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누군가를 위한 마지막 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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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누군가를 위한 마지막 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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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누군가를 위한 마지막 기회 (1)
2023.03.26.
“세상에…….”
멍이 빠지는 과정은 보기 좋지 않았다. 보랏빛 올리비아의 손목을 본 베서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터에 올리비아는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이게 멍만 든 거지 사실 하나도 안 아파요. 이상하게 저는 원래 멍이 오래가는 편이라고 예전에 들었던 것도 같은데.”
베서니가 고개를 들어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연한 하늘색 눈 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충혈된 눈 위로 분노가 올라왔다.
“이런 일이, 예전에도 있으셨어요?”
떨림 가득한 되물음에 올리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잘못 말했다. 다시 한번 변명을 해 보려는데, 베서니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겨우 올리비아의 손목을 만졌다.
“세상에……. 천하의 나쁜 놈, 불한당에 예의도 기사도도 없는 놈.”
세상에 그 누구도 태자를 그렇게 칭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염없이 목메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욕의 수위가 점점 올라갔다.
옆에 있던 디안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동시에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베서니. 그나저나 어떻게 왔어요?”
“내 정신 좀 봐. 저는 단지 아가씨께서…… 아니, 이게 급한 게 아니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베서니가 서둘러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도자기 인형을 다루듯 아주 조심스레 올리비아의 손목을 잡았다.
이상한 기운이 올리비아의 손목 피부 위로 스며들었다. 묘한 감각 위로 온기가 돌았다. 어디에선가 느껴 본 것 같은 친숙한 느낌이었다.
“이제야 조금 되었네요.”
코를 훌쩍이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손목을 다시 바라보고 눈을 깜박였다. 제법 오래 갈 줄 알았던 멍은 흔적 하나 없이 사라졌다.
“어떻게……?”
“힐링 마법이에요. 마력은 줄었어도 이 정도는 아직 거뜬하답니다.”
이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이 마법이라는 걸까. 올리비아는 잠시 손목을 훑듯 매만졌다.
그러는 사이, 베서니는 찬찬히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단정히 빗은 은발과 작고 예쁜 얼굴, 그 안에 말갛게 저를 바라보는 신비로운 초록 눈까지.
“……이제야 제도로 가실 때의 우리 아가씨 같으시네. 살은 또 왜 이렇게 빠지셨어요. 소벨, 고 녀석한테 그렇게 일러두었는데. 제가 진짜 광산의 비밀만 찾으면, 제도로 올라가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울음 섞인 그 말은 제도로 떠나기 위해 비칸데르에서 헤어질 때와 똑같았다. 올리비아는 활짝 웃으며 베서니를 껴안았다.
* * *
디안은 딴청을 부리며 언덕 위를 곁눈질했다.
반짝이는 녹음이 갈색으로 구워지는 울창한 나무 아래, 베서니와 아가씨의 대화는 들릴 듯 말 듯 전해져 왔다.
상급 기사들은 물론, 수련 기사들까지 모두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큰일이다. 비칸데르령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까 보셨죠? 저는 베서니 님 눈에서 불꽃 튀기는 줄 알았습니다.”
“뭐, 우리는 기도하는 수밖에 없지. 스젤린 경 한 명으로 넘어가 달라고.”
“하지만 아까 들으셨지 않습니까.”
몸서리치는 수련 기사의 모습 위로 베서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너희는, 돌아가서 보자.”
사람 간을 졸아들게 만드는 눈빛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던 베서니. 그 눈빛은 디안을 찔끔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 자신은 황궁에서는 아가씨의 손목을 못 봤던 걸까. 우울감에 고개를 숙이자 누군가 어깨를 툭 하고 두드렸다.
“힘내십시오.”
“…….”
“제가, 지옥까지는 같이 못가도 그 앞에서 작별 인사는 진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야!”
* * *
“베서니, 정말 여긴 어떻게 왔어요?”
“어떻게 오긴요. 마차를 타고 왔죠. 아가씨께서 오신다는 전보를 받자마자 급하게 출발했는데, 이러실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올 걸 그랬어요.
“그게 아니라, 베서니는 지금 광산에 있다고 들었는데.”
한창 비밀에 대해 연구하느라 성에도 잘 못 들어간다고.
그 말에 베서니는 가만히 올리비아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안 놀라셨어요?”
모든 것이 축약된 물음이었다. 제 눈치를 보듯 조마조마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올리비아는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안, 놀랐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왜냐하면.”
“…….”
“제가 선대 대공비 전하에 대해 알게 된 게, 그리고 로웰에 대해 알게 된 게 에드윈을 통해서가 아닌 태자 전하를 통해서였으니까요.”
태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무섭게 베서니의 시선이 다시 손목으로 갔다. 올리비아는 장난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베서니의 말이 다 맞거든요. 아주 나쁘고 제게 그 어떠한 예의도 갖추지 않는 분. 그런 분이 악의적으로 한 말에 아주 잠깐, 흔들릴 뻔했지만 결론은 안 흔들렸다, 이거죠.”
“아니, 악의적이라니. 태자가 아가씨께 무슨 말을 한 겁니까!”
별로 좋은 말이 아니라서 넘기려 했는데. 베서니는 분노가 들끓는 눈으로 다시 물었다.
어떻게 넘겨야 할까. 올리비아는 마석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씩 웃었다.
“어, 음. 이거. 주인을 대신하는 자한테 주기에는, 너무 귀한 보물이잖아요.”
“아가씨 그게 무슨……!”
“아, 정말. 태자 전하에게 이걸 자랑하고 왔어야 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숨겼던 게 아쉬워요.”
대용이라는 말에 베서니는 뒤늦게 펄쩍 뛰었다. 태자가 했다는 악의적인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챈 듯, 베서니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진짜, 제가 제도로 올라가면 소벨보다 태자부터 경을 칠 겁니다. 어떻게 그런, 그런 말을!”
파르르 몸을 떠는 베서니의 옆에서 올리비아는 가만히 베서니와의 첫 만남을 곱씹었다.
“아이고 참, 결례인 줄도 모르고 이리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셔서.”
처음 저를 보던 애틋한 눈빛과,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칸데르의 집사 베서니입니다.”
녹녹하게 젖어 들던 목소리.
선대 대공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올리비아는 처음 저를 보던 날 베서니의 얼굴을 이해했다. 백수정 광산 문서를 바라보며 울음을 터트렸던 그녀의 심정을 이제야 헤아릴 수 있었다.
동시에.
“고마워요.”
올리비아의 진심 어린 말에 길길이 화를 내던 베서니가 뚝 멈췄다.
올리비아는 배시시 웃으며 베서니의 팔을 끌어안았다.
백수정 광산을 가지고 오기 전이나, 오고 난 뒤나. 베서니가 저를 귀히 대하는 마음은 한없이 깊었다.
잠자리를 고쳐 주던 것도, 포근하고 예쁜 잠옷을 지어다 주는 것도, 아침마다 조용히 들어와서 예쁜 꽃을 화병에 꽂아 주던 것도.
챙김을 받는 것은 아주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일이었다. 그 정성의 바탕에 있는 마음이 그 누구도 아닌, 올리비아 저를 향한 거라는 게 너무나도 여실해서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참, 아가씨도……. 별말씀을.”
분노가 사그라들었는지 베서니의 눈이 촉촉해졌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팔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돌아가면 저는 베서니를 도와서 비밀을 알아내고 싶어요. 그러니 가는 동안 베서니가 제게 로웰에 대해 많이 알려 주세요.”
“그럼요. 제가 아는 건 다 알려 드릴게요. 아마 놀라실 거예요. 로웰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다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 가장 궁금해하시는 건, 아마 아가씨의 예쁜 초록 눈에 대해서겠죠?”
심장이 두근대었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콧날이 붉어진 상태에서도 베서니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출발 전에.”
“네?”
“앤서니가 싸 준 샌드위치부터 드세요. 아가씨. 어쩌면, 볼살 빠진 것 좀 보세요.”
베서니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에 분명 식사를 마쳤는데.
항변의 눈빛에 베서니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겸사겸사, 식사하는 중에 아가씨께 편지가 온 것을 보여 드리면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에요.”
.
.
.
베서니의 말이 맞았다. 제도 방향에서 달려온 기사는 비칸데르의 기사였다. 그가 내민 편지는 에드윈에게서 온 것이었다.
- 오랜만에 베서니를 만난 소감이 어때요. 나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았으면 했는데.
하지만 다정한 내용보다 더 시선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유려한 필체 끝의 서명은 에드윈 R. 비칸데르.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글씨체.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만 같았다.
올리비아는 분명 이 글씨체를 본 적이 있었다.
그건 처음 에드윈한테 편지를 받았던 연회의 다음 날도, 백수정 광산의 예약 마법 문서에 서명을 하던 날도 아니었다. 훨씬 더 오래전에…….
이를테면…….
생각을 가다듬는 올리비아의 눈이 시리게 반짝였다.
* * *
태자궁의 침실.
“전하. 정말 잠시 후에는 씻고 나가셔야 합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한참을 설득하던 하지스 백작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욱하게 번지는 시가 연기를 헤치며 침실을 나섰다.
한낮임에도 커튼을 드리운 침실은 칠흑 같은 밤과 구분할 수 없어 보였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레오포드는 가만히 누운 채 연기를 뱉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 사이를 바라보다 보면 요 며칠간 들었던 말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어떻게든, 공녀를 다시 태자비 자리로 데려와야 한다. 그게 이 프란츠 제국의 태자로서 네가 해야 할 일이야. 그 애가 초록 눈이었다니……. 그래, 초록 눈이었는데 말이야.”
이건 어제였던가.
“협상이 끝나가는데 친애하는 태자 전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않으시는 걸 보면, 이 협상이 마음에 드시는 거겠죠?”
아니, 이게 어제였던가. 그러고 보니, 협상은 어떻게 되었지? 베르탱이 다시 온다는 걸 보면 끝이 나지 않은 걸까. 어찌 되든 마델레이네 공작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킬킬대며 웃던 레오포드의 소리가 뚝 끊어졌다. 유막이 낀 것처럼 탁한 바다 빛 눈이 느리게 감겼다.
흐릿한 담배 연기와 독주의 기운에서 레오포드는 계속 제자리걸음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같잖았고, 나중에는 만족스럽고, 지금은 지독하게 보고 싶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에 대해서.
시린 달빛을 따다 닮은 듯한 은발과 예쁜 얼굴, 그리고 저를 바라보던 초록색 눈동자. 아, 그 눈이 저를 어떻게 바라보았더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하니 막혀서, 레오포드는 다시 한번 시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폐부로 차오르는 연기를 뱉다 보면 자연히 웃음이 나왔다.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지금이라도 되돌려야 하는데.
늘 쉬웠던 세상이, 발밑 아래에서 저를 우러러보던 모든 게 거대한 벽이 되어 저를 가로막았다.
왈칵 치솟는 감정이 짜증인지 그리움인지 아니면 애정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레오포드는 하, 탄식 같은 웃음을 뱉었다.
시리게 입가를 장식하는 비웃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잡았어야 했는데. 그때야말로 잡았어야 했는데.”
레오포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욕망이 덕지덕지 붙은 목소리가 침실 위로 느리게 퍼져 나갔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나.”
독한 술에 절어 있던 게 며칠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것 같았다.
한탄 같은 말이 나오는 동시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쨍한 목소리가 들이닥쳤다.
“레오포드! 놔, 며칠째 레오포드를 못 봤단 말이야.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영애!”
시종들의 만류에도 끝내 문을 열고 들어온 마리아는 연신 기침을 했다.
목이 따끔거렸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방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무슨…….”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마리아는 주춤대며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벌써 며칠이나 레오포드를 보지 못했다.
며칠 전, 시종한테 돈을 쥐여 주며 잠깐 얼굴을 봤던 유모는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말했다.
“아이고, 아가씨. 이렇게 갇혀 계시다니. 후작님께서도 저택에만 계시고. 아이고.”
무슨 상황에서도 저를 지켜 주던 든든한 집안은 이제 뒷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직 레오포드만이 제 구원이었다. 비록 그의 시선이 차디찰지라도. 마리아 에텔은 헛된 희망이라도 움켜쥐어야 했다.
감금당하다시피 태자궁에만 머물러 있는 일은 고역이었다. 실질적인 태자비 대접이 끝난 뒤, 저를 대하는 시녀들의 행동은 무례했고, 시종장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레오포드, 제발. 정신 좀 차려, 콜록…….”
이상하게 몸도 좋지 않았다. 늘 나른하고 감정도 주체할 수 없이 날뛰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렇게 원망스럽던 얼굴이 눈에 보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마리아 에텔은 안도감에 휩싸였다.
“아…….”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레오포드는 눈가를 찡그렸다. 살이 빠진 건지 퇴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가운데, 마리아를 바라보는 눈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저를 알아보는 듯 입꼬리가 올라가서,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레오포드의 이름을 불렀다.
“레오,”
“너 때문일까?”
“네? 그게 무슨…….”
“너 때문에, 올리비아가 떠난 걸까? 아니면 나 때문에?”
쿵-. 쿵-. 쿵-.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짐에 따라 마리아는 뒷걸음질을 쳤다. 하하, 가볍게 웃는 목소리의 끝에 사막 전갈의 독이 서려 있었다.
레오포드가 저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배가 차가워지는 동시에 온몸이 뭉치는 것 같았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통증에 마리아는 주저앉으며 외쳤다.
“아, 아, 의원을, 의원 좀…….”
애처로운 목소리가 침실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지나는 시종들은 무심한 얼굴로 쳐다도 보지 않았다. 레오포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초라한 위치.
발밑이 꺼져 가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울음을 터트렸다.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