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황궁의 건재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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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황궁의 건재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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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황궁의 건재함을 위하여
2023.05.03.
노을이 붉어진 시각. 대공성.
에드윈을 알아본 시종들이 대공성의 현관문을 열었다. 말에서 내리기 무섭게 다급히 뛰어온 에드윈은 올리비아부터 찾았다.
“아가씨께서는 엘킨 공작과 함께 작은 식당에 계십니다.”
가까이에 있는 시종이 바로 고했다. 당장 식당으로 달려가는 에드윈의 귓전에 기사의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가씨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기에 확인차 보고를 드린다는 게……!”
잠시 세누아의 계곡 초입을 다녀오는 틈을 타 엘킨 공작이 올리비아에게 독대를 청하다니.
그것도 올리비아의 어머니라니. 그녀를 혹하게 하기에 가장 알맞은 주제였다. 제 실책이었다.
빠르게 온다고 했는데, 세누아의 계곡에서 대공성까지는 오는 거리를 좁히지는 못했다.
다행히 돌발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식당의 문은 열려 있었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에요.”
문 사이로 들려오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명랑했다. 에드윈은 본능적으로 입술 위로 검지를 세웠다.
가주의 귀환을 알리려던 시종들이 숨을 삼키는 사이, 에드윈은 문가에 선 채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도에서 공작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저희 주방장이 더 공을 들여 만찬을 준비하려 했는데. 속이 안 좋으시다니 너무 아쉬워요.”
“가벼운 식사라도 주방장의 솜씨가 확연히 보이는군요. 아주 맛있어.”
문가에 등을 보인 엘킨 공작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적당히 예를 갖춘 대화였다.
가벼운 식사라는 말답게 벽을 등진 올리비아 앞의 식기는 많지 않았다. 벌써 식사가 끝났는지, 올리비아는 디저트를 권하고 있었다.
“맛이 좋을 거예요. 달콤한 초콜릿 무스를 바른 뒤 고소한 맛을 덧입혔습니다.”
가나슈. 올리비아가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고소한 맛을 즐기는 올리비아를 위해 주방장이 특별히 여러 견과류를 다져 흩뿌리는 별미.
하지만……. 에드윈은 느리게 고개를 갸웃댔다.
“아차, 공작님께서는 개암나무 열매 알레르기가 있으시다고 했는데.”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올리비아가 덧붙인 말에 쿨럭이는 기침 소리가 번졌다. 경악하듯 엘킨 공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무슨……! 의원을, 의원을 불러 주시오!”
엘킨 공작은 개암나무 열매 알레르기가 있었다. 온 제도에 소문이 난 사실을 올리비아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작은 식당은 평소 올리비아와 에드윈이 식사를 하는 식당은 아니었다.
햇빛이 들어올 수 없게 창문 하나 없는, 소리가 안에서 울리는 동굴 같은 곳. 오로지 천장의 샹들리에 조도에 의해 빛을 조절할 수 있는…….
“농담이에요.”
……분위기만으로도 우위를 점하기 쉬운 곳.
올리비아가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큼큼, 불쾌함을 내비치는 기침에도 올리비아는 시침을 뚝 떼며 디저트의 맛을 칭찬했다.
“영애께서는 내 생각보다 더 짓궂은 면모가 있으시군. 알레르기가 있는 이에게 그걸로 장난을 치다니.”
“어머나. 공작님께서 꾸미신 음해에 비한다면 약소하죠. 게다가 공작님이 언제나 상비약을 가지고 다니신다는 걸 모르는 귀족도 없는데요, 뭘.”
음해라.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완벽히 이해했다. 에드윈은 빙그레 웃으며 시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칸데르 대공 전하 드십니다.”
만찬이 아님에도 시종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 무대처럼 올리비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에드윈을 맞이했다.
“왔어요? 에드윈.”
“……전쟁 영웅,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에드윈을 보자 엘킨 공작은 사교적으로 웃었다.
능구렁이 같은 얼굴 아래 긴장감과 화가 들끓는 게 티가 났다. 하지만 조금 전 알레르기 걱정에 한바탕 기침을 하고 열을 내었으니 그럴 법했다.
“손님이 왔다고 해서 급히 달려왔는데, 생각해 보니 손님을 맞는 건 내 아가씨 쪽이 훨씬 능숙하겠어. 나라면 이렇게 알맞은 식당을 고를 생각은 못했을 텐데.”
추켜올리는 말에 올리비아가 수줍게 웃었다. 공작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것과 정반대였다.
“참, 제가 이곳으로 온 뒤 공작님이 첫 손님이시잖아요. 며칠 묵어가신다는데 에드윈, 괜찮을까요?”
“황송한 배려까지. 정말이지 괜찮습니다. 수행원들도 있는데 갑작스레 방문한 제 불찰입니다. 전하.”
엘킨 공작이 연거푸 손사래를 치며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올리비아의 말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에드윈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나 역시 나중에 공작을 따로 초대하려 했는데, 딱 적당한 시기에 왔어. 내가 가주가 된 뒤 첫 방문객이라 대접이 소홀하면 금세 소문이 날 텐데, 융숭한 대접은 못 할지언정 묵는 동안은 힘써야지.”
“방은 어디가 좋을까요? 에드윈. 공작님의 품위에 맞는 방을 드리고 싶은데.”
“저택에서 어딜 내어 주던 그건 올리비아 그대의 권한이죠. 올리비아야말로 이 대공성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데. 참!”
에드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점점 표정이 굳어 가던 엘킨 공작이 눈을 깜빡였다. 혹시나 다시 외부로 나간다는 걸까.
엘킨 공작의 얼굴에 헛된 기대가 서려서, 에드윈은 일부러 의뭉스레 말을 꺼냈다.
“올리비아도 안 가본 곳이 하나 있군요. 여기에서는 안 보이지만, 후원의 뜰 너머에 청백색 첨탑 기억나나요?”
“그럼요. 예전에는 돼지를 쳤고 지금은 헛간으로 사용한다고 했는데.”
“헛간이죠. 그 위에 귀족을 수감할 수 있는 고급 감옥이 있다는 걸 제외한다면 말이죠.”
순간 엘킨 공작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말은 누가 봐도 자신을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올리비아는 어쩐지 마음이 서늘해졌다. 황후를 배출한 대귀족에게는 절대 가당치도 않던 단어, 감옥이라는 말을 들먹일 수 있는 곳이 비칸데르령이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저자를 괴롭히라 부채질하는 것만 같았다. 에딩튼 거리의 사실 여부야 추후 확인하더라도 엘킨 공작이 제게, 그리고 마델레이네 공작에게, 그리고 어머니한테 한 짓은…….
올리비아는 고개를 젓고 순진하게 눈을 떴다.
“진짜요? 귀족을 수감할 수 있는 감옥은 황궁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비칸데르야 워낙 외부에서 침입하는 이들이 많아서, 선대의 선대 때부터 만들어 놓았다지 뭐예요. 나야 뭐, 워낙 영지 바깥으로 도는 일이 많아 갈 일이 없었고. 올리비아도 그렇고, 공작은…….”
말을 끝맺는 어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붉은 눈이 공작을 바라보는 순간, 엘킨 공작은 마치 포식자 앞에 선 작은 동물처럼 몸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아직은, 손님이니까. 그렇지?”
나직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둥글게 훑어 내렸다. 둥글게 찢어진 새까만 동공 위로 우악스러운 살기가 날름대었다.
소름이 확 끼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엘킨 공작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환, 대에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여긴 비칸데르령.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대공의 영역이었으니까.
.
.
.
“이런 기분이군요.”
응접실. 공작에게 침실을 안내한 뒤의 티타임이었다.
오랜만에 카드 게임을 제안했던 에드윈은 현란한 손기술로 카드를 섞으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올리비아의 짓궂은 매력은 나만 알고 싶었는데.”
그 한마디에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어디서부터 들었는데요?”
“개암나무 열매부터요.”
“클라이맥스를 들으셨네요. 아쉽게도 협박은 익숙지 않아서 말이죠.”
어깨를 으쓱하는 올리비아의 얼굴은 평소보다 유난히 쾌활했다. 동시에 여느 때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그 점이 더 사람 오싹하게 만들어서, 에드윈은 잠시 카드를 내려놓고 고백했다.
“엘킨 공작이 비칸데르령에 들어온 김에 솔직히 이야기할게요. 마델레이네 공작과 소공자, 그리고 제이드 마델레이네 경까지 지금 비칸데르령으로 오고 있어요. 어차피 출입 금지 명령을 내려 둔 터라 리브 모르게 돌려보내고 싶었는데.”
제도에서 들었던 출입 금지. 황족과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출입을 막는다던 에드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정말 출입 금지당한 자가 있었나요?”
“그럼요. 둘째 공자요. 올리비아가 화가 안 났더라면 그대로 출입 금지를 유지하려 했는데. 올리비아한테 맡겨야겠어요.”
올리비아는 가만히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제게 맡긴다는 말은, 이번 엘킨 공작처럼 성에 들이든 아니면 그대로 내치든 모든 선택권을 일임한다는 뜻이었다.
올리비아는 잠시 카드를 응시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옅은 숨소리가 응접실의 적막을 메우는 사이, 에드윈은 시간 차를 둔 채 다시 한번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먼저 에딩튼 거리에 사람을 보내 주세요.”
“에딩튼, 거리요?”
뜬금없는 환락가 이야기에 에드윈은 잠시 눈을 굴렸다. 다행히 에드윈은 지금 당장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목 안쪽에 성긴 가시라도 돋은 기분으로는 그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겠지만.
“네. 알아보고 싶은 소식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내일 아침, 에드윈과 함께 세누아의 계곡에 다녀오고요. 그러고 나서…….”
뜨거운 물에 얼굴을 담근 것처럼 숨이 막혀서, 올리비아는 부러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나서 결정하고 싶어요.”
“얼마든지요.”
에드윈이 씩 웃었다.
* * *
그리고 같은 시각.
“세율의 조정이 확정되기 전까지, 비칸데르에서는 광물에 대한 그 어떠한 세금도 일체 납부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황궁의 대회의실.
하워드 인터필드 남작은 정확히 스물다섯 번째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고약한 말이 어딨습니까!”
“감히 황제 폐하께 조건을 내거는 겁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워드를 둘러싼 귀족들이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똑같았다.
지겹기 짝이 없는 반복 속에서도 하워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감을 날카롭게 세웠다.
시끄럽게 난리를 피우는 대회의실의 귀족들, 그 와중에서.
“…….”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저를 바라보는 태자를 향해.
‘분명 들었을 텐데.’
그날, 대공 전하가 비밀문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분명 기척을 느꼈다. 그건 분명 태자의 기운이었다.
태자가 비밀문서를 앞세워 세율을 높이기 위해 회유할 줄 알았는데.
설마 비밀문서를 확보하고 나면 아예 세금 자체를 내지 않을 생각을 알아챈 걸까?
이제 비밀문서만 해결되면 황궁과의 연은 끊어지는 셈이니 어쩌면 태자는 더 머리를 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지금 제 생각이 태자를 단수 높게 보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얕잡아 보는 걸까.
짝짝-. 분위기를 환기하듯 태자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대화가 평행선으로만 흐르니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군. 인터필드 경. 그대의 주인이 원하는 광물의 세율이 얼마라고?”
“5%입니다.”
귀족들의 얼굴이 다시 시뻘게졌다.
“그러니까! 그 5%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지 않소!”
“현재 비칸데르가 바치는 광물의 세율이 72.8%인데!”
72.8%. 하워드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 어떤 곳도 광물의 세율로 72.8%를 바치는 곳은 없죠. 말씀해 주시지요. 데자일 남작. 가넷의 세율로 72.8%를 바치십니까?”
지목받은 데자일 남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다음에 이름이 불린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시선을 피하는 귀족들의 행렬에 누군가 용감히 외쳤다.
“비칸데르 대공가의 충정이 고작 이 정도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여태껏 이 정도나 바쳤다니.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정말 대단한 충정이지 않습니까?”
덤덤한 목소리 탓에 하워드의 말이 비꼼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크흠, 한 귀족의 헛기침이 크게 울리는 사이, 레오포드는 여전히 짙은 눈으로 하워드를 바라보았다.
* * *
황제 궁의 집무실.
“폐하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레오포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황제는 통유리 창 앞에 선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트리스탄의 곡물이 고작 저 정도밖에 없었다니.”
줄줄이 들어오는 짐마차들의 행렬은 생각보다 짧았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곡물을 보유하고 있다 한들, 광물의 세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며칠 새 몸의 시간은 십수 년이 흐른 기분이었다. 황제는 저만치 선 태자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래. 광물의 세율로 분노하는 귀족들을 흔들어 보겠다는 계획은 어찌 되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