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총사령관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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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총사령관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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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총사령관의 무게
2023.04.05.
뜬금없는 질문에 코모데 백작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회의장 분위기는 살얼음이 낀 것처럼 얼어붙었다.
대공의 입매 끝이 느리게 올라갔다.
“비통해서 차마 대답을 못 하는 거라면 질문을 바꾸지. 그 아들이 살아 있을 때, 백작은 아들에게 무엇을 보냈나?”
“구, 구호품을! 구호품을 보냈습니다!”
기회였다. 백작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귀족들은 웅성거리며 동조했다.
“그렇지, 참. 코모데 백작도, 오델프 자작도 다 자식을 보낸 죄로 구호품이며 기부금을 넣었잖아.”
“맞습니다. 전하.”
한때 헤페르티에 구호품을 보내며 이름을 알리는 것이 들불처럼 번지는 유행이었다. 그 말에 대공은 빙그레 웃으며 코모데 백작을 응시했다.
“인터필드 경.”
“예, 전하.”
저를 주시하는 시선에 엉겁결에 대답을 하려던 코모데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대공의 측근인 하워드 인터필드 남작이 두 걸음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벽돌만큼이나 두꺼운 서류 파일이 두 개 들려 있었다.
“코모데 백작이 진영에 구호품을 보낸 적이 있었나?”
대공의 질문과 동시에 구호품을 보냈다고 나서던 귀족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하워드는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 번 있습니다.”
“구호품의 내역은?”
“당근과 감자 각각 열 포대씩입니다만, 아, 괄호에 ‘썩어 가는’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코모데 백작의 얼굴은 불쏘시개가 된 썩은 감자처럼 흙빛이 되었다. 하워드의 말이 끝나자 물소리조차도 커다랗게 울릴 것처럼 조용해진 회의장에서 대공이 빙그레 웃었다.
“아하.”
그리고 새삼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귀한 아들의 목숨값을 내놓으라 요구하고 있는 친애하는 코모데 백작은.”
소름 끼치도록 근사한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귀족들은 누군가 우악스레 제 어깨를 짓누르는 착각에 휩싸였다.
“그 귀한 아들의 몸을 가릴 갑주도, 창도, 말도.”
붉은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이 황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다못해 몸을 편히 누일 모포조차 보내지 않으시고.”
늘 공주를 닮았다 생각했던 얼굴 위로 선대 대공이 겹쳐 보였다.
“썩어 가는 감자와 당근을 보내셨군.”
새까만 머리카락, 붉은 눈. 내려다보듯 웃는 입매.
“제국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전쟁에 나간 아들한테 보낸 것 치고는 소박하군.”
시니컬하게 웃는 목소리까지.
“하긴 제국의 부유함이 지금만치 못하던 십여 년 전, 아무것도 없던 때보다는 나아졌지 않습니까. 폐하?”
대공은 지금 귀족들에게 빗대어 황제를 향해 묻고 있었다.
아무런 지원도 없이 맨몸으로 전장에 나섰던 선대 대공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서늘한 표면 아래로 불타오르는 증오심을 목도한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황제를 덮쳐 왔다.
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 얼마만큼 알고 있는 것인가.
“……그게 무슨 말인,”
“존경하는 폐하.”
창끝처럼 날카로운 눈을 하고도, 대공은 입속의 혀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저는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크나큰 책임을 느낍니다.”
총사령관.
이것 때문일까. 기어코 귀족 회의에 참석하겠다던 이유가 귀족들한테 제 아비의 죽음이 얼마나 고결했나를 떠들기 위해서?
“사람 된 도리로서, 총사령관으로서, 대공으로서 모든 면에서 말이죠.”
황제의 눈 위로 핏줄이 불거질수록, 대공의 미소는 짙어졌다.
“그래서 순국하고 피해를 겪은 모든 기사들과 봉사자, 의원과 간호사, 하다못해 전쟁통에 빵을 구하지 못해 아사할 뻔한 모든 백성들에게 배상을 하려고 합니다.”
이 와중에 화색이 되었던 귀족들이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귀족 가문이 아니라요?”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대공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다시 시끄러워지는 회의장에서 귀족들은 정해진 수순처럼 황제와 엘킨 공작, 마델레이네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 흐름을 기다렸다는 듯 엘킨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대공 전하, 헤페르티와의 협상에서 제국 몫이 된 배상금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지 않으셨습니까.”
“대공 전하께서 배상금을 받지 말자 하셨다고……?”
엘킨 공작은 단 두 마디로 대공을 적으로 돌렸다. 하지만 대공은 당황한 티 하나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엇이 걱정인가, 공작. 이건 비칸데르의 가주로서 내가 책임을 지려 하는데.”
“……!”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공가의 재정이…….”
모두가 충격을 받은 와중에 슬그머니 누군가 말을 꺼냈다. 표면적으로야 대공가의 재정을 걱정했지만 귀족들은 이 와중에도 대공가의 재산을 셈했다.
허울뿐이던 대공가가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건 무수한 보석들 때문이라고 했다.
광물에 관한 세금만으로도 풍요로운 다섯 영토의 세금을 압도한다는 대공가의 재산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찰나였다.
“재정이 어려워지겠지. 그래서 비칸데르 대공가에서는 공식적으로 현재 바치는 광물 세금에 대한 세율 조정을 황제께 요청할 계획이네.”
“……!!!”
모든 귀족들이 할 말을 잃었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으득 깨문 입술에서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부유하고 강건한 제국 프란츠.
그 밑바탕이 되는 세금의 세율을 조정한다니. 하지만 여태껏 대공이 깔아 온 명분은 귀족으로서 모범이 되는 일이었다.
“그건, 그저 비칸데르 대공가의 충심의 표현이지 않습니까. 갑자기 이렇게 세율 조정을 말씀하신다면…….”
“비칸데르의 충심이야 폐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실 테니. 그렇지 않으십니까?”
뼈 있는 말에 황제는 다시 한번 팔걸이를 힘주어 잡았다. 한 번 부서졌던 팔걸이가 위태롭게 느껴졌다.
대공은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황제를 향해,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 황제께서 허락하신다면 이제는 대공가의 가주로서 모범을 보여야죠.”
예법에 맞게 황제의 허락을 구하면서도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살육귀, 혹은 황제의 개라 암암리에 불리던 별칭은 씻은 듯 사라졌다. 스스로를 대공가의 가주라고 지칭하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고 위엄 있었다.
그 품위 있는 모습으로 대공은 환하게 웃었다.
“늘 모두를 굽어살피는 폐하를 본받아, 그리고.”
“…….”
“귀족으로서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여기 자리한 귀족들을 본받아 말입니다.”
비꼬는 투 하나 없는 진심이 비수처럼 귀족들의 입을 꿰었다.
에드윈은 찬찬히 귀족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슬픔을 운운하면서도 얼굴색이 좋은 이들과 자식 잃은 비통함을 설파하면서도 탐욕을 보이는 이들. 저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는 황제.
그 사이에서 유독 수척한 티를 내는 은발의 귀족이 있었지만, 에드윈은 쉽게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다 아, 뒤늦게 생색을 내듯 덧붙였다.
“아, 제 재산이 조금 나간다고 해서 대공가가 위태로워질까 폐하께서는 전혀 괘념치 마십시오.”
부유함과 관대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발언에 황제는 결국 쥐고 있던 팔걸이의 장식을 두 번째 부서뜨렸다.
그 망신스러운 소리에 에드윈은 킬킬 악당처럼 웃었다. 섬뜩하리만큼 붉은 눈은 오랜 원한을 대갚음하듯 날카롭게 번뜩였다.
“어차피 폐하께서 제게 주실 것은 고작 이 정도의 부스러기 같은 걸로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나른한 한마디의 파급은 컸다.
황제한테 뭔가 맡겨 놓은 것처럼 요구하는 대공의 모습에 귀족들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강력하던 황권, 그에 불응하는 부유하고 강한 대공.
태자도 자리를 비운 이곳에서 귀족들은 기울어진 추처럼 대공에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광산에 관해 덜 받은 서류는 오늘 저녁, 광물 세금 세율 조정을 할 때 받으러 오겠습니다.”
그 시선에 부응하듯, 대공은 또 한마디를 덧붙인 채 회의장을 나섰다.
* * *
“……무슨 일이 있어도 공녀를 데려오게.”
귀족들이 모두 나선 회의장. 황제의 읊조림에 옆을 지키고 있던 엘킨 공작은 머릿속으로 모든 계획을 변경한 채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혼자가 된 황제는 부러진 팔걸이 장식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반짝임. 굳건한 자신의 자리.
이 자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던 마델레이네 공작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일어나 대공에게로 향했다.
대공, 대공, 대공……!
황제는 홧김에 손에 쥐고 있던 장식을 내던졌다. 쾅-. 내던져진 장식은 바닥을 깨트린 채 두어 바퀴 더 굴러갔다.
“……원하는 게 결국 광산에 관한 문서인가.”
황제가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유함과 명분, 이 두 가지를 다 놓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다시 한번 제가 가진 비밀 문서를 탐독해야 했다.
그 안에 부디, 대공이 바라는 비밀이, 그를 제어할 목줄이 있기를 터무니없는 확률에 기대어 바라면서라도.
* * *
마델레이네 공작의 응접실.
차를 내온 헉슬리 경은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공작님이 대공 전하와 함께 차를 드신다니.
이 기묘한 만남에 응접실의 공기가 뾰족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궁금증이 돋았지만 헉슬리 경은 제 목숨이 소중한 것을 알았다.
헉슬리 경이 나간 뒤, 마델레이네 공작은 한참이나 찻잔 속 수색만 바라보았다.
시험하듯 저를 바라보는 대공의 눈초리에도 쉽사리 나오지 않던 말이 터진 것은 차가 식어 떫은 내음이 올라올 때였다.
“……그 애는, 잘 있습니까?”
공작은 아주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애라니. 공작이 내게 누구를 묻는지 모르겠군.”
선선히 독대를 받아 주었던 모습과 달리 대공은 능청을 떨었다. 마델레이네 공작은 이상하게 목이 탔다. 그리고 다시 한참 만에야 이름을 발음했다.
“……올리비아.”
“내 아가씨를 왜 공작이 걱정해 주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비칸데르령에 도착은 안 하셨겠지.”
선을 긋는 말이 아릿하게 느껴질 줄 몰랐다. 공작은 서둘러 다른 말을 꺼내려 했다.
마차조차 거절하고 홀로 걸어갔던 올리비아의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뒤로 공작은 한동안 올리비아를 생각했고, 종내에는 제가 하는 것이 걱정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에셀라라면, 제이드라면, 콘라드라면 했을 법한 수많은 걱정들이 쉬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공작이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대공이 빙그레 웃었다.
“세 부자가 나란히 휴가를 내었다는 소식은 들었어. 아버지의 날을 맞아 휴가라도 가는 모양이지?”
아마 대공이라면 목적지까지 알 것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공이 먼저 말했다.
“그 휴가지에 갈 때는 내 아가씨에 대한 생각은 그만 지우길 바라.”
차마 그럴 수는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권리를 주장하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새삼스럽다는 듯 공작을 바라보던 대공이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공작이 스스로를 어쭙잖게 아비라고 칭하지 않아 다행이야.”
.
.
.
에드윈이 공작의 응접실을 나왔을 때, 공작의 부관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고 윈스터는 어쩐지 심통이 난 듯했다.
“전하께서 공작의 독대를 받아 주실 줄 몰랐습니다.”
아하. 금세 심통의 원인을 드러내는 모습에 에드윈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혼자 수척한 꼴이, 궁금했거든.”
아주 사소한 호기심이었다. 때깔 좋은 얼굴들 사이, 혼자 고민을 껴안고 있듯 수척한 얼굴이 무슨 말을 할지.
“예?”
“뭐, 당치도 않았지만. 아무튼 윈스터, 이보다는 문서가 더 궁금할 텐데?”
윈스터는 금세 공작의 일을 잊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면 ‘그’ 비밀 문서는…….”
“오늘 밤에 세율 책정 때 가져오라 했으니. 두고 봐야지.”
“아니, 그 귀한 걸 대놓고 말씀하셨습니까?”
윈스터가 펄쩍 뛰었다. 그 모습을 보던 대공이 비스듬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 그 귀한 걸 대뜸 주는 이도 이 황궁에 있는걸.”
이상한 지칭이었다.
그제야 윈스터의 시야에 길의 모퉁이, 황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라도 주선하려는 듯 양산을 든 채 시녀 한 명만 대동한 황녀는 대공과 눈이 마주치자 아름답게 웃었다.
“대공, 잠시만 시간을…….”
“실례합니다, 전하. 제가 바빠서.”
백수정 광산을 올리비아한테 넘긴, 멍청하고도 고마운 실수에 대한 감사 인사는 정중한 거절로 치렀다. 제법 셈을 잘 치렀다 생각하며 걷던 에드윈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 보면 저 목을 으스러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황녀가 제게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닌가. 올리비아한테 한 짓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때, 윈스터가 목소리를 낮추고 보고를 시작했다.
“전하, 그리고 태자궁에 있는 마리아 에텔 있지 않습니까.”
“그 여자가 왜.”
“그게…….”
소곤대는 목소리가 이어짐에 따라 에드윈의 입꼬리가 빙그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