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흰옷을 입은 사제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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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흰옷을 입은 사제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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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흰옷을 입은 사제 귀족
2023.04.02.
반쯤 열린 마차의 창문 너머로 해가 뉘엿이 지고 있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편지를 꼭 쥔 채 마차에 몸을 기대었다.
‘이름 모를 기사’의 편지는 제 짐 가장 아래에 있었다. 에드윈의 편지와 ‘이름 모를 기사’의 편지에 쓰인 필체가 정말 동일한지는 비칸데르령에 도착해서 확인해도 늦지 않았다.
묘한 긴장감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베서니를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리면 좋을까……. 아, 가장 먼저 아가씨의 예쁜 초록 눈에 대해서 말씀드린다고 했었죠?”
지금은 로웰의 이야기를 들을 때였다.
준비가 되었다는 듯 초연한 초록색 눈동자를 보니 목이 메었다. 베서니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부러 쾌활하게 웃었다.
“초록 눈은 로웰의 왕족과 고위 귀족의 특징이라는 건 들으셨나요?”
“네. 에드윈한테……. 정말 제가 그러면 왕족이나 고위 귀족의 핏줄이었을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아가씨께서는 고위 귀족인 사제의 피를 타고 나셨을 거예요.”
“사제요?”
처음 듣는 단어인 것처럼 올리비아는 오랫동안 입속으로 단어를 곱씹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베서니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로웰이 와해되기 시작했던 때를 떠올렸다.
“네. 약 100여 년 전, 와해하기 시작했던 로웰이 50년 전에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까지 왕족을 섬기며 함께 로웰을 이끌었던 귀족들을 지칭하던 단어예요.”
“…….”
“사제 귀족들의 반은 화려한 차림을 했고 나머지 반은 늘 흰옷을 입은 채 베일로 얼굴을 가렸죠.”
베서니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손끝을 따라 반짝이는 빛이 마치 연극처럼 하나의 장면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요.”
이게 베서니가 보았던 로웰일까.
엄숙하고 간소하게 왕관을 쓴 초록 눈의 왕이 흰옷을 입고 얼굴에 베일을 쓴 자들과 함께 서 있었다. 흰옷을 입은 귀족들을 보호하듯 다른 귀족도 두어 명 서 있었다.
“저도 너무 어린 시절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로웰의 왕은 주기적으로 의례를 지냈어요. 무언가에 대한 예행연습이라고 들었던 것도 같아요.”
베서니의 기억의 부재인지, 의례라는 말을 붙이기에 미안할 정도로 그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베서니가 다시 손을 휘저었을 때, 의례는 점점 사치스럽게 변해 갔다.
“그런데 이 엄숙한 의례가 점점 변해 간 거예요. 향락에 빠진 귀족들이 점차 늘어 가며 사제 귀족 내의 비율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어느덧 흰옷의 귀족들을 보호하던 이들은 화려한 차림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흰옷의 귀족들은 점점 숫자가 줄어드는 반면에, 화려한 옷의 귀족들은 점점 늘어났다.
저들이 내 뿌리였을까.
저도 모르게 베서니의 마법에 집중하던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베서니. 저 화려한 옷의 귀족들은 눈 색깔이 연두색인데요?”
“네. 로웰의 사람들은 대부분 연두색이나 하늘색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던 베서니는 올리비아의 놀란 얼굴을 보고서야 제 환영에서 빠진 부분을 알아차렸다.
검지가 느리게 동그라미를 그리자 의례를 지켜보는 키 큰 귀족들 사이로 아주 작은 꼬마 한 명이 튀어나왔다.
“저는 그 당시에 아주 어린 꼬마였어서 사람들을 모두 올려다보아야 했는데 그러다 보면.”
마법 그림 속 연하늘색 눈의 꼬마가 어른들을 올려다보았다. 마법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 순간.
“흰옷을 입은 귀족들의 베일이 흔들릴 때마다 가려진 얼굴 속에서 선명한 초록 눈을 보았거든요.”
흔들리는 베일 속, 초록 눈이 또렷했다. 베서니가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마법을 끝냈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단언했다.
“감히 확신하건대, 아가씨의 뿌리는 바로 이 흰옷을 입은 사제 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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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옷의 사제들과 흰옷의 사제들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왕족과 사제 귀족들이 어떤 의례를 지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베서니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어린 시절이었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백수정 광산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도 알 수 있을 텐데. 제 마법으로 과거를 거스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하지만 아쉬워 보았자, 자신은 힘을 잃어 가는 마법사에 불과했다.
그나마 마석 목걸이를 보관하고 있던 시간이 길어서인지 이미 힘을 잃었을 로웰의 마법사들에 비한다면 아직도 마법을 쓸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 그 마석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 사실 공주님, 아니,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제게 목걸이를 주고 가실 때 처음에 당부한 말씀은 ‘꼭 초록 눈의 사람한테 전승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선대 대공비를 따라 하듯 베서니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그녀는 늘 초상화 속 말 없는 공주님한테만 했던 로웰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제도로 출발 직전에 말씀을 번복하신 거 있죠? ‘대공 전하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오면 전해 달라’고요.”
아련한 추억을 상기하듯 들뜬 얼굴이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처음 성에 오셨을 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초록 눈이라는 걸 들었긴 하지만 이렇게 선명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덕분에 저는 선대 대공비 전하의 유지를 이렇게 잘 수행했고요.”
신이 나서 말하던 베서니가 갑자기 말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다 멋쩍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을 중구난방으로 하고 있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올리비아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베서니는 정말로 로웰을 사랑했구나, 싶어서요.”
“그럼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제 나라였는걸요.”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 위로 그리움이 떠올랐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올리비아는 잠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열린 창문 너머로 호위를 하며 가까이에서 말을 타고 있는 디안이 보였고, 그 아래로는 어둠에 반사되는 제 모습이 보였다.
“왜, 언제부터 초록 계열의 눈은 천한 무희라는 낙인이 찍힌 걸까요?”
“천하다는 소문은 로웰이 멸망할 때부터였지만, 무희라는 낙인이 찍힌 건 아마도 현 황제가 태자였을 시절, 비칸데르령에 방문했던 직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현 황제가 태자였을 때라면……. 어림잡아 25년 전이다.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때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비칸데르령에 계셨나요?”
“네. 로웰 사람들이 여러 영지들을 전전하다가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이 비칸데르령이었습니다. 제가 비칸데르에서 살아온 지가 27년이네요.”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시간상으로는 황제가 선대 대공비를 본 뒤, 초록 눈의 사람들에게 무희라는 낙인을 찍었다는 가정이 충분히 성립한다. 예상외의 수확에 올리비아는 잠시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에드윈은, 언제부터 무희라는 소문이 퍼진지 모르고 있던데.”
“대공 전하께는 이런 말씀을 안 드렸어요.”
“왜요?”
올리비아는 바로 되물었다가 흠칫 놀랐다. 베서니는 말없이 창문을 끝까지 올렸다. 어둠에 반사되는 창문 위로, 증오감 가득한 베서니의 얼굴이 비춰 보였다.
“……도련님께는, 절대로 말씀드릴 수가 없었거든요. 황제가 공주님을 만난 뒤 헛소문을 퍼트렸다 말씀드리면…….”
“…….”
“당시 약혼녀까지 있었던 태자가 감히 공주님께, 어떤 제안을 했다 거절당했는지 따위를 금세 유추하실 게 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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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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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여관의 방.
“그럼, 푹 주무세요.”
잠자리를 봐 준 베서니가 나가기 무섭게, 올리비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촛불 하나를 켰다.
문 바깥에 호위 기사의 기척이 느껴졌다.
안전한 이 방에서, 올리비아는 불을 켠 채 책상 앞에 앉았다. 썩 질이 좋지 않은 펜과 종이가 전부였지만 새로이 얻은 정보들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했다.
100년 전 와해되어 가던 로웰이 50년 전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
왕족 외에 의례에 동행하던 흰옷을 입은 사제 귀족이 초록 눈이었다는 것.
무희라는 낙인이 찍힌 것은 현 황제가 태자일 때, 비칸데르령을 방문한 이후라는 것.
유려한 필체로 적은 정보들을 보던 중, 올리비아는 그 밑에 한 줄을 더 썼다.
마석 목걸이를 초록 눈에게 주려 했던 선대 대공비의 유지까지.
그렇다면 여기에서 풀리지 않는 건 하나다. 왜, 하필 무희일까. 황제가 경계한 게 무엇일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모든 글자를 머릿속에 새긴 뒤, 올리비아는 호롱불의 불꽃에 종이를 태웠다.
불꽃이 종이를 살라 먹으며 새까만 재를 내뱉었다. 그 모든 재까지 사라진 후에야 올리비아는 촛불을 끈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어둠이 가라앉은 방.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점점 시리게 가라앉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한편 여관의 바깥.
커튼 사이로 작은 불빛이 일렁였다. 그 빛을 보던 베서니와 디안은 서로 한마디씩 했다.
“내 저러실 줄 알았어. 어쩐지, 나를 그렇게 내보내려 자는 척을 하시더니.”
“저도요. 그러게 아가씨께 왜 자기 전에 그런 말을 하고 그러세요.”
“너도 잘 들었나 보네.”
디안은 베서니를 바라보았다. 마차 창문 너머로 조곤조곤 들려오는 목소리를 모두 들었다. 엿들은 것을 들킨 디안의 눈이 흔들렸다.
베서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어땠어? 나는 괜히 창문을 열었나 조금 후회하려는 참인데.”
그제야 디안은 베서니의 복잡한 표정을 읽어 내렸다.
일부러였구나.
디안은 베서니의 뒤를 따라 걸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았을 때, 디안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솔직히 로웰이니 뭐니, 저는 잘 모르겠어요. 비칸데르로 들어오면서부터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로웰의 공주셨다는 걸 알아서 그런가?”
뿌리를 찾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구원처럼 대공 전하의 눈에 띄어 비칸데르령으로 오게 된 뒤부터 저는 늘 비칸데르의 사람이었으니까.
“원래 가지고 있던 황제에 대한 적개심이 더 커질 것 같긴 한데.”
“…….”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도대체 왜…… 그랬는지가 궁금해요.”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 들리지 않아도 또렷했다. 베서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디안의 등을 툭 쓸어내렸다.
* * *
모든 귀족들이 자리한 귀족 회의.
“……해서, 이번 헤페르티와의 전후 협정은 따로 배상을 받지 않는 평화 협정을 맺어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콘라드가 무감한 목소리로 첫 안건에 대해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마자 테이블 곳곳에서 항의가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됩니다! 저는 헤페르티와의 전쟁으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저도 제 딸을 보냈습니다. 지금 제 딸이 멀쩡히 돌아왔는 줄 아십니까? 폐하, 재고해 주십시오!”
“폐하, 전범인 헤페르티의 복구를 돕다니. 아니 될 말씀입니다.”
구역질 나는 소리였다. 지금 귀족들이 말하는 그 애틋한 자식들이 버릴 패나 다름없었던 사생아였다는 것을 제이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전쟁이 승리하면 저도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겠죠?”
희망 어렸던 목소리가 떠올라서, 제이드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사이, 귀족들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협상이야 협상단만 참여한다지만, 배상금은 엄연히 자신들한테도 돌아올 몫이었다.
귀족들은 황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문 황제에게서도,
“어허. 황제 폐하께 이 무슨 무례한 언사요!”
으름장을 놓는 엘킨 공작에게서도, 아무런 말 없는 마델레이네 공작한테서도 얻을 것은 없었다.
결국 귀족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대공이었다.
전쟁의 주역. 분명 배상금에 대해 누구보다도 관심이 지대해야 할 고위 귀족.
“대공 전하, 전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는 제국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대공 전하께 도움을 보태기 위해 자식을 보냈습니다!”
황제파 중 코모데 백작은 숫제 흐느낌을 섞어 말했다.
아들 둘, 딸 둘의 단란한 가족의 가장인 그는 나루터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빌어먹던 사생아를 찾아 방계로 입적시켜 전쟁터로 보냈다.
“그런 아들이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저희의 비통한 심정은 차마 말로 못 할 정도였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정말 비통해진 기분이었다. 이 원통함이 죽은 아들이 아니라 눈앞에서 멀어지는 배상금 때문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대공 전하, 무슨 말씀이라도…….”
“코모데 백작.”
나른한 목소리가 백작을 불렀다. 옳다구나. 백작은 얼른 대답을 하며 대공을 향해 몸을 낮추었다.
“예, 전하.”
“그 아들이 주검이 될 때, 백작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