로 향할 줄은 몰랐지.

씁쓸한 패배감에 황제가 입맛을 다시는 사이 레오포드는 한쪽 입꼬리를 시니컬하게 올렸다.


“바로 그겁니다. 그 무엇도 사람보다 중요할 수는 없죠. 그리고 마침, 지금 황궁에는 목이 뻣뻣한 대공의 사람이 무방비로 돌아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황제는 서둘러 태자의 시선을 따라 통유리 창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타이밍 좋게 놈이 걸어가고 있었다. 대공의 측근, 회색 머리의 기사.


“놈의 이름이 뭐였지?”

“하워드 인터필드, 남작입니다.”

황제의 입안이 깔깔해졌다. 주변에 기사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꼴이 제법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황제의 눈에 이채가 도는 모습을 보며 레오포드는 쐐기를 박았다.


“저는 올리비아를 데려올 테니, 폐하께서는 조금 더 판을 흔들어 주십시오.”

황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부강함을 위협하는 대공의 행보는 이미 많은 귀족들의 원성을 샀다. 좀 더 질 나쁜 소문을 첨가한다면, 비천한 백성들 역시 불안에 떨 것이었다.

그때, 제국의 아버지로서 그 모두를 품어 주는 건 제법 괜찮은 그림이었다. 황제는 태자를 다시 보았다.


“그래도 힘을 써야 할 때는 태자가 제대로 힘을 쓰는구나.”

더없는 칭찬에 레오포드가 빙그레 웃었다. 심해의 짙은 부분을 연상케 하는 바다 빛 눈동자가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곯은 곳은 깨끗이 도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오포드가 목울대를 울려 웃었다. 저를 대견히 여기는 황제가 우스웠다. 황후인 어머니 말대로 황제는 후일을 대비하지 못했다.

모든 면에서 저는 절대로 황제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었다.

특히나 생명력 하나 없는 초상화 따위 대신, 올리비아 그녀를 옆에 둘 것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휘어지던 눈매, 붉게 물드는 뺨과 어쩔 줄 몰라 하던 표정, 그리고 달콤한 향기까지.

생각할수록 갈급한 갈증이 레오포드를 휘감았다.

이제 곧, 만날 수 있겠지.

짙은 욕망이 묻어나는 중얼거림이 붉게 번지는 사이, 레오포드의 눈 위로 형형한 번뜩임이 이지러졌다.

* * *

늦은 밤의 대공성 현관 앞.

말의 뒤에 가벼운 짐을 실으며, 윈스터는 울적한 마음으로 대공성을 뒤돌아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위상이 높은 흑색의 첨탑 아래로 견고하고 단단한 대공성, 이곳을 다시 뒤로한 채 제도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발이 천근만근이었다.


“어떻게 제가 전하와 아가씨의 곁에서 떨어질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세누아의 계곡에는 저도 가야 합니다! 그 험준한 곳에서 기사 둘은 붙어야 아가씨를 호위할 수 있겠지 않습니까?”

 
세누아의 계곡을 탐험하는 무리에 제가 없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윈스터는 목소리를 높여 주장했다. 설득력 있는 말에 겨우 허락을 받은 게 오늘 오전이었다. 사전 답사도 제가 갔다 온 마당이었는데!


“……이게 다 내가 유능한 탓이지.”

디안은 피식 웃으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윈스터의 어깨를 감싸듯 두드렸다.


“중요도에서 밀린 거죠. 저는 무조건 계곡에 가야 하는 입장이고, 칼터 경께서는 안 가도 그만 가도 그만인 셈이고.”

사실 적시에 윈스터는 말없이 디안을 쏘아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우울한 얼굴로 다시 중얼거렸다.


“아냐. 무조건 나였어. 하여튼 이 잘난 얼굴 때문에 사람들이 술술 이야기를 하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호감형인 얼굴 덕에 그는 어딜 가든 쉽게 어울렸고, 뻔뻔한 듯 능글맞은 성격은 이야기를 터놓게 하기에 좋았으니까.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해 윈스터 역시 첨언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투덜대는 건, 브록이 나 대신 세누아의 계곡에 간다는 거야.”

“내가 못 미덥다고?”

배웅을 나왔던 브록은 충격받은 얼굴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설마, 내 충성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너의 충성심 때문에 걱정이라는 말이다. 이 자식아. 본분을 잊지 말아라. 네가 계곡에 따라가는 건,”

“안다고. 아가씨의 호위. 전하께서야 어련히 잘하실 텐데 연약한 아가씨를 호위해야지. 누굴 호위하겠어.”

브록은 귀에 징이 박히게끔 들었던 경고를 되새겼다. 그럼에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윈스터는 곱지 않은 눈으로 브록을 쳐다보았다.


“너도 수염만 싹 밀면 정보 모으기에는 딱인데. 나 대신 갈 생각은 없냐?”

“내 자랑거리 건드는 순간 전쟁이야.”

번뜩이는 살기가 맞부딪혔다. 워워-. 디안은 진땀을 흘리며 둘 사이를 중재했다.


“뭐, 브록이 가장 최근에 토벌을 다녀왔으니. 세누아의 계곡 근처로 다녀온 건 아니라도 경계의 현 상황은 누구보다 꿰뚫고 있겠죠. 너무 걱정 마십시오.”

디안의 말에도 윈스터는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마음속에 불안한 감정이 이상하게 일렁였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 가냘픈 목소리가 윈스터의 상념을 깼다.


“……고마워요. 윈스터.”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득한 아가씨와 대공 전하가 친히 배웅을 나서 주시다니!

윈스터는 활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께 두 번째로 맹세를 바친 기사로서 아가씨의 명에 따라 얼른 에딩튼 거리에 다녀오겠습니다!”

꼭 기다리시는 정보를 가져오겠다며 출발한 윈스터가 점처럼 멀어졌을 때에야, 에드윈은 기다렸다는 듯 올리비아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밤바람이 점점 쌀쌀해지네요. 얼른 들어가서 잠을 청해요. 올리비아. 우리도 아주 이른 시간에 출발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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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고요해진 밤이었다.

커튼을 단단히 친 터라 방 안은 어둠으로 꽉 차 있었다.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졸음기 하나 없는 눈이 말똥말똥 빛나며 방 안의 윤곽을 익혔다.

오늘이야말로 푹 자야 하는 날인데.

이른 새벽부터 출발을 예고한 에드윈의 말을 떠올려 봐도 이미 달아난 잠은 되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닥쳐서일지도 몰랐다.

엘킨 공작, 이십 년 전, 약, 마델레이네 공작, 그리고 엄마와 노파…….


“……이러다 계곡에서 졸면 위험한데.”

올리비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무심코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잠이 정말로 오지 않는 날이면 엄마가 불러 주던…….

순간 떠오르는 엄마 생각에 올리비아가 눈을 번쩍 떴다. 오늘만큼은 엄마를 정말 모르겠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순간 눈앞을 덮치는 눈부신 빛에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새까맣게 잠들었을 방이 환했다. 커튼도 치고 잤는데, 천장에는 반사되듯 반짝이는 빛이 번지고 있었다.

뭐지?

빛의 시작점을 찾아가던 올리비아는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천천히 목걸이의 마석을 손으로 들어 보았다. 손가락 끝에 닿는 마석은 평소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마석이…….”

작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은은한 초록빛으로 빛나던 마석이 빛을 잃었다.

서둘러 목걸이를 풀어 유심히 마석을 들여다보았지만, 언제 빛을 냈냐는 듯 마석은 투명한 윤곽만 드러낼 뿐이었다.

* * *



“올리비아. 언제든 멈추고 싶으면 말해요.”

“두 번만 더 말하면 열 번 채우겠어요.”

“백 번을 말해도 모자라요.”

진심 어린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못 말리겠다는 듯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두 새하얀 눈뿐인 이곳은 세누아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초입이었다. 어디에선가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났다. 계곡 쪽으로 오면서 계절은 급격히 가을에서 겨울로 바뀐 것만 같았다.

얼굴에 부딪히는 한기에 숨만 쉬어도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몸을 감싸는 마석의 온기도 찬기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함께 왔던 기사들에게 마차와 말을 모두 맡긴 뒤, 세누아의 계곡에 들어가는 이는 단 다섯. 에드윈과 올리비아, 그리고 베서니와 디안, 브록이었다.

계곡을 오를수록 길의 폭이 좁아졌다. 자연스레 한 명씩 줄지어 가는 행렬에서 에드윈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아요?”

걱정 가득한 에드윈의 눈에도 올리비아는 씩씩하게 웃으며 제 승마용 바지를 가리켰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에드윈이 디안을 향해 물었다.


“디안. 연기가 났던 곳이 어디 쪽이지?”

“그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디안이 쩔쩔매며 애꿎은 주변을 살폈다. 머릿속에 먹구름이 낀 듯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디안을 보며 베서니는 유심히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이 근처에 저와 같은 마법사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한번씩 바람이 불 때마다 베서니는 입고 있는 로브의 맨 위의 단추까지 꼭꼭 여몄다. 그러면서도 올리비아를 향한 걱정은 잊지 않았다.


“저야 목걸이 때문에 괜찮은데. 베서니 춥지 않아요?”

“맞습니다. 예전에는 베서니가 보온 마법 걸어 주었는데.”

디안의 투정에 베서니는 어림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력은 아껴야지.”

산세가 험준하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절벽일 줄은 몰랐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날카로운 계곡의 모습에도 올리비아는 힘든 내색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색할 새도 없이 이상한 기시감이 들어 왔다.

이따금 불어오는 이 서늘하고 앙상한 바람. 분명 어디에선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올리비아는 습관처럼 목걸이의 마석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

뜨거운 느낌에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잠시 마석을 놓친 채 바라보던 찰나였다.


“베서니, 저 이 마석이…….”

순간 이름 모를 힘이 올리비아의 목걸이를 낚아채듯 끊어 냈다. 무심코 손을 뻗던 올리비아가 아차 했을 때.

눈 깜짝할 새 그녀의 앞에 펼쳐진 건 깎아내리듯 무심한 낭떠러지. 그리고 그 아래로의 추락이었다.


“아……?”

저항 없는 탄식에 무심코 불안함을 느꼈던 에드윈이 뒤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올리비아-!”

아, 에드윈.

뛰어내리듯 제게 몸을 날리려던 에드윈이 브록한테 붙잡히는 게 보였다. 브록을 뿌리친 에드윈이 다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붉은 눈 위로 처절한 공포가 번지는 것을 보며 올리비아는 멍하니 웃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조금 더 웃는 얼굴을 보여 주고 싶었다. 거센 바람이 올리비아를 압박했다. 끝도 없는 추락에 숨조차 쉴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모든 게 암전인 가운데서 세상을 찢을 듯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쳤다.

조금 더 듣고 싶은데…….

.
.
.


“……요?”

물에 젖은 듯 먹먹한 소리들 사이로 앳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졸음이 몰려 왔지만 올리비아는 몽롱한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눈을 떠서 주변을 확인하고 싶은데 무거운 힘이 그녀를 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아 있는 걸까?

이제야 손가락 하나가 툭 하니 움직였다. 온몸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세요?”

앳된 목소리였다. 마법처럼 그 목소리 하나에 온몸을 짓누르던 기운이 사라졌다. 올리비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환하게 뜬 시야 너머로 보이는 건…….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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