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 엘킨 공작의 방문 (121/151)


#121. 엘킨 공작의 방문
2023.04.26.



 


“……반가워요. 정 많은 묘한 후원자님.”

감격이 벅차서 무슨 말을 할지 몰랐는데. 저를 지칭하는 에드윈의 말에 올리비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볼을 타고 참았던 눈물이 떨어졌다.


“저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어요?”

“아니요. 풀네임은 걱정 많고 차갑지만 정 많은 묘한 편지를 보내는 후원자님이에요.”

에드윈이 맞았다. 제 이름 모를 기사님이, 정말, 제 바람대로 에드윈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우는지 웃는지 모를 애틋한 얼굴을 보며, 에드윈은 조심스레 올리비아의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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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난 뒤에야, 올리비아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가장 궁금한 걸 꼽으라면 이거였다.


“제가 리브 그린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판도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에드윈이 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맞잡은 손을 살짝 끌어당겼다.


“아쉽네요. 제가 먼저 알았기를 바랐는데. 에드윈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손목이 나았네요. 다행이에요.”

“말 돌리지 말고요. 숨겼다고 안 섭섭해할게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처음 만났을 때라면, 러헤이른 거리요?”

올리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드윈은 정정하려다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 그린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라는 것을 안 건 전쟁터에서였지만 그녀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얼굴은 몰랐으니. 저 해석이 더 맞는 듯싶었다.

그러는 사이, 올리비아는 말문이 터진 모양이었다.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말을 안 한 거예요? 저는 갑자기 편지가 끊어져서 되게 걱정했는데. 편지가 몰아서 한 번에 왔었나 봐요. 제도에서 편지를 건네받은 날이, 왜 그때 짐승 토벌을 나갔던 기사들을 맞이하던 연회 다음 날이요.”

종알대는 붉은 입술이 예뻐서, 에드윈은 나직이 웃었다.


“그 편지 보고서 한 번이라도 기사님 봤으면 해서 제도로 가려고 했거든요.”

부드럽게 웃고 있던 에드윈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때라면, 올리비아는 제가 편지의 상대였다는 걸 눈치 못 챘을 때였을 텐데.


“설마. 외간 남자가 보고 싶어서 제도로 간다는 말을 지금 내 앞에서 하는 건 아니죠?”

상냥한 듯 웃고 있는 얼굴이 조금 토라져 보였다.

이야기가 그렇게 들리려나? 잠시 고민하던 올리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조금 흔들었다.


“그 기사님이 에드윈이었잖아요! 에드윈이 말 안 해서 몰랐던 거니까 봐줘요.”

넘어와라, 넘어와라, 넘어와라.

속으로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에드윈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까워졌다. 훅, 하고 풍기는 향이 더없이 매혹적이라서 올리비아가 다음에 일어날 일을 방비하기도 전에.

가벼운 소리와 함께 뺨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충분히 봐드리죠.”

생글생글 웃는 에드윈의 예쁜 얼굴이 멀어졌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따라 웃었다.

아쉬움 가득한 마음을 누르기에는 웃는 게 제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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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올리비아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못 본 척하며 에드윈은 칼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밤이에요, 리브.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고요.”

“저는 아직……. 아, 제도에서 언제 출발한 거예요?”

“이틀 전이요.”

“이틀 만에?”

올리비아가 에드윈의 말을 따라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삼 일은 족히 걸린 거리를 단 이틀 만에 온다는 것은 한숨도 쉬지 않고 왔다는 것과 똑같았다.

조금 전까지 아쉬워하며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던 올리비아가 바로 일어났다.


“빨리 가서 쉬어야겠네요. 에드윈.”

복도는 적막했다. 저 멀리 연회장의 떠들썩한 웃음소리와는 정반대였다.


“아직도 연회가 안 끝난 모양이네요.”

“오늘 베서니가 먼저 과실주를 내놓았거든요.”

에드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하. 내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술인데.”

“아쉽지만, 세누아의 계곡에 갈 생각에 금주였답니다.”

세누아의 계곡에 갈 계획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금주라며 웃는 아가씨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상하게도 에스코트하는 길은 늘 짧았다.

방문 앞에 선 채, 올리비아는 잠시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며칠간 안 봤다고 이렇게까지 보고 싶어지다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잠시만요.”

어? 올리비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목 부근으로 다가온 손이 로브의 첫 단추를 툭 풀었다. 한적한 복도, 로브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뭐지, 왜 갑자기?

무슨 의도인지 알 길이 없었다. 유추하듯 뻗은 생각은 단정한 에드윈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올리비아의 두 뺨이 점점 붉어지던 때였다.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이렇게 얼굴이 붉어지실까? 나는 그저 리브한테 맡겨 둔 내 로브만 가지고 가려 했는데.”

……네?

올리비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생각도 못 한 답변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일부러 짓궂게 굴었으면서 에드윈은 그럴 의도 하나 없었다는 듯 금욕적인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로브를 집어 들며 말했다.


“설마, 나를 신사답지 못한 이로 바라본 건 아니겠죠?”

“……말을 하지 않고 단추부터 푼 것만으로도 오해의 소지는 다분했어요.”

여유를 부리듯 올리비아가 사실을 꼬집었다. 아가씨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에드윈은 빙그레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장난이 지나쳤어요.”

쉬이 풀지 않겠다는 듯 부풀린 뺨에서 사과 향이라도 묻어날 것 같았다. 에드윈은 진심이라는 듯 덧붙였다.


“결혼식 전까지는 더 이상 이런 장난도 안 칠게요. 그때까지 나는 훌륭한 신사로 살아갈 거거든요.”

그 결혼식이 당겨질 거라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은 사실이지.

에드윈은 미처 하지 않은 말을 숨기며 빙그레 웃었다. 탐하듯 짙게 가라앉은 붉은 눈이 가늘게 휜 눈매에 쏙 숨겨졌다. 신사다운 척을 하는 건 이제 익숙했다.


“잘 자요. 좋은 꿈 꾸고요.”

“잠깐만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에드윈이 무심코 뒤를 돌았다. 이내 팔이 당겨지고 무방비하게 낮춰진 시야에 보이는 건…….

긴장한 듯 예쁜 얼굴. 그리고 아주 달콤한 입맞춤. 지나치게 매혹적인 이 상황.


“에드윈도요. 잘, 잘 자요.”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는 얼굴이 붉었다. 탁,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드윈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다른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저 예쁜 얼굴만 다시 한번…….

그때였다.

어디에서 나타난 윈스터가 민첩하게 올리비아의 방문을 막아서듯 섰다. 에드윈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예전에, 전하께서 불한당이 될 것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 달라 하셔서.”

싸늘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흉흉하게 날이 선 얼굴을 보자 이틀간 죽어라 대공 전하의 옆을 달렸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주 훌륭하고 명예로운 기사를 두었어.”

“칭찬 감사합니다.”

이를 악물며 내뱉는 살기에도 윈스터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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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킨 공작이 대평원을 지나 비칸데르령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하군. 내 아가씨는 엘킨 공작과의 접점이 하나도 없었는데.”

에드윈은 제도에서의 봤던 엘킨 공작을 떠올렸다.

황후와 똑같은 머리 색에 뱀처럼 날름대는 시선이 거슬리기는 해도 크게 위협이 될 법한 이는 아니었다.


“어떤 목적으로 오는지 계속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마델레이네 공작가는…… 카탕타 자작령을 지났습니다.”

에드윈은 고개를 저었다.


“더 보고할 사항은?”

“마지막은, 디안이 아주아주아주 반성하고 있다고 꼭 말씀드려 달라고 합니다.”

윈스터가 덧붙이며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연무장을 돌고 있을 게 뻔할 디안을 떠올린 에드윈은 빙그레 웃으며 그대로 돌아섰다.

밤새 그곳을 돌라는 명백한 명령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윈스터가 환하게 웃었다. 한밤중, 사람 심장 철렁하게 만든 정도에 비해서는 가벼운 처분이었다.

* * *

한낮의 연무장.


“절대 저희는 세누아의 계곡 쪽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단장님께 출입 금지 구역에 대해 단단히 들어서 절대 그쪽으로는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누아의 계곡에 대해 묻는 질문이 떨어졌다.

일대를 맡아 수색했던 평기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규칙을 잘 지켰는지를 강조하기 위해 목청껏 소리쳤다.


“고생했어요. 알려 주어 고마워요.”

올리비아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낮의 태양 아래 그은 얼굴들이 붉어지더니 예를 갖춘 채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오늘따라 연무장의 열기가 과열되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도 모른 채 올리비아는 잠시간 에드윈의 말을 떠올렸다.


“……세누아의 계곡에 가죠. 나, 올리비아, 디안, 그리고 베서니. 다만, 가기 전에 먼저 최근에 짐승 토벌로 경계에 다녀온 이들한테 수상쩍은 점이 있는지부터 확인하죠.”

 


“아가씨. 시원한 주스라도 드세요. 차양 아래라도 더워요.”

골똘한 생각의 틈을 비집고 베서니가 차가운 주스를 가져왔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위험한 곳에 가려 했다는 사실에 대해 단단히 혼을 내던 베서니는 다 풀린 얼굴이었다.

올리비아는 배시시 웃으며 유리컵을 건네받았다. 다시 광산에 들른다는 에드윈이 떠난 건 한 시간 전이었으니, 그가 곧 돌아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까지 쓸 만한 정보를 알아내면 좋을 텐데.

잠시간 고민하던 찰나였다.

저 멀리에서 기사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대공을 찾는다는 기사의 오른쪽 가슴 앞에는 성벽 경계 기사라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성벽을 경계하는 기사가 대공성까지 올 게 뭐지?

올리비아가 기사를 불렀다.

아가씨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예를 갖춘 기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그…… 제도에서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불청객? 그게 누군데요?”

“엘킨 공작이라고 밝혔습니다.”

엘킨 공작이라니.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우습게도 마델레이네 공작가였는데. 올리비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에드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도 제가 엘킨 공작을 만날 이유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기사는 난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그게. 평소 같으면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하나가 걸려서 여쭤보러 왔습니다.”

“어떤 게요?”

“그, 엘킨 공작이…… 아가씨의 어머니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해서…….”

순간 모든 소리가 멈추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기사를 바라보았다.

문득 에드윈의 말이 떠올랐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던.

* * *

대공성의 복도.

성은 생각보다 더 화려하고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말끔히 닦인 통유리창과 모양을 잡아 늘어뜨린 커튼이며 협탁 위에 얹어진 장식품과 싱싱한 꽃들.

크림 빛의 환한 느낌에 비칸데르 특유의 붉은색과 검은색, 그리고 은색과 초록색의 장식이 조화롭게 놓인 게 제법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엘킨 공작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안내하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집사급도 아니고 고작 시종이라니. 손님 대접이 엉망이군.

하긴. 여긴 대공성이었다. 주인인 대공이 뭘 배웠어야 알겠지. 엘킨 공작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대공은 제도에 있을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놈을 단단히 붙들어 놓고 계시겠지.

그 틈을 타서 공녀를 회유하자는 제 작전은 술술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단단히 막아선 성벽의 기사들은 ‘공녀의 어머니’를 안다는 말에 황급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문 안에 공녀가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엘킨 공작님. 대,”

“오, 공녀.”

엘킨 공작은 과하게 반가운 척 목소리를 높였다.

말이 잘렸음에도 불쾌한 기색 하나 없는 공녀의 옆으로 중년의 시녀와 젊은 기사 둘만 있었다.


“아니지, 영애라고 해야 할까? 마델레이네 공녀라 부르는 걸 싫어한다고 들었소. 그런데 워낙 입에 안 익어서, 원.”

공녀는 인형처럼 빙그레 웃기만 했다. 간을 보느라 던진 말이 먹히자 엘킨 공작은 조금 더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대공성은 손님 접대가 엉망이야. 참, 여름 연회를 공녀가 주도했다는 건 들었는데. 그 대단한 솜씨로도 대공성을 지배하기는 아직 어려웠던 모양이지?”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공작님.”

성급하긴.

다짜고짜 본론을 듣고 싶은 심정을 내비치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 영애였다. 중요한 패를 감추고 있는 건 자신이었고.

엘킨 공작은 편안히 몸을 젖혔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것도 있긴 한데. 참, 여독이 꽤 있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생각이 안 나는군. 그런데…….”

엘킨 공작은 말끝을 흐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공성의 사용인들은 눈치가 없어. 이렇게까지 대화가 진전되는데 그대로 남아 있다니.”

“그냥 사용인이 아니라, 북쪽의 마법사입니다. 이쪽은 늘 제 곁을 지켜 주는 호위 기사이고요.”

북쪽의 마법사에 호위 기사라. 기사만 있다 해도 귀찮은 일이었는데 마법사라니. 엘킨 공작은 짐짓 불쾌한 얼굴을 했다.


“……그렇군.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할 이야기에 마법사와 호위 기사까지 필요할까? 나는 좋은 마음으로 영애한테 도움이 될 법한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 그렇게 서 있는 건, 꼭.”

엘킨 공작은 도발하듯 거드름을 피우며 덧붙였다.


“협박 같잖아.”

“협박이라니, 지금 감히 아가씨께……!”

“괜찮아요. 스젤린 경.”

뒤에 서 있던 기사가 불같이 화를 내려던 때였다. 빙그레 웃은 공녀가 뒤의 기사를 다독이며 화제를 돌렸다.


“비칸데르령에는 첫 방문이시지요?”

“큼큼. 그렇지.”

“어떠셨나요. 오시는 길에 눈은 즐거우셨나요?”

엘킨 공작은 웃음을 삼켰다. 귀족의 화법에서 가장 평이한 시작이었다.


“산세가 수려하더군. 물도 맑아 보였지.”

“이곳의 산세는 수려하지만 처음 방문하는 자는 백이면 백, 길을 잃을 정도로 높고 험준하답니다.”

“…….”

“성곽은 어찌나 견고하고 웅장한지. 동서남북 그 어떤 경계보다 튼튼하게 영지를 지키고 있죠.”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 보던 엘킨 공작은 미묘한 공기의 흐름을 간파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래서 제도에서 부르던 별칭이 철옹성이죠.”

어느새 나직해진 목소리가 공작을 압박했다. 사람 꿰뚫어 보듯 단단한 초록 눈이 초연하게 공작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제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 하여 문을 개방했습니다만……. 이 성문이 닫히면 공작님께서는 제법 오랜 기간 비칸데르령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시겠네요.”

숨이 턱 막혔다. 설마, 제가 뱀의 아가리로 들어오기라도 한 거라는 말일까?


“그게 무슨……! 공녀, 나는 프란츠 제국의 공작이야. 내가 없어진다면…….”

더듬거리며 말을 하던 공작은 제가 한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없어진다니. 이 어린 여자애가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가정을 하게 만든 걸까. 고작 분위기 하나 때문에?

이 분위기를 만든 올리비아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없어진다뇨. 그렇게 무서운 말씀을. 저는 단지 공작님께서 이 산세 수려한 비칸데르령에서 오래 묵으시면 어떤지에 대해 가정하고 있을 뿐인 걸요.”

가정. 그 가정이 실현이 될지는 엘킨 공작한테 달렸다. 그걸 반증하듯 서릿발같이 날카로운 눈이 빙그레 웃었다.


“……그사이에 공작님께 좋지 못한 일이 생겨도 아무도 모를 테고.”

엘킨 공작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참을 얕보았던 계집애가 저렇게 소름 돋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몰랐다.

엘킨 공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를 울리는 느낌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뭐, 이런 걸 두고 협박이라고 하는 건가요? 하지만 제가 협박 같은 거와는 거리가 멀어서 잘 모르겠네요.”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갛게 웃었다.

단번에 분위기를 전환하는 모습에 엘킨 공작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아니 올리비아. 저 작은 마녀 같은 계집이……!


“저는 공작님이 이곳까지 가져오신 이야기가 궁금하고, 공작님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제게 친절을 베푼다며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서늘한 초록색 눈동자가 뻣뻣하게 굳은 엘킨 공작의 자세를 훑어보았다. 기세등등하게 젖혔던 어깨, 교만하게 꼰 다리.


“……아직도 피곤하신가요?”

다정한 걱정에 엘킨 공작은 겨우 의자에 바로 앉았다. 엉거주춤한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훨씬 나아진 자세를 보며 올리비아는 빙그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래서, 제 어머니에 대해 아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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