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 악마의 계곡, 세누아의 계곡 (111/151)


#111. 악마의 계곡, 세누아의 계곡
2023.03.22.



 
눈이 아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이 높았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치켜올릴수록 결 고운 은발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어느덧 바람의 냄새에 서늘함이 섞였다. 어쩌면 익어 가는 밀밭의 냄새일지도 몰랐다.

처음 비칸데르로 갈 때만 해도 싱그러운 초록빛이던 평야 위로 듬성듬성 황금빛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오늘 점심은 마사가 만들어 주었던 샌드위치 대신 칠면조 고기를 잔뜩 넣은 샌드위치였지만.


“소풍 같은 게 아니라 소풍이죠.”

 
에드윈 말이 맞았다.

자리를 펴고 앉은 기사들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도, 바람에 출렁이는 밀 이삭들까지도.

비칸데르로 가는 길은 언제나 소풍이었다. 급하게 돌아가는 지금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옆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깜빡거리다 푸스스 웃었다.

이 완벽한 곳에 에드윈만 없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올리비아는 벌써 세 번이나 텅 빈 제 옆을 바라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떨어져 있는 게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올리비아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대신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예를 들어서, 그녀가 그보다 먼저 비칸데르령으로 떠나는 것에 대한 장점 같은 것을 말이다.

비칸데르령의 사람들과 더 빨리 볼 수 있어서 좋고, 백수정 광산에 숨겨진 비밀을 찾게 될 것에 대한 기대로 두근거리고. 또, 제도를 벗어났을 뿐인데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고.

입매에 고였던 미소가 잠시 흐려졌다. 잔잔했던 마음이 제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술렁이는 이유가 뭘까.

급하게 작별한 에셀라의 아쉬운 얼굴이 떠올랐고, 울던 샐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 마음은 조금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올리비아로서는 겪어 보지 못한…….

그러니까 어렴풋한 생각만으로도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올리비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을 다 끊어 내었는데, 애써 감정을 소모하다니.

그럴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올리비아는 자꾸만 들끓는 마음을 무시했다. 그럼에도 귓전에 저를 부르는 애타는 목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아서 무릎을 덮은 담요를 힘껏 말아 쥐었다.

그리고 서둘러 주변을 바라보았다. 생각을 환기할 다른 것을 찾는 순간 보이는 디안의 얼굴에 올리비아는 피식 얕은 웃음을 터트렸다.

경계하듯 주변을 바라보던 얼굴이 언제 저렇게 멍해진 걸까?

가만히 밀밭을 바라보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이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디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만히 평야를 바라보는 게 보기 좋았을 뿐인데, 디안은 마치 부끄러운 꼴이라도 보인 것처럼 변명했다.


“제가 절대로 경계를 늦추거나 그런 게 아니라 뭔가 평화롭고 좋아서요. 여태껏 이런 걸 볼 기회는 별로 없었…….”

“그래요? 가면서 더 많이 볼 텐데. 디안도 소풍을 좋아하나 봐요.”

해맑게 웃는 아가씨와 달리 디안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자칫하면 비칸데르에는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없다는 것을 티 내는 모양새였다.

북부의 황량함이라면 제도 출신 귀족들 중 올리비아만큼 지겹도록 많이 본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디안은 애가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설마…… 비칸데르에서는 이런 풍경을 보지 못해 아쉬우신 걸까? 어쩐지 아까 칠면조 고기를 드시던 아가씨 표정이 이상하더라니!

단단히 오해한 디안은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 사실은 비칸데르령만큼 평화로운 곳도 없습니다. 하하. 아가씨께서도 아시겠지만요.”

마치 책 내용이라도 읊듯 또박또박한 말이었다. 디안의 표정 변화가 손바닥 보듯 훤히 보여서, 올리비아는 부러 짓궂은 웃음을 삼키며 모르는 척 물었다.


“그래요? 세상에. 나는 몰랐는데. 하긴, 광산을 보러 갔을 때 그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하긴 했어요.”

광산 너머로 뭐가 있긴.

빤히 보이던 모든 곳이 황량하게 벗겨진 민둥산이었다. 한여름임에도 풀조차 거의 나지 않은 흙산이 두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디안 역시 광산 뒤의 민둥산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어수룩한 얼굴이 눈만 깜빡였다. 그은 얼굴이 희게 질리는 것 같아서 올리비아가 장난을 멈추려 할 때였다.


“그……!”

불쑥 꺼낸 목소리가 컸다. 가까이에 있던 기사들마저 무슨 소리인가 돌아보는 사이, 디안이 말을 이었다.


“……원래 그림은 여백의 미가 있을수록 비싸다지 않습니까.”

일부에나 해당할 법한 말이었지만, 디안은 능청스레 일반화를 했다.

저를 보는 아가씨의 눈이 웃고 있었다. 어쩌면 제 변명이 잘 먹힐 것도 같았다.


“비칸데르의 지형은 그, 여백의 미가 많은 자연 그대로라 아주 호젓합니다. 또,”

“또?”

“또…… 강과 호수도 많았고. 소네어 거리의 건물들도 알록달록한 게 예쁘고. 또…….”

디안은 그의 말들 중 과거형이 섞였다는 것도 눈치 못 챈 듯 비칸데르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디까지 갈까. 흥미롭게 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피식 웃고, 그 자랑들이 점점 작아질 때였다.


“스젤린 경.”

옆에서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에 디안이 잠시 말을 끊었다. 어느새 주변이 조용했다. 상급 기사 한 명이 어딘가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경께서 얼마나 비칸데르를 사랑하시는지는 아가씨께 잘 전달되었을 겁니다.”

“응?”

“어차피 아가씨께서도 영지 시찰 다니시면서 거의 다 보셨을 텐데 말입니다.”

벙찐 디안은 그제야 아가씨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더불어서 주변의 기사들 역시 저를 보며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도.

디안의 얼굴이 벌겋게 익기 시작했다. 동시에 작은 웃음들이 퍼져 나갔다.


“그나마 저희만 있어서 다행입니다. 여기에 인터필드 경이나 칼터 경까지 계셨으면. 스젤린 경께서는 아마 비칸데르를 사랑하는 기사 1위 수여장까지 받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위로라고는 하나도 안 되는 말이었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던 기사가 다시 멀어졌다.

쾌활하게 터지는 웃음소리 아래로 기사들이 다시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었다.


“아 진짜. 자식들이 그러면 진작 이야기해 줄 것이지.”

졸지에 과대 포장에 실패한 사람이 된 디안은 꿍얼거리듯 주변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크. 주변의 기사들이 시선을 피하는 사이, 올리비아는 부끄러움에 붉어진 디안의 귀 뒤를 보고 조금 웃었다.


“워낙 디안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말이죠. 또,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겠죠. 스젤린 경은 무려 3기사단의 부단장이잖아요.”

추켜세우는 말에 디안은 금세 마음이 풀렸는지 히히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과하게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맞습니다. 아가씨, 사실 제가 짐승 토벌을 나간 지난 혹한기에는 정말 시퍼렇게 물이 찰랑이는 계곡까지 발견했지 뭡니까?”

신이 나서 하는 말에 올리비아의 눈이 잠시 깜빡였다.

이상한 말이었다.

해수와 맞닿지 않은 한, 겨울이면 계곡의 물은 얼기 마련이었다. 내륙의 비칸데르가 산에 둘러싸였다는 것은 무엇보다 확실했고.

하지만 디안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설마, 이것도 백수정 광산의 비밀과 연관이 있는 걸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올리비아는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모든 생각이 다 백수정 광산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거긴 정말 저 말고는 아무도 못 봤을 겁니다. 저도 연기 같은 것만 보지 않았더라면 세누아의 계곡으로는 발도 안 디뎠을 테니까요. 거기는 출입 제한 걸린 것을 떠나서, 과거부터 악마의……!”

“악마의?”

어라.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말과 동시에 디안의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흐릿한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상했다. 마치 제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꽁꽁 감추어진 것 같았다.

급격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디안과 달리 올리비아는 찬찬한 얼굴로 말했다.


“흥미롭네요. 세누아의 계곡이라.”

“저, 그게 아가씨. 거기는…….”

“출입 금지 구역에 간 이도 용감한 스젤린 경밖에 없을 테고.”

“그게, 그러니까. 겨울인데 연기가 나는 게 이상해서……!”

“연기라. 이건 정말, 알아봐야 할 것투성이네요. 그렇죠, 스젤린 경?”

어느 순간부터 아가씨는 다시 자신을 스젤린 경으로 칭하고 있었다.

웃고 있던 고운 얼굴 위로 서늘한 기품이 드리웠을 때, 디안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묵직한 기세를 누른 얼굴이 복잡해 보였다. 충언을 할지, 아니면 제 말에 따를지. 올리비아는 느리게 말했다.


“연기의 정체는 뭐였나요?”

“……죄송합니다.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왜죠?”

고저 없는 물음에 디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상하게도 짐승 토벌을 나갔던 날의 기억이 잘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항상 철두철미하게 뒷정리까지 하던 디안 스젤린답지 않은 일이었다.

무슨 일이지. 마치 마법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정말 제가 그날 이상한 연기를 보았고, 세누아의 계곡에 간 것은 맞을까?

초조함에 시선이 자꾸만 내려갔다. 언뜻 아가씨의 목에서 무언가 강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지만, 디안은 그조차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경 외에 이 사실을 아는 이는요?”

“없습, 아니, 없을 겁……. 잘 모르겠습니다.”

번복하는 대답이 차라리 더 믿음직스러웠다.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갈색 눈 위로 혼란이 가득했다.


“이상하네요…….”

올리비아는 느리게 손톱으로 담요 위를 두드렸다.

악마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험준한 곳. 단지 그뿐이었는데, 디안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더 수상해졌다.


“기억이 흐릿하게 남은 이상한 곳이라. 정말 조사가 필요할 것 같은데 경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명령을 내리신다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실책을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아가씨.”

디안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세누아의 계곡, 우연이 아니라면 그곳에 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짐승조차 피해 간다는 험준하고 깊은 계곡.

하지만 아가씨의 명령이라면 갈 수 있었다. 디안이 날카롭게 벼려진 눈으로 세누아의 계곡, 그 초입을 떠올릴 때였다.


“제가 직접 가고자 한다면 스젤린 경께서 기꺼이 동행해 주시겠죠?”

“아가씨, 그곳은 정말 위험합니다!”

“초입까지만 가고, 위험하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약속이라도 할까요?”

꾸며 낸 무고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로, 아가씨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당황함에 디안이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통 크게 거짓을 말하고도 태연한 올리비아가 침묵 뒤의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아가씨-!”

커다란 목소리가 낯익었다.

올리비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리 아래로 덮고 있던 담요가 스르르 떨어졌다.

비칸데르령 방향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마차, 그 창문으로 보이는 이는…….


“……베서니?”

믿을 수 없게도, 베서니였다.

가슴 한편이 벅차오르는 기분에 올리비아는 마차를 향해 뛰었다.

다급한 마음에 마차에서 달려 내려오던 베서니의 표정이 바뀐 것도 순간이었다.


“아가씨, 팔목에 그게 무슨……!”

그녀의 눈에 비친 내려간 드레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올리비아의 팔목이 보랏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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