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엘킨 공작, 그 거짓말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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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엘킨 공작, 그 거짓말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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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엘킨 공작, 그 거짓말과 진실
2023.04.30.
어린 시절 마델레이네 공작저에 있을 때, 올리비아는 저녁을 먹은 뒤 4층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층계의 벽에 기대선 채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등을 타고 내리는 한기에 움찔 놀라면서도 응접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동경했다.
훈훈한 온기와 도란도란한 대화, 발그레한 뺨을 쓸어 주며 웃는 화목하고 단단한 가족의 표상.
올리비아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던 것.
그래서 처음 사생아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올리비아는 아주 가끔 의아하다 생각했다.
아버지한테는 이미 사랑해 마지않는 공작 부인과 콘라드, 그리고 제이드와 에셀라가 있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떠한 일로 태어나게 된 걸까.
엄마는 어떻게 해서 아버지와 만나게 된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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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아니. 영애의 모친은 에딩튼 거리의 가장 끝자락에 살던 여인이었어. 초록 눈, 무희의 핏줄이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 소문이 자자했었지.”
에딩튼 거리. 제도의 환락가와 다름없는 곳.
그 한마디에 공녀는 사용인들을 내보냈다.
엘킨 공작은 서늘하게 얼어붙었던 간담을 쓸어내렸다. 아까의 담대함은 사라졌고, 지금 제 앞에 있는 건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여자애에 불과했다.
공녀의 눈빛이 묽어지는 사이, 엘킨 공작은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각색의 틀을 완벽히 잡았다.
가엾은 초록 눈의 여인과 하룻밤을 취한 채 매정하게 모른 척을 하는 대귀족.
물론 자신은 그 사이에서 가장 선한 입장이어야 했다.
“……사실 내가 영애의 어미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날 밤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나와 마델레이네 공작이 술을 마셨던 날이었는데 영애의 나이가 스물이니…… 이십 년 전이 되겠군.”
엘킨 공작은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 찻잔을 쥐고 있는 공녀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게 똑똑히 보였다.
“그날따라 마델레이네 공작이 과하게 술을 마셨어.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어. 영애도 알다시피, 공작은 늘 스스로를 통제하는 편이었거든.”
“…….”
“알겠지만, 천하다 손가락질받는 무희가 단 하룻밤이라도 마델레이네 공작과 같은 대귀족과 밤을 보내기는 쉽지 않지. 말하기는 거북하지만…….”
여기에서 엘킨 공작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얄팍하게 휜 눈매 사이로는 끊임없이 공녀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공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엘킨 공작은 고민하는 척, 쐐기를 박았다.
“……마델레이네 공작이 억지로 영애의 모친을 취한 모양이야. 그 정제된 공작의 술버릇이 그토록 저열할 줄, 누가 알았겠어.”
찻잔을 쥐고 있던 떨림이 한순간 멈췄을 때, 엘킨 공작은 숨을 흡, 들이마셨다. 찢어질 듯 올라가는 입가와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공녀가 흔들린 게 분명했다. 어떤 딸도 어미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덤덤할 수는 없었으니까!
“……귀족으로서 모범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 역시 그날 너무 취한 터라 미처 모르고 지나갔지. 그 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해, 공녀.”
“……제 어머니에 대해 아신다는 건 그게 다인가요?”
“그럴 리가!”
공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신이 난 엘킨 공작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흥분을 죽인 채 공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공녀의 초록 눈이 저를 마주하기만 한다면 핏줄을 타고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두 배는 커다래질 것 같았다.
“영애의 어머니가 죽기 전, 공작한테 편지를 보냈어. 그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마델레이네 공작의 이름을 알려 준 이가 누구겠어? 바로 나란 말이지.”
사실은 그 무희가 마델레이네 공작의 저택에 가 난리라도 치길 바라며 흘렸던 정보였다. 그날 이후로 에딩튼 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질 줄이야. 그것도 ‘누워만 있던 족쇄 같은 이’까지.
엘킨 공작은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보육원에 갈 때마다 따뜻한 후원자로서 으레 하던 것처럼 공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만약 영애가 홀로 그 터닝벨에 남았다 생각해 보게. 지금처럼 예비 대공비 대접을 받으며 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어?”
“…….”
“그러니 내가 영애의 인생 부분 부분에 도움을 주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오히려 탄생을 도왔지. 하지만 눈물겹도록 가슴 아픈 이 각색에서 그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마델레이네 공작만큼은 가장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델레이네 공작은 어떤가? 아비 노릇은 하나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영애를 이용만 했지. 섭섭하거나 미운 마음이 하나도 없다면, 그거야말로 영애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걸세.”
“…….”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외면하고, 면박을 주고, 심지어는 드레스마저도 작은 공녀와 차별을 두었지. 사실 잘못이야 공작이 했는데 말이야.”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에서야 공녀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멍한 초록색 눈에 순간 빛이 돌았다.
이거였다.
엘킨 공작은 심장이 벅차올랐다. 그럼 그렇지. 공녀야말로 해묵은 원망이 마음속에 가득 도사리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저는 지금 슬쩍 기폭제의 역할만 하는 것이었고.
“나라면, 영애처럼 이리 영특하고 아름다운 영애를 딸로 두었다면 절대 그런 취급을 하지는 않았을 걸세. 이리 총명하고 아름다운 영애를 딸로 들였으면, 그때부터는 못다 한 아비의 노릇을 했겠지.”
혀에 기름을 칠한 것처럼 이야기가 술술 나갔다. 어린 영애를 회유하는 것은 이렇게 쉬웠다.
엘킨 공작은 눈앞의 공녀가 아까 전, 제 간담을 졸아들게 만들었던 영애와는 동일인이라는 것을 잊은 듯 뱀처럼 간교히 그녀를 꼬여 냈다.
“그러니, 영애. 원한다면 말만 하시게.”
대놓고 말을 낮추던 엘킨 공작의 말 위로 격식이 생겼다. 동등한 거래를 표하는 은밀한 수단이었다.
“영애께서는 마델레이네 공작이 밉지 않으신가? 영애를 그토록 오랜 시간 홀로 둔 자한테 복수라도 하고 싶지 않으신가? 영애와 나는 이제껏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뜻을 같이할 수 있어요.”
엘킨 공작은 다정하고 교활하게 속삭였다. 눈앞에 촛불처럼 일렁이는 공녀의 마음이 읽혔다.
“폐하께서도 영애가 다시 원래 자리로만 복귀한다면, 마델레이네 공작보다 더한 힘을 주시겠다 약조하셨소. 하지만…….”
엘킨 공작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방 이곳저곳을 살폈다. 갈색 눈에 탐욕이 어른거렸다.
복도의 물건보다 훨씬 희귀하고 값어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늘 대공이 바치는 전리품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놈은 더 많은 것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광물 세율까지 생각한다면……. 엘킨 공작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울렸다. 공작은 최대한 티 내지 않은 채 다정히 말했다.
“……지금 앉아 있는 자리가 더 좋다면, 내게만 은밀히 말하시게. 나는 얼마든 다시 영애를 엘킨 공녀로 만들어 누구보다 굳건한 대공비의 자리를 약속할 수 있다네. 물론 폐하께는 말씀드리지 않고. 어떠한가?”
이제 보니 공녀가 손으로 감싸고 있는 저 찻잔조차 값어치 있어 보였다. 헤페르티의 보물일까, 아니면 세르아치족의 세공품일까. 만약 공녀가 ‘엘킨 공녀’가 된다면, 저 물건들 역시 제 손으로……!
엘킨 공작의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던 때였다.
“……마델레이네 공작님은 술버릇이 없으세요.”
엘킨 공작은 잠시간 눈을 깜빡였다. 공녀의 대답은 제 기대 속에 있는 답변이 아니었다.
구박당하며 살았어도 정이 있는 걸까. 하. 비웃음이 절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엘킨 공작은 안쓰럽다는 듯 공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영애. 그렇게 감싸 주지 않아도 됩니다.”
“감싸 드리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 제가 잘 알기 때문이에요. 공작님의 심혈관 질환이 그 엄청난 술 때문에 생긴 거니까요.”
제국 전체에 공작이 중증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문은 파다했다.
하지만 그 질환이 생긴 원인이 밤마다 마신 술 때문이라는 걸 아는 이는 제국에 올리비아와 전 집사, 단둘뿐이었다.
“헤이즐, 헤이즐…….”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벌게진 눈으로 중얼거리던 아픈 이름이 떠올랐다. 비틀대던 시선이 저를 바라보던 찰나, 쓰러지듯 잠들었던 것도.
“그래서 저는 만취를 하신 공작님이 강제로 여인을 안았으리라고 믿지 않아요.”
“……이봐. 공녀, 아니 영애. 애정도 안 준 아비라도 변호하고 싶은 모양인데,”
“전 집사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마델레이네 공작님은 술버릇이 없다,”
“아니, 이건 평소의 술버릇과는 다르지! 내가 약까지 먹……!”
아차. 이번에는 엘킨 공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연해지는 갈색 눈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순식간에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지금 공작님이 말씀하신 건, 그 당시 마델레이네 공작님의 술에 공작님이 어떠한 의도를 갖고 약을 타셨다는 뜻인가요?”
“공녀, 아니, 영애. 그게 아니고,”
“거기에는 제 어머니가 이용되었고, 따라서 공작님은 저를 지탄받는 사생아로 만드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셨다는 뜻도 되겠네요?”
올리비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한때 자신의 탄생에 대해 여러 가설을 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게…….
이건 너무 시시해서, 차라리 알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렇게 실망스럽고 허탈한 것이었다면, 그냥 묻어 둘 걸 그랬나?
올리비아는 잠시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로웰의 사제 귀족이라 추측했었던 엄마와 무희라는 오명을 쓴 엄마. 그 간극이 너무나도 커서 올리비아는 가빠 오는 숨을 삼켰다.
환하게 웃고 있는 기억 속의 엄마는 도대체 뭘 위해서 마델레이네 공작과 동침한 걸까?
저를 그토록 사랑했던 엄마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
그러는 사이, 엘킨 공작이 허둥지둥 일어났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나는, 나는 이만 돌아가 보겠네.”
“공작님.”
짧은 부름에도 공작은 큰 잘못을 한 이가 으레 그렇듯 놀란 얼굴을 했다.
엘킨 공작을 마주하자 올리비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게 화인지, 아니면 노여움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그녀는 버릇처럼 우아하게 웃었다.
“공작님께서는 제가 비칸데르에 온 뒤 처음으로 저를 방문해 주신 제국의 귀족이세요. 섭섭한 대접으로 배웅 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느낄 수야 없죠.”
“아니,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할 법한데…….”
“아니면 기다리셨다 대공 전하와 함께 첫 끼를 하시겠어요?”
“대, 대공 전하께서는 아직 제도에 있으실 텐데……?!”
“아, 모르셨군요?”
올리비아는 그럴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께서는 어젯밤, 그러니까 공작님보다 이르게 비칸데르에 도착하셨답니다. 아무래도 공작님이 그러하듯, 폐하께서도 공작님께 비밀을 만들고 싶으셨나 봐요.”
황제를 배반하던 공작의 모습을 비꼬는 신랄함에, 공작이 급박하게 외쳤다.
“자, 잠깐만!”
시간을 벌면서도 공작은 끊임없이 고뇌했다.
말도 안 돼. 황제가 저를 내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비칸데르라는 특수함은 엘킨 공작에게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황제가 저를 내칠 이유가 없을까?
불안과 초조가 엘킨 공작을 덮쳤다. 설마, 황제가 저를 배신한 걸까? 이 비칸데르에서 나가지 못하게 한 뒤 다시 마델레이네 공작과 손이라도 잡으려고?
엘킨 공작은 호탕하게 웃으려 애썼다. 기죽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결국 웃음의 끝은 애원으로 변했다.
“내가 하나 더, 그러니까 공녀의 어미에 대해 진짜 귀한 정보를 하나 더 알고 있다면 바로 돌아갈 수 있게 길을 터 주겠나?”
올리비아는 잠시 팔짱을 꼈다.
조용한 응접실, 반쯤 열어 둔 창문 너머로는 경계를 서는 기사들의 갑주가 서로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 뾰족한 소리가 예민함을 긁어내렸을 때, 엘킨 공작은 미친 듯 소리쳤다.
“노파! 공녀의 어미는 에딩튼 거리의 가장 싼 여관에서 노파를 모시고 살았어!”
순간 올리비아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노파라니.
제가 태어났을 때, 주변에 할머니는 아무도 없었다.
저건 거짓일까, 사실일까.
* * *
한편 풍요롭다던 곡창 지대 트리스탄.
트리스탄의 가신이자 영주 대리인인 자브론 남작은 허망한 얼굴로 창고를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다. 풍년조차 아닌 이번 해에 곡식 세율이 두 배나 올랐다는 것을. 이듬해까지 먹을 줄 알았던 곡식마저도 조금 전 떠나간 황궁 기사단에 의해 탈탈 털렸다는 것을.
“이렇게 비었으면, 우리는 추수 때까지 뭘 먹는데?”
뒤에 있던 가신 중 한 명이 중얼거리는 게 귀에 똑바로 박혔다. 남작은 잠시간 뒤에 선 이들을 바라보다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성녀의 재림이라 불리는 황녀가 영주라는 것만으로 여태까지 빈곤과 부당함을 참았던 영지민들의 얼굴에 동요가 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게 다 신문에 난 진정한 성녀의 정체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황제는 하늘과 같았고, 황녀는 성녀와 다름없었다. 그런 황녀가 사실은 성녀가 아니었다.
황제조차 믿지 못할 자였다니.
남작은 스스로가 한 생각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반역자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누군가 제 생각을 읽는다면……. 등골이 섬찟했다.
분명 황제 폐하께서는 깊은 뜻이 있으실 거였다.
하지만…….
남작은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닥친 현실 앞에서 황제에 대한 존경과 경외는 순식간에 먼지처럼 사라졌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영지의 책임자로서, 그는 망설이던 태도를 집어던진 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늘 답신이 없던 황녀를 향한 애원이 아니었다.
편지의 대상은, 은발의 시녀 아가씨.
- 올리비아 아가씨께.
그녀가 신문에 났던 진정한 성녀라면 답을 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