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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헤페르티와의 이상한 협상 (2) (110/151)


#110. 헤페르티와의 이상한 협상 (2)
2023.03.19.



“대공 전,”

“내가 헤페르티를 방문했던 때에는 거의 모든 제반 시설이 무너져 있었으니.”

비칸데르 대공은 다급하게 부르는 엘킨 공작의 말을 잘랐다. 건조하게 말을 이으며 대공은 키월 공작을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 분위기가 헤페르티로 넘어왔고, 대공은 무심히 물었다.


“당시가 전시였음을 감안한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로 복구되었습니까.”

“……여전합니다. 기본 의료 시설조차 아직 정비하지 못했고, 백성들은 썩은 순무로 간신히 끼니만 때우고 있습니다.”

“복구가 생각보다 늦군요. 공작.”

“그야…… 들으셨다시피 제국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의 정도가 크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 지나치게 솔직했다. 동시에 기이할 정도로 친근했다.

승전국과 패전국의 배상금 협상이 이루어지는 테이블이라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도저히 이 분위기를 못 참겠다는 듯, 몇몇 귀족들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엘킨 공작은 서둘러 황제를 바라보았다.

불쾌하다는 눈으로 대공을 바라보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이 상황을 끝내라는 듯 노여움 가득한 눈에 엘킨 공작은 서둘러 대공의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전쟁 영웅이니 뭐니 해도 정치판에서는 엘킨 공작이 훨씬 유리했다. 적당히 말을 돌려 원하는 바를 얻어 내는 것은 그의 특기였다.


“운이 좋군요. 공작.”

하지만 갑작스럽게 끼어든 대공의 말에 엘킨 공작은 잠시간 문맥을 살폈다. 운이 좋다, 라. 지금 상황에서 등장하기엔 이상한 말이었다. 엘킨 공작이 능란하게 대공의 시야에서 비껴 나며 말했다.


“……하하. 설마 제가 운이 좋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닐 테고.”

현재 대회의실에 있는 공작은 셋이었다.

헤페르티의 키월 공작, 그리고 프란츠 제국의 엘킨 공작과 마델레이네 공작.

대공은 느슨하게 웃으며 천천히 세 명의 공작을, 그리고 저를 주시하는 태자와 노려보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잘생긴 입매를 씩 올려 웃었다.


“공작도 운이 좋죠. 나는 이 협상에서 헤페르티한테 배상의 책임을 크게 물 생각이 없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오늘의 협상이 원만하게 마무리되겠군요.”

“대공 전하!”

협상 테이블 위의 귀족들이 동요했다.


“전하, 지금은 그런 말씀을 하실 상황이……!”

엘킨 공작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전쟁 영웅이신 비칸데르 대공 전하의 말씀입니다. 제국에서는 감히 전쟁 영웅의 말을 그런 식으로 치부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배상금의 규모를 축소할 수 있다는 말에 헤페르티 사절단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항변했다.

배상금 협상의 결과에 이권이 달린 제국의 귀족들은 입이 바짝 말랐다.

그들은 애타는 눈으로 마델레이네 공작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나서기 전까지 외교적으로 가장 힘 있는 자는 마델레이네 공작이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시선에 보좌관이 마델레이네 공작한테 귀엣말을 했음에도 공작은 꾹 닫힌 입매를 열지 않았다.

그 대신 입을 연 건 헤페르티의 키월 공작이었다.


“진, 심이십니까?”

외알 안경 너머, 키월 공작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지난번 연회 때 넌지시 흘렸던 편을 들어 주겠다는 대공의 말이 사실이었던 걸까? 그것도 이렇게까지?

얼떨떨한 목소리에도 그저 대공은 빙그레 웃었다.


“……진심이겠나. 공작.”

넓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단번에 대회의장의 분위기를 눌렀다. 황제는 소탈하게 웃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대공이 제멋대로 굴어 흩트려 놓은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좌중을 훑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태자와 마델레이네 공작. 그리고 품위를 잊은 채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귀족들까지.

그리고 배상금이라는 무기를 쥐고 저를 도발하듯 바라보는 대공까지.


“허허. 대공이 원체 전장만 돌다 보니 협상에는 서툴러 한 말일세. 진심이 아니지.”

“진심이 아닐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폐하.”

“대공……!”

황제의 눈 위로 살기가 번뜩였다. 황제가 대공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는 명백한 의사 표시가 우스웠다.


“이 협약으로 인해 막대한 배상을 가져갈 제가, 정작 배상금이 크게 필요치 않은 것을요.”

이제까지 대공이 전후 배상금에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일은 없었다. 정말로, 지난 귀족 회의 때 대공이 한 말이 현실이 되는 것일까?

충격으로 아연해진 귀족들이 저마다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대공이 황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삽시간에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황제 폐하께서도 전리품이며 배상금이며 제가 여태껏 바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실 테고. 여기 계신 귀족분들은 뭐…….”

느른한 목소리가 귀족들을 훑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꽂힐 때마다 제국의 귀족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차지한 배상금들을 떠올리기에 급급하며 시선을 피했다.

시린 비웃음 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대공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이제 더 이상 폐하께 막대한 공물을 드려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죠.”

그 말에 귀족들은 모두 황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바라보는 그 빤한 눈들이, 늘 귀족의 기품을 무기 삼아 화려한 삶을 영위했던 귀족들이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답을 내놓으라는 듯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권이 무너지고 있었다.

황제가 매서운 눈으로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아차 한 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한 번 보았던 귀족들의 시선은 절대로 황제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황좌의 팔걸이를 꽉 잡았다. 무언가 모래알처럼 손가락 새로 사라지던 그날의 기억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붉은 눈을 요요히 빛내던 대공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굳이 제가 헤페르티를 쥐어짜 가며 이 협상을 지속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 *



“……대공은 지금 협상이 무어라 생각하는가. 무슨 생각으로 협상에 참석한 거야.”

사절단과 귀족들이 빠져나간 대회의장.

에드윈은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나갔을 태자는 오늘따라 황제의 옆을 지켜 섰다.

꿋꿋이 황좌를 지키는 황제와 지독하게 닮은 얼굴이었다.

에드윈은 피식 웃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 웃음이 황제의 화를 더 부채질한 듯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패전국 앞에서 제국의 분열이라도 보이자는 건가?”

“그것도 의도하긴 했습니다.”

“뭐?”

“다들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제 제가 폐하의 앞에서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비칸데르가 폐하께서 빼앗아 간 로웰의 보물을 되찾았다는 것을.”

황제의 팽팽한 기세가 꺾였다. 희게 질린 얼굴 위로 망연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황제는 입술을 달싹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제 정말로 자신의 영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폐하.”

묵직한 분위기를 깨고, 레오포드가 입을 열었다. 이 순간 세월이 10년은 흐른 것처럼 보이는 것 같은 황제가 느리게 태자를 바라보았다.


“제가 잠시 대공과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마침 잘되었군요. 저도 태자 전하한테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황제는 허락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한 걸음, 문으로 걸어가는 황제의 걸음이 느렸다.

늘 당당하던 황제의 어깨가 오늘따라 초라했다.

.
.
.


“……원하는 게 무언가. 대공.”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하나 차근히 말하자면, 비칸데르가 바치는 광물의 세액 비율 조정부터…….”

“표면적인 것은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말하게 대공. 무엇을 원하기에 백수정 광산을 가져가고, 올리, ……그녀를 데려간 건가.”

올리비아. 그 네 글자의 이름이 이토록 심장을 조여 올 줄 몰랐다.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레오포드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초조함을 누르며 레오포드는 황제인 아버지한테 들었던 대강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황녀의 소유였던 폐광산이 올리비아한테 넘어갔다는 것과 어떻게든 올리비아를 다시 제 옆으로 되돌리라는 명령까지.

그건 레오포드 역시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대공이 원하는 바가 있다면 어느 정도는 들어줄 아량이 있었다.

차라리 폐광산만 가져가길 원하는 거라면, 레오포드한테는 차라리 더 쉬웠다.

하지만 애끓는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레오포드와 달리 대공의 표정은 미묘했다. 레오포드는 다시 한번 회유하듯 말했다.


“대공, 말을 하게. 그대가 뭘 몰라 협상에는 약할지라도, 내 올리비아만 내게 돌려보내 준다 약속만 받으면 어지간한 것은 다 들어줄 예정이야.”

“참, 태자 전하는…….”

느리게 열린 말문에 레오포드는 느리게 숨을 삼켰다.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이든 간에 저는 흔쾌히 건넬 자신이 있었다.


“들은 바와 같이 예의가 없으시군.”

“……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동시에 단단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제 궁에 제 허락 없이 에텔 영애를 들이셔서 제게 예의를 지키지 않으신 건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잖아요.”

 
예의가 없다는 말. 미묘한 웃음 섞인 그 말은 올리비아가 했던 말을 떠오르게 했다.

순식간에 레오포드는 표정을 굳혔다. 감히 제 앞에서 올리비아와의 관계를 과시하기라도 하는 걸까.

가만히 레오포드를 바라보던 대공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비열하기 짝이 없고, 추한 레오포드 프란츠.”

“뭐라!”

“그게 내가 참았던 첫 번째 말입니다, 전하. 기사로서의 도의도, 황족으로서의 품위도 없이 감히 살의를 누구한테 뻗어야 할지도 모르는.”

“감히……!”

건조하게 이어지는 말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레오포드는 단번에 대공의 멱살을 잡았다.

안 그래도 저 늘씬한 얼굴을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었던 차에 잘되었다. 손에 잡히는 옷매무새 너머로 단단한 몸이 느껴졌지만 레오포드 역시 실력 있는 기사였다.

하지만 이 고고하고 오만한 태자는 몰랐다.

살의를 누른 대공이 일부러 잡혀 준 것이란 걸.

분명히 팔을 뻗었는데, 어느 순간 허공이 보였다. 뒤늦게 등에 통증이 울렸다. 레오포드는 커다랗게 눈을 떴다.


“내 아가씨의 손목에 멍이 들었더군.”

내려다보는 붉은 눈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레오포드는 아득해지는 기억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아, 멍청하게 탁음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마지막에…….


“내가 지금 태자를 온전히 두는 것은, 아가씨 손목의 멍에 대한 대갚음이 내 몫이 아니어서라는 것을 명심하길.”

대공이 하는 말이 귓전에 흩어졌다. 레오포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살의도, 기세도 꺾인 상태에서 언뜻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
.
.

대회의실 앞.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열심히 손을 털던 에드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와 태자에 이어 마델레이네 공작까지. 아무래도 오늘이 무슨 날인 듯싶었다.


“……그, 애가 비칸데르령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오늘따라 말이 없었던 마델레이네 공작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혀를 찼다.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 사이에 공통분모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나.”

더 말을 붙이지도 못하게 에드윈이 걸음을 옮겼다. 곁눈질로 바라본 마델레이네 공작은 끝까지 저를 보고 있었다.

저래서야 원. 올리비아가 불안정해 보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낌새를 눈치챈 건 따라붙은 윈스터도 마찬가지였다.


“질척거리기가 수준급이군요. 마음 약한 아가씨를 흔들려고.”

연회의 밤, 고민스럽던 올리비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이것 때문에 흔들렸을까. 아니면…….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없어서 에드윈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빙그레 웃으며 윈스터를 향해 말했다.


“내 편지는, 도착했을까?”

“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듯싶습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말을 달려간 기사가 천천히 가는 아가씨의 마차 행렬을 따라잡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 * *

같은 시각.


“악마의 계곡? 그렇게 위험한 곳에 갔었단 말이야?”

찬란한 햇살이 비쳐 오는 나무 그늘 아래.

올리비아는 부러 놀란 듯 짓궂게 말했다. 아차. 디안은 제 입을 원망하며 변명했다.


“그, 정식 명칭은 원래 세누아의 계곡이라고 합니다. 저도 정말 아주 아주 아주 우연히 가는 길을 알게 된 겁니다!”

몇 번이나 강조를 하면서도 디안은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아가씨의 초록 눈 위로 호기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디안은 숨을 참으며 속으로 한탄했다.

제가 도대체 왜 이 이야기를 꺼냈더라.

빤하게 읽히는 눈빛이 재미있었다. 올리비아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시작은 다름 아닌,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밀밭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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