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 이름 모를 기사님께 (120/151)


#120. 이름 모를 기사님께
2023.04.23.



 


“아니, 아가씨. 여기까지는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디안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가씨는 검 한 번 들어 보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당연히 기척을 숨기거나 읽는 법은 배운 적도 없으실 테고.

그런 아가씨가 매 시각 교대를 하는 기사들의 시선을 피해, 복도를 오가는 시녀와 시종들을 가로질러 어떻게 여기 일 층까지 오실 수 있다는 말이지?

혹시 성녀의 힘? 그런 거라도 가지고 계신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디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이었다.


“그야…….”

바람결에 실리는 목소리가 작았다. 디안은 한껏 아가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밀이죠.”

잔뜩 집중하던 디안이 벙찐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이건 대공성 경계의 허점입니다. 아가씨. 알려 주시면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었다.

허점이라기보다는, 올리비아의 습관이었다.

기사들의 경계 교대 시간을 읽어 내고, 시종 전용 통로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것.

마델레이네 공작가 사 층 다락방에 살 때부터 이어지던 습관은 황궁 시종들보다 황궁의 지리를 완벽하게 습득하게 했다.

그래야 남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에셀라를 만나고, 황궁에서 아무도 몰래 황녀의 명을 듣고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이걸 아는 이는 에셀라와 황녀, 그리고 시종들까지 많았지만 이렇게 놀라는 이는 없었다. 슬금슬금 장난기가 돌았다. 올리비아가 은근하게 운을 떼었다.


“정말 알고 싶어요?”

“예!”

“내 비밀을 함께하고 싶다는 거예요?”

“예, 아가씨께서만 괜찮으시다면. 딱 교육 용도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럼 일단 출발할까요?”

눈을 반짝이던 디안이 아차 했다. 맞다, 세누아의 계곡! 어떻게든 아가씨를 말려야 했다. 생각과 동시에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가씨, 제가 아까는 당황스러워서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세누아의 계곡이 이렇게 밤중에 잠시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무작정 말한 것 치고는 제법 좋은 변명이었다. 디안은 눈을 번쩍 뜨며 엄살을 떨었다.

아가씨는 비칸데르령에 대해 잘 모르니 백 퍼센트 통할 법한 말이었다.


“비칸데르령이 생각보다 훨씬 넓어서, 경계에 있는 세누아의 계곡까지는 마차로 꼬박 사 일이 걸릴 겁니다.”

“세 시간 거리던데요?”

“예?”

디안의 얼굴에 당황이 번져 가는 사이, 올리비아는 입고 있던 에드윈의 로브 안쪽에 넣어 둔 지도를 꺼냈다.

꼼꼼히 메모한 흔적이 가득한 지도를 보는 디안의 얼굴이 망연해졌다.


“이걸 어떻게…….”

“도서관이요. 이 지도 말고도 비칸데르령에 대한 모든 정보들이 다 있더라고요. 딱 세누아의 계곡과…….”

백수정 광산만 제외하고.

올리비아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곳은 진짜 위험합니다, 아가씨! 게다가 마차를 끌고 간다면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그러는 사이 디안은 다른 이유를 생각해 냈다. 아무리 세 시간 거리라도 마차가 없다면 소용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마차는 성문을 나가서 빌리는 건 어때요? 정원을 가로지르는 게 시간이 좀 걸릴 듯하지만, 나는 말을 못 타니 최대한 빨리 달려갈게요.”

“그게 무슨…….”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고 묻기에는 아가씨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산세가 험준해서 들어가기까지도 정말로 위험한 곳입니다. 아가씨……!”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가야죠. 디안도 내 비밀을 알고 싶다면서요.”

“이제 안 알고 싶어졌습니다.”

디안이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올리비아는 낮게 웃었다. 그리고 눈을 맞추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나를 도와줄 사람은 디안밖에 없어요. 수상한 곳이잖아요. 분명 다녀왔는데 기억이 나지 않다니. 그런 이상한 곳이 이 비칸데르령에 위치했는데, 확인을 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예 안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이미 디안이 들어갔다 왔잖아요.”

정곡을 찔렸다. 뜨끔한 디안의 얼굴에 올리비아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곧 에드윈, 아니 대공 전하가 오실 텐데. 그때가 되면 우리가 이렇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넘어온다, 넘어온다, 넘어와라.

디안을 바라보며 속으로 주문을 외웠던 게 통하기라도 하듯, 디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금방이라도 가자는 말이 나올 듯한 얼굴이었다.

정말 안 되면 제가 리브 그린이라는 걸 밝히면서까지 가 보려 했는데.

생각보다 잘 풀리는 상황에 올리비아는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그러니까 대공 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꼭…… 디안, 왜 그래요?”

올리비아가 잠시 말을 끊었다. 달빛에 비치는 디안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와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나직하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올리비아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 드윈?”

올리비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믿기지 않게도, 지척에 서 있는 이는 에드윈이 맞았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에드윈!”

에드윈이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디안과 올리비아를 번갈아 보는 사이, 올리비아가 다가와 와락 에드윈을 안았다.

품에 닿는 작은 몸이 서늘했다. 마석 목걸이를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에드윈은 올리비아가 추울까 그녀를 감싸듯 안았다. 그러는 사이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바로 볼 줄은 몰랐는데.”

에드윈이 느리게 웃었다. 손끝에 자수 감촉이 닿았다. 그리고 보니 올리비아가 입은 건 제 로브였다.

동시에 코끝에 닿는 달콤하고 편안한 체향이 기꺼웠다. 매달리듯 안긴 얼굴이 지독히도 사랑스러웠다. 작은 목소리까지.

못 보는 사이 그리워하던 모든 게 충족되고 있었다.

이 상황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판단할 일이었다. 지금 할 일은…….


“나도.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보고 싶었던 만큼 껴안아 주는 것밖에 없었다.

* * *

대공성의 응접실.

윈스터와 베서니가 디안을 맹렬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톡, 톡.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에드윈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에드윈을 보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백수정 광산의 비밀 문서는 가져왔는지, 황녀의 일은 어떻게 된 건지, 또 그 먼 거리를 오느라 피곤하지는 않았는지 등등.

하지만 지금 펼쳐지는 건.


“디안은 아무한테도 보고하지 않고 세누아의 계곡을 다녀왔었고.”

빙그레 웃는 시선에 디안이 고개를 숙였다. 붉은 눈이 올리비아를 향했을 때, 올리비아는 디안이 왜 아무 말도 못 했는지 바로 이해했다.


“올리비아는 그걸 듣고, 디안과 단둘이, 잠행을 가려 했다……. 이건가요?”

다시 말해서, 이 상황은 절대로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그게, 그러니까…….”

에드윈이 부른 건 애칭이 아닌 이름이었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등 뒤로 진땀이 났지만, 올리비아는 무작정 배시시 웃었다.

봐달라는 애교 섞인 웃음에 에드윈의 눈빛이 아주 조금 유해진 것만 같았다. 올리비아는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 위험한 곳이라니까. 먼저 한번 가 보고 에드윈한테도 이야기하려고 했고. 절대 계속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고…….”

변명처럼 말이 길어졌다. 올리비아는 이제야 디안이 왜 아까 횡설수설했는지는 절실히 이해했다.

에드윈이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려고 한 거네요?”

유해졌다는 건 제 착각인 모양이었다. 상냥한 얼굴과 달리 목소리가 점점 냉랭해졌다.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에드윈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저 지금 혼날 시점일까요?”

“왜요. 내 아가씨께서 생각하시기에 혼날 만한 일이라도 하셨나요?”

화사하게 웃는 얼굴 아래로 돌려 말하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처음 보는 에드윈이 낯설어서,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에드윈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어렵게 말문을 떼었다.


“만약 혼내려거든,”

고요한 응접실에 올리비아 목소리가 조용히 깔렸다. 발음을 일부러 뭉갠 듯, 그 누구보다 그녀의 대처를 예의 주시하며 귀를 기울이던 디안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떨어진 이후, 대공 전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다들 나가지.”

“예!”

아가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기회였다. 살 기회! 디안은 누구보다 씩씩하게 대답한 뒤 깍듯이 예를 갖춘 후 응접실을 나섰다.

반짝이는 희망만이 가득 차오르던 찰나였다.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콱 잡았다.


“디안. 이제 우리와 볼 차례지?

아, 맞다. 살기 어린 웃음의 베서니와 윈스터를 마주 보며 디안이 하하하, 우는 것처럼 웃었다.

.
.
.


“……둘만 있으면 안 될까요. 창피해서…….”

 
하, 진짜.

에드윈은 제 손안에서 꼼질대는 온기를 느끼며 탁한 한숨을 삼켰다.

말문이 막히게 깜찍한 짓을 해 놓고, 사람들이 나가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아가씨는 순한 사슴 눈이 되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많이 화났어요?”

“…….”

“……미안해요. 걱정시킬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냥 진짜 잠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에드윈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을 하던 올리비아는 무심코 에드윈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눈치를 보는 건 눈치를 보는 거였고, 습관은 습관이었다. 그제야 나직한 웃음과 함께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하죠?”

“제가요?”

올리비아가 일부러 눈을 깜빡였다. 지금 눈치를 보게 하며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건 에드윈이었다. 제법 적절한 반응이었는지 에드윈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갔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 좋지만, 리브. 위험한 건 안 돼요.”

얼마나 위험한 곳이기에 에드윈도 저런 말을 할까. 하지만 올리비아는 토를 다는 대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 속눈썹이 올리비아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충분히 반성한다는 얼굴이 귀여워서 에드윈은 조금 더 근엄한 척 말했다.


“우리 사이에 비밀을 만들려던 것도 섭섭하고요. 내가 리브 몰래 비밀이라도 만든다고 생각해 봐요.”

“그건……!”

올리비아가 잠시간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정말 너무했네요.”

무슨 변명을 하려나, 싶었던 에드윈은 여과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사람을 쥐락펴락한다.

이제야 조금 풀어진 듯한 모습에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옆에 바투 다가가 앉았다. 어떻게 하면 완전히 풀리려나. 곰곰이 생각하던 와중에 그녀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대조해 보지는 않았지만, 확신하는 것 한 가지.


“혹시, 제가 지금이라도 다른 비밀을 하나 털어놓는다면 에드윈 화가 완전히 풀릴까요?”

“말 돌리지 말아요, 리브. 아직 지금 것 안 끝났어요.”

엄한 목소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영민하게 그 사실을 알아챈 올리비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말 돌리는 게 아니라, 안 궁금해요? 제 비밀. 제가 제도에 올라간 이유인데.”

“리브가 제도에 올라간 이유요? 그거야…….”

생각도 못 한 주제인 듯 에드윈이 눈을 깜빡였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백에 구십구의 확률이었다.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바라보며 눈에 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만나고 싶은 분이 있었거든요.”

“만나고 싶은 분이요?”

“제가, 아주 오래전에…….”

큼큼, 올리비아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가족, 태자, 황궁……. 껄끄러운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목이 메곤 했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의미로 목이 메었다. 응축된 기대감이 조금씩 부피를 늘리기 시작했다.


“……제가 제이드 마델레이네 경을 위해서 헤페르티의 한 전장으로 구호품을 보내던 때가 있었어요.”

차마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턱 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매번 보내던 구호품에 대한 감사 인사 편지가 온 적이 있었어요. 처음 받아 봤거든요, 그런 편지. 솔직히 목숨 걸고 전장에 있는 분들이 겨우 구호품으로 감사 인사를 전해 올 줄도 몰랐고.”

“…….”

“기분이 이상했거든요. 그게 첫 감사의 편지여서.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감사의 의미로 답장을 보냈었는데. 편지가 주기적으로 오기 시작한 거예요.”

“…….”

“이름도, 얼굴도 모를 기사님이었죠. 정체를 밝히지 않더라도 제게 감사를 표해 주던 게 얼마나…….”

문득 편지와 함께 왔던 작은 꽃송이가 떠올랐다.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응접실의 적막 위로 에드윈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 응원 같은 소리에 올리비아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웠는데. 그런데 어느 날부터 편지가 끊어졌었어요. 반년 정도. 그 기간에 점점 걱정이 되는 거예요. 잘 살아 있는지, 어디로 갔는지, 혹시나 진영을 옮겼는지. 그러다가 점점 아쉬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

“진심으로 위로를 받았는데, 제가 기사님한테 보냈던 편지는 온통 다 거짓으로 포장된 일상뿐이라서.”

“…….”

“그래서 한 번쯤은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제도로 향했는데.”

말끝을 끌며, 올리비아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 며칠 전에 제가 그 기사님의 필적과 똑같은 편지를 받았지 뭐예요. 그것도 에드윈으로부터.”

이제야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는 듯 에드윈이 상냥하게 웃었다.

목울대를 울리는 그 다정하고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올리비아의 마른 기대 위로 물을 쏟아 주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올리비아는 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리브 그린이에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기사님.”

“……반가워요. 정 많은 묘한 후원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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