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 성녀, 예비 대공비의 잠행 (119/151)


#119. 성녀, 예비 대공비의 잠행
2023.04.19.


동이 터오는 아침이었다.


“짠-.”

끝났다는 듯 베서니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거울에 비친 올리비아가 환하게 웃으며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진주 가루를 흩뿌린 듯 반짝이는 은백색 드레스, 흑요석과 루비로 장식된 머리핀을 꽂은 뒤 머리끝에 컬을 넣은 모양새며, 우아한 턱선을 강조하듯 찰랑이는 백금 귀걸이와 사슴처럼 가느다란 목에 걸린 마석 목걸이까지.

뿌듯함으로 벅차올랐다. 이제야 아가씨가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괜히 코끝이 찡해져서 베서니는 슬쩍 농을 던졌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시래요? 아가씨께서 먼저 이렇게 단장에 힘을 주시고.”

“특별한 날이잖아요. 정식으로 귀환하는 날이니까.”

“그렇죠. 이제 다 왔죠. 비칸데르령에.”

베서니의 긍정에 올리비아가 배시시 웃었다.

목전에 비칸데르가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는 사이 베서니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식 만찬은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진행하겠습니다. 아휴, 아니지.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을 귀환 환영 행렬 때문에 오늘 내에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부터가 문제네요.”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칸데르령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뭐가 하고 싶으세요?”

“영지로 돌아간다면. 음…….”

대공성 사람들과도 할 이야기가 잔뜩이었고, 예니브 거리에도 가 봐야 했고, 초록 눈의 사람들도 만나 보고 싶었고, 이름 모를 기사와 에드윈의 필체도 대조해 봐야 했지만.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단 하나였다.


“……베서니. 혹시 세누아의 계곡에 대해서…….”

베서니는 마법사이니 같이 가면 좋을 것이었다. 슬쩍 운을 떼며 베서니를 쳐다보던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었다.

눈 깜짝할 새 사라지긴 했지만 조금 전 베서니의 표정은 심상찮았다.

아차.

실수했다. 하지만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베서니는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거길 어떻게 아세요?”

“아…….”

“그 위험하고 험준한 계곡을 아가씨께서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누가 아가씨께 거기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베서니의 미소가 짙어졌다. 구슬리듯 낮은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얼른 넘어가야 했다.


“그냥, 그…… 때, 지난번 만찬 때…….”

그리고 다행히 좋은 변명거리가 생각났다.


“만찬 자리에서 토벌 마치고 온 기사들이 그쪽 위험하다고 했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요.”

“그랬나요? 아무튼 기사들의 말대로예요. 그쪽은 광산 쪽과는 달리 정말 가파른 절벽 같은 곳이에요. 전 또, 깜짝 놀랐네요.”

베서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푸스스 웃었다. 철석같이 자신의 말을 믿는 모습에 양심이 찔려 왔지만, 올리비아는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베서니도 함께 가면 좋겠다는 계획은 전면 취소다. 베서니한테는 미안하지만 세누아의 계곡에 다녀오는 건 절대로 알리지 못할 비밀이었다.

올리비아의 생각은 꿈에도 모를 베서니는 명랑하게 박수를 짝짝 치며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자, 그러면 가실까요? 그나저나 디안이 식사 준비 되면 오기로 했는데. 얘가 어딜…….”

문을 열던 베서니가 피식 웃었다.


“타이밍 좋네. 디안, 잘……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본 올리비아도 깜짝 놀랐다.

문 앞에 서 있는 디안의 얼굴이 유난히 얼굴이 창백했다. 엄청난 충격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황급히 문가로 다가가며 물었다.


“스젤린 경,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 아가씨께서…… 성녀셨어요?”

성녀라니. 그게 무슨……?

더듬거리는 디안의 목소리를 뒤늦게 이해한 뒤,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설마 제가 리브 그린이라는 걸 알게 된 걸까?

늘상 칠면조를 먹을 때마다 ‘리브 그린’의 찬사를 쏟아 내던 디안이라면 ‘리브 그린’을 충분히 성녀라 지칭할 만했다. 아직 에드윈도 모르는 사실을 먼저 밝히기는 아쉬운데…….


“신문에, 다 났습니다.”

“신문이요?”

리브 그린의 일이 신문에 날 것까지는 없을 텐데? 이상하다는 듯 되묻는 목소리에 디안이 뒤에 숨긴 손을 앞으로 꺼냈다.

올리비아가 천천히 신문으로 손을 뻗었다.

신문을 건네받는 짧은 시간. 펄럭이는 신문, 그 위에 헤드라인으로 커다랗게 박힌 제목 속에 분명 올리비아, 제 이름이 있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었다. 올리비아가 신문을 빠르게 읽어 내리는 사이, 디안이 목을 긁듯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가씨께서, 춘궁기에 빠졌던 리테일 영지를 복구하셨다면서요.”

“정말요?”

베서니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조차도 신경 쓸 수 없었다. 신문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어떻게 밝혀진 걸까.

연회 때 황녀가 직접 밝혔다니. 그렇다 하더라도 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문에 나갈 때는 일부 걸러진다는 걸 올리비아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데.

설마, 이것도 에드윈이……?


“여름 연회도 다 아가씨께서 하셨던 거고, 트리스탄 곡창 지대의 풍년도 아가씨께서 주도하셨고. 구휼제 의견을 내신 것도 아가씨고.”

“아니, 근데 너는 왜 울상이야. 아가씨께서 하신 일이 밝혀진 거는 좋은 일이잖아!”

베서니의 말에서야 올리비아는 고개를 들었다. 디안의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했더니, 정말 그의 눈가가 붉었다.


“아가씨…….”

겨우 울음을 참듯 먹먹한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깜짝 놀라는 사이, 디안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제가 예전에 했던 말들, 그건 다 제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는 아가씨께서 좋은 분이라는 거 믿고 있었고, 맹세를 바치기 전부터 헛소리가 실린 기사들은 다 제가 찢어 버렸고…….”

횡설수설하는 변명에 베서니가 눈을 끔뻑거렸다. 너 지금 뭐 하냐는 시선에도 디안은 말을 멈출 줄 몰랐다.

이른 산책을 나갔다가 본 이 신문은 디안으로 하여금 과거의 제 입을 꿰매고 싶다는 충동이 들게 만들었다.

모르면 말을 말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셨던, 성녀 같은 아가씨를 고작 신문만 보고 매도하며 미워했었던 지난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디안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왜 남의 것을 탐내고, 티 파티에서 행패를 부리셨습니까? 왜……!”

 
동시에 올리비아도 언뜻 디안의 성난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중얼거렸다.


“아, 설마 그때. 나한테 왜 남의 것을 탐내냐고 했던 그 말이요?”

“네? 디안이 그런 말을 했어요?”

순간 나간 올리비아의 말에 베서니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디안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혼낼 새도 없이 울음을 참는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비죽이던 디안이 결국 고개를 돌렸다.

코 먹은 소리 후에 끅끅, 목울대를 울리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레 성녀가 되었다는 당황스러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올리비아는 참지 못하고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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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가 출발하고, 올리비아는 작은 걱정에 빠졌다.


“설마, 비칸데르령에도 소문이 났을까요? 제가, 이…….”

“아, 성녀시라는 거요?”

금세 볼이 홧홧해졌다. 올리비아는 큼큼, 헛기침을 하면서 베서니를 바라보았다. 빤히 올리비아를 보던 베서니가 빙그레 웃었다.


“뭘 걱정하세요. 다를 건 하나도 없는데.”

“네?”

“아가씨께서 리테일 영지의 춘궁기를 복구하셨든, 아니든. 트리스탄 곡창 지대에서 어떠한 일을 하셨든. 아니면 또 뭐더라. 하여튼, 아주 많은 선행을 베푸셨든.”

연하늘색 눈이 더없이 다정했다.


“그걸 알기 전부터, 초록 눈의 아이들을 비롯한 모두한테 아가씨는 이미 성녀 그 이상이셨잖아요.”

진중한 목소리가 올리비아의 마음을 울렸다. 할 말이 없어서, 올리비아는 입술만 달싹이다 웃어 보였다.


“……베서니. 어떻게 하면 그런 따뜻한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뭐, 오래 살다 보면요?”

베서니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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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햇빛이 반짝거리는 한낮.

미리 열려 있던 성문 너머를 보던 올리비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멀리서부터 쏟아지던 함성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고 생각은 했는데.


“아가씨! 무탈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예비 대공비 전하께서 귀환하셨어요!”

“저기 봐요, 비칸데르의 기사님들이에요!”

넓은 도로 양옆에 선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사람들은 환호와 함께 화사한 꽃을 던졌다.

환영 행렬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한 번 경험해 봤다고 해서 벅차는 감정이 수그러드는 건 아니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새하얘진 상황에서 올리비아는 저를 반기는 비칸데르령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뭐 해요. 바깥으로 손 안 흔들고.”

 
문득 떠오르는 첫 입성의 날.

그날 에드윈의 짓궂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라서, 올리비아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와-!

환호성이 한층 높아지는 것도.

펑-.

예쁘게 반짝이는 폭죽이 저를 위한 환영 문구를 쓰는 것도.


“아가씨!”

초록 눈의 아이들이 이 거리에 누구보다 잘 어울려서 웃고 있는 것도.

모두 제가 꿈꿔 오던 어느 날의 풍경이었다. 환하게 휘어진 올리비아의 선명한 초록 눈동자가 햇빛 아래에 반짝 빛났다.

* * *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식 만찬은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진행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베서니의 말은 거짓이었다.


“이야. 베서니 님이 과실주 통을 여셨다며?”

“아가씨 돌아오시고, 만찬도 먹고. 거기에 과실주까지? 오늘 무슨 날이래.”

“몰랐어? 사실 아가씨께서 성녀셨다더라! 이제까지 황녀가 다 아가씨께 일을 시키고 공적은 홀랑 가져간 거였대!”

창문 밖으로 기사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방.

침대에서 잠시간 여독을 풀기도 전에 들려오는 들뜬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잠시간 황녀는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괜히 먼저 온다고 했나, 하고 생각할 때였다.

똑똑-.


“아가씨를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받아, 모시러 왔습니다.”

디안이 환하게 웃으며 예를 갖췄다. 제복을 갖춰 입고 말끔히 머리를 넘긴 모습이었다.

그 들뜬 얼굴을 보며 올리비아가 짓궂게 말했다.


“울던 얼굴은 그새 사라졌네요. 스젤린 경.”

“아가씨!”

새빨간 머리 색만큼이나 디안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순진한 반응이 재밌어서, 올리비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들으셨어요, 아가씨? 오늘 베서니 님이 과실주 통을 연회장에 먼저 가져다 놓으셨다는 거!”

연회장으로 걸어가는 길.

디안은 흥분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재잘거렸다. 처음으로 아가씨를 에스코트한다는 긴장감과 과실주에 대한 설렘, 더불어 오랜만에 비칸데르에 돌아왔다는 기쁨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아,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혹시 아가씨.”

복도에 오가는 시녀들 외에 다른 기척은 없었다. 아가씨와 둘이 있을 기회는 몇 없었다. 디안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직까지 말씀 안 하신 비밀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저한테는 말씀해 주세요. 저는 정말 무조건 아가씨 편이니까!”

아가씨에 대해서라면 비칸데르령 전체에서 디안 본인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초록 눈의 공녀님에 대해서라면 제도의 기사들까지 다 스크랩했었으니까.


“비밀이야 많죠.”

은근한 목소리에 디안의 기분은 조금 더 고양되었다.

아무리 윈스터 칼터 경이 두 번째로 기사의 맹세를 바쳤어도 엄연히 아가씨의 호위는 자신이었다.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도 있잖아요.”

같은 로웰의 핏줄을 지녔다는 유대감도 있었다. 디안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찰나였다. 기회를 잡았다는 듯 아가씨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세누아의 계곡.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순간 디안의 들뜬 기분이 가라앉았다. 몸의 피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잊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듯 아가씨가 상냥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유감스럽겠지만 오늘은 금주예요. 디안.”

“……잘 못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디안은 제 귀를 의심했다.

빙그레 웃던 올리비아는 디안만 들리게끔 작게 무어라 속삭이더니 먼저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이내 화려한 샹들리에 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밟고 있는 연회장이 울릴 만큼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간 대공 전하께서 부재하심에도 맡은 자리를 훌륭히 빛내 주어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음성이 연회장을 울렸다. 이목을 휘어잡는 연설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작지만 누구보다 커 보이는 아가씨의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평소라면 가장 앞에서 경배하듯 바라보았을 디안은 영 집중을 못 했다.


“자정을 두 시간 넘긴 늦은 밤. 내 침실 발코니 아래, 1층 복도 바깥에서 봐요.”

 
스치듯 아가씨가 남긴 말이 계속해서 디안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설마……. 설마 정말로 그 위험한 세누아의 계곡에 가실 생각이실까.

아니, 그것도 문제지만 아가씨께서 비칸데르 대공성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어떻게 1층 복도까지 내려오실 수 있단 말인가.

디안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침실 아래로 내려오시기는커녕, 침실 바깥으로 나오는 것도 어려우실 거다. 비칸데르의 기사들은 철통같은 경계로 유명했으니까.

그는 근심을 떨치려 큼직한 칠면조 다리를 뜯어 한 입 먹었다.

근사한 풍미가 입안을 꽉 채웠다.

역시, 어떤 일이 있어도 칠면조 고기는 옳았다.

.
.
.

하지만 늦은 밤.

설마 하는 마음에 올리비아의 침실 아래로 내려간 디안은 기함했다.


“아니, 아가씨. 여기까지는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아가씨는 침실 아래에서 디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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