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누군가를 위한 마지막 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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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누군가를 위한 마지막 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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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누군가를 위한 마지막 기회 (2)
2023.03.29.
마리아 에텔은 신음을 뱉었다. 침대 위 이불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자 경직된 몸이 조금 풀어졌다.
눈물 범벅이던 눈앞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천장의 무늬와 침대 머리맡의 캐노피 레이스가 레오포드의 침실과 달랐다.
어떻게 옆방으로, 침대로 왔는지도 모를 정신이었다.
부르고도 한참 만에 온 주제에 침대에 눕히는 것이 끝이라는 듯한 시종의 태도는 무성의했다.
“궁의를 부르겠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엉망이 되었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숨을 참았던 마리아 에텔은 흐느낌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그나마 궁의를 불러 준다는 게 다행인 건가. 요즘 들어서는 그녀의 명을 무시하는 시녀들이 태반이었으니까.
그녀는 판판한 배를 쓸어내렸다. 미약한 통증이 느껴져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아픔은 처음이었다. 아니 이런 비참한 처지 자체가 처음이었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한탄 같은 혼잣말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리아 에텔은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갇혀 있을 아버지, 모든 업무가 마비된 상단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 오라버니들. 저를 추앙하던 영애들, 그리고…….
“너 때문에, 올리비아가 나를 떠난 걸까? 아니면 나 때문에?”
마리아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울리는 가운데에서도 잔불처럼 남은 레오포드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모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마리아 에텔은 태자 궁에 갇혀 있던 내내 했던 후회를 되풀이했다.
“아가씨. 태자 전하를 너무 믿지 마셔요. 지고하신 그분도 그저 남자,”
레오포드와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밤마다 유모가 했던 말이었다.
“유모. 레오포드는 달라.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 오늘만 해도 약혼녀인 공녀도 내팽개친 채 내게 왔잖아.”
고귀한 후작가의 영애한테 하기에는 지나치게 저속한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마리아 에텔이 이 말을 기억하는 건 어느 순간부터 붙은 다음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가씨, 가장 확실한 건 남자의 사랑이 아니라 확고한 후계랍니다.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유모의 말이 맞았다. 남자의 사랑 따위는 허황되기 그지없었다. 그때 그렇게 넘기지 말고 유모의 말대로…….
“후계가 있었다면 좋…….”
야트막한 울먹임이 순간 끊어졌다. 눈물이 괴었던 마리아 에텔의 푸른 눈 위로 섬광이 지나간 건 찰나였다.
설마, 설마…….
마리아 에텔은 본능적으로 제 배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 보니, 제가 마지막으로 달거리를 한 게……!
그녀의 푸른 눈에 희열이 번졌다. 늘 아쉬워했던 일이 이 순간 기적처럼 일어나다니. 언제지? 레오포드한테 애정 담긴 손길을 받은 지도 한참이 된 것 같은데.
아니,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모든 게 단번에 이해되었다. 처음 느껴 보는 통증, 좋지 않았던 몸, 이상한 기분들. 왜 이제야 발견한 거지, 싶을 정도로 모든 단서들이 그녀 주변에 흩뿌려져 있었다.
태자궁에서 멸시를 받으면서 지낸 며칠간, 귀한 태를 진작에 품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라도 제발, 간곡히 빌기도 했다. 레오포드가 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을수록 더욱더.
이제 이 배 속의 맥은 이 황궁에서 저를 다시 고귀한 위치에 올려 줄 것이었다.
“황궁의가 도착했습니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에 무심코 들어오라 승낙하던 마리아는 표정을 굳혔다.
아무리 제게 비장의 수가 있다 하여도 지금 이 상황은 전적으로 제게 불리했다. 올리비아를 태자비로 추대하려는 세력은 컸고, 황녀는 저를 미워하며 또…….
비상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에는 그녀의 화려한 재기를 위한 방법이 가득했다. 동시에 마리아는 들어오는 황궁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예?”
“와 주어 고마워요. 하지만 조금 쉬니 나아져 따로 진료는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우아하게 말하는 마리아 에텔의 모습은 보통의 영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뒤따라 들어오던 시녀는 더 당황했다. 분명 요 며칠의 마리아 에텔은, 아니, 조금 전만 해도 그녀는…….
“예? 하지만 조금 전까지 편찮으시다고…….”
“됐대도!”
날카롭게 소리치는 모습은 정말이지 기세등등하던, 사랑받던 과거의 마리아 에텔과 똑같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몇 주 전으로 돌아간 그녀의 모습에 시녀는 황궁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한숨 섞인 소리와 함께 황궁의가 먼저 나갔을 때에서야, 마리아 에텔은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털을 바싹 세운 듯한 제 모습을 겨우 누그러뜨렸다.
이 황궁에는 믿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다. 벌써 그럴 리 없겠지만 태동처럼 손바닥을 울리는 듯한 이 힘찬 맥이 안정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게 알려진 후에는…….
마리아 에텔은 문가를 노려보았다. 표독스러운 눈빛의 끝에는 모두를 향한 저주가 묻어 있었다.
* * *
“그래? 마리아 에텔이 황궁의의 진료를 거부했다고?”
“예. 폐하.”
“퍽 이상하군. 그리 날뛰다가 갑자기?”
황후 궁의 응접실.
거울을 들여다보던 황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서리가 끼듯 차가워지는 공기의 흐름에 태자궁의 시녀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수상쩍지만, 안 그래도 며칠 동안 기분이 널을 뛰듯 난동을 부렸기에……. 다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답변을 들으면서도 황후의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짙은 화장으로도 퍽 수척해진 눈두덩이를 가릴 수는 없었다. 황후의 표정을 눈치챈 오프템 후작 부인은 화장을 맡던 시녀를 밀어낸 채 부드러운 브러시로 황후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고운 분홍빛이 배로 감돌자 황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마리아 에텔을 제대로 확인하고 있는 게 맞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매 시각, 매 순간, 모든 식사에 심지어 차까지.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도 깊이 잠들기만 하면 황궁의를 부를 예정입니다.”
목소리를 낮춘 보고에 황후는 그제야 걱정을 거두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시선으로 한곳을 바라보며 흥, 코웃음을 쳤다.
“황녀가 내일 있을 연회의 마지막 티 파티를 다시 맡을 예정이야.”
“예. 폐하.”
오프템 후작 부인도 똑똑히 들었다. 황녀의 유모가 걱정스레 보고하던 말을.
그 염려가 소소하지는 않았다. 황후께서도 그것을 알기에 지금처럼 모든 것을 대비하셨고 말이다.
황후가 나긋이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적어도 사절단을 배웅하는 그 자리에서는 마리아 에텔이 날뛰지 못하게 제대로 확인하게."
그건, 모두가 바라는 일이었다. 시녀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폐하.”
* * *
“어떻게 방법이 없는가!”
한편 헤페르티와의 마지막 협상이 끝난 뒤.
황제 궁의 집무실에서는 억누른 분노가 새어 나갔다. 시종장은 서둘러 엘킨 공작만 남겨 둔 채 집무실을 나섰다.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하…….”
탄식을 해 봐도, 답답한 숨을 뱉어 봐도 협상을 되돌릴 길은 요원했다. 제국에 막강한 부를 가져다줄 줄 알았던 협상에서 남은 거라고는 고작 허울뿐인 명예였다.
“평화 협정에 걸맞은 협상이었을 뿐, 제국은 헤페르티의 빠른 복구를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너그러운 처사를 보여 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대공의 말에 헤페르티 사절단은 대놓고 눈물을 보였다. 그 자리에서 비스듬히 웃었던 자는 대공뿐이었다.
귀족들은 제 몫으로 들어왔어야 할 막대한 배상금을 생각하며 황제를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냈고, 헤페르티의 사절단은 감격의 눈물만 쏟아 냈다.
하지만 황제를 오싹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이제 황제에게 대공을 묶어 둘 방법은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었다.
악다문 잇새로 후회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갔다.
평생토록 백수정 광산이, 비칸데르 대공이 손아귀에 있을 줄 알고 여유를 부린 게 통탄스러웠다. 황녀와의 혼인을 준비할 게 아니라 더 많은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천년만년 제 것일 줄 알았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사라졌을 때, 황제는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지금처럼 분한 마음을 삭여야 했다.
그렇다고 몰래 백수정 광산에 접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광산에 저항 마법을 걸어 둔 이는 다름 아닌 황제 본인이었으니까.
“그게 누구든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 백수정 광산에 들어갔다가는 벼락에 바싹 튀겨진 비둘기구이 신세가 되게끔 저항 마법을 걸어 두었습니다.”
자신만만하던 마법사의 목소리는 이제 황제 자신에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옴짝달싹 죄인 상태.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공주의 눈을 빼닮은 공녀가 광산에 숨겨진 게 무엇이든, 발견하지 못하게 비는 방법. 쓸모없는 패라 버린 황녀가 제발 무슨 짓이든 해서라도 광산을 되찾아오는 방법.
끙.
하지만 모든 게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믿었던 태자는 어딘가 넋이 나간 듯 협상을 내팽개쳤으며, 마델레이네 소공작은 협상이 비칸데르 대공에 의해 이상한 방향으로 끌려가는데도 중재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황제파의 든든한 수장이었던 마델레이네 공작은…….
“협상을 되돌릴 기회에서 마델레이네 공작은 오늘도 입술에 아교라도 바른 모양새였습니다.”
“……말조심하게 공작.”
의례적으로 말조심을 시켰지만, 엘킨 공작이 하는 말 그대로였다.
황제는 혼란스러움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늘 충직하던 마델레이네 공작이 무슨 연유에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폐하. 헤페르티와의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 와중에 마델레이네 공작은……! 안 그래도 마델레이네 공작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엘킨 공작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황제와 엘킨 공작 단둘인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들을 이도 없건만, 엘킨 공작은 부러 목소리를 낮춰 제 말에 황제가 완전히 집중하길 바랐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통했다.
“뭐라?”
황제가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집무실의 책상을 내려치며 일어났다. 그리고 초조함에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공작과 소공작, 둘째인 마델레이네 경까지 다 함께 휴가를 냈단 말인가? 아직 사절단이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예, 폐하. 소공작과 경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마델레이네 공작 스스로가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공작 부인이 타계한 뒤 처음 있는 일 아닙니까.”
안 그래도 불안한 때였다. 엘킨 공작의 속살거림은 황제를 한쪽으로 기울게 하기에 충분했다.
“폐하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마델레이네 공작이 연신 대공한테 말을 걸려다 머뭇대는 모습을.”
“…….”
황제는 턱선을 쓸어내리며 침착하려 애썼다. 하지만 엘킨 공작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황제의 얼굴에서 고민의 기색을 읽어 낸 엘킨 공작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낮춘 채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부디 마델레이네 공작에 대한 생각을 재고해 주십시오. 파를 떠나 그자는 폐하께서 이끌어 가고 계신 제국에 이로운 이가 아닙니다.”
“공작, 말이 지나치오!”
“송구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 마델레이네 공작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허를 찔렸다. 발칵 성을 내며 마델레이네 공작을 두둔하던 황제가 멈칫했다.
황제는 협상이 끝나자마자 황급히 대회의실을 나서던 마델레이네 공작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이전과 다른 모습이 확연히 부각되며 황제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폐하께서 국사를 고민하시는 지금, 폐하의 곁을 지켜야 할 공작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 틈을 넓히듯, 엘킨 공작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후의 동복형제이자 귀족파의 기둥 같은 존재. 마델레이네 공작이 든든히 버텼다면, 이렇게 독대의 기회조차 많지 않았을 귀족파의 수장. 엘킨 공작은 단단히 결심한 듯 호흡을 가다듬더니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공작……!”
황제는 기함하듯 엘킨 공작을 불렀다. 맹세를 바치듯 꿇은 무릎이 굴종의 뜻이라는 걸 황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수장 가문과의 강력한 결속이라면, 저 역시 폐하의 검이 되기 위해 제 가문을 바치겠습니다.”
황제의 머리가 비상하게 계산을 시작했다.
에텔 후작이 감금된 뒤, 귀족파가 흔들리고 있다는 보고는 받았다. 이 굴종이 오직 황제를 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패는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공녀를 원하신다 하시면, 그 또한 제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나서겠습니다.”
“……공작이 뭘 어떻게 한단 말이오.”
시험하듯 떨어진 물음에 엘킨 공작의 입매가 천천히 올라갔다.
“대공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비칸데르령에 출입이 금지된 자는 무엄하게도 가장 고귀한 핏줄을 지닌 지고하신 분들과,”
그제야 황제도 연회의 첫날, 대공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엄하게도 비칸데르령에 누군가의 출입을 금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가 지칭한 자들은 황족과…….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것을.”
엘킨 공작은 부복을 하듯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로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말씀드렸던 대로, 제가 공녀를 만나서 황궁으로 데려오겠습니다.”
몸을 낮춘 귀족파의 수장, 그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이 시리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