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헤페르티와의 이상한 협상 (1)
(109/151)
109. 헤페르티와의 이상한 협상 (1)
(109/151)
#109. 헤페르티와의 이상한 협상 (1)
2023.03.15.
유모, 루하스 남작 부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황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야 당연히 마리아 에텔을 활용할 생각이지 않겠어요?”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하는 내용에 루하스 남작 부인은 덜컥 걱정부터 앞섰다.
지난번에도 마리아 에텔 때문에 곤란해지셨던 걸 잊으시기라도 한 걸까.
멍청하긴 해도 어딘가 약은 구석이 있는 영애였다.
위엄 있는 황녀 궁에서도 바락 대들던 모습이나, 여름 연회를 망치듯 약혼식을 열겠다 날뛰던 게 생생했다.
아니, 그것만이었다면 루하스 남작 부인 또한 황녀를 응원할 거였다.
하지만 지금 사교계를 비롯해 어린 시절부터 친한 놀이 친구들한테까지 황녀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자중해야 할 시기에 다시 한번 문제를 일으키려 하시다니.
“그래서, 마리아 에텔은 아직도 오라버니의 궁에 있답니까?”
루하스 남작 부인이 망설이는 것을 눈치챘는지 황녀가 재촉했다.
“그게…….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해서 알려 줘요. 그 맹랑한 것의 요즘 동태까지도요.”
루하스 남작 부인은 고개를 숙였다. 이내 황녀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따르면서, 루하스 남작 부인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녀를 불렀다.
“……그러니 태자 전하의 궁에 가서 에텔 영애의 현 상황에 대해 일거수일투족 빠짐없이 알아보세요.”
“예. 유모님.”
영특한 시녀는 이내 빠르게 태자궁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루하스 남작 부인은 스스로를 다독이듯 생각했다.
‘황후 폐하의 측근인 부인들만 잘 따라 준다면 황녀 전하의 계책은 틀림없이 먹힐 것이야. 아무리 그래도 황녀 전하께서는 사교계의 꽃이시니.’
불안함은 이미 촛불처럼 가슴속부터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루하스 남작 부인은 애써 그를 외면한 채로 다시 황녀를 따라 걸었다.
* * *
황제는 매서운 눈으로 황녀가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마리아 에텔은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제가 태자궁의 시종장을 통해 단단히 감시 중이에요. 요즘에는 하루 종일 잠만 자고 바깥만 내다본다고 해요.”
어젯밤 황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쯤 해 두었으면 탐탁지는 않아도 적어도 마리아 에텔의 일 정도는 수습할 수 있겠지.
이제 황녀를 향한 모든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일 잘하던 황녀, 자랑스러운 제국의 성녀가 허울뿐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 황제에게 꽤나 뼈저린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녀한테 마무리를 맡긴 건, 제국의 격에 맞게 행동하라는 의미였다. 타국과의 결혼 동맹이라도 맺으려면 적어도 사절단이 있을 때 무언가는 보여 줘야 했으니까.
태자는…….
황제는 아픈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 다 큰 자식들이 이제 와서 아비의 골치를 썩이는지 모르겠다. 일국의 태자가 이 상황에 마리아 에텔을 통제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다니.
오늘 헤페르티 사절단과의 1차 협상 전에는 불러 마델레이네 공녀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해야 했다.
이것도 어젯밤 마델레이네 공작과 이야기가 되었으면 조금 속이 편했을 텐데.
황제는 타는 속을 대신해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 사이로 나오는 한숨이 뜨겁다 못해 절절 끓었다.
* * *
공녀의 초록 눈이 아른거릴 때마다 공주와 닮았다 언뜻 생각했었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복수에만 눈이 멀었던 황제는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쳤다.
‘설마. 공녀한테도 신비로운 힘이 있다면 어떻게 하지?’
생각만 해도 입이 말랐다.
그래서 지난밤. 입궁한 마델레이네 공작이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황제는 예를 갖춘 인사조차 물린 채 물었다.
“늦은 시간에 와 주어 고맙네. 내 공작한테 몇 가지 물을 게 있어서 불렀어. 혹시 첫째 공녀한테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적은 없나?”
“……이상한 낌새라 하시면.”
“무엇이든 다 좋네. 무언가,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다거나. 무희처럼 군다거나. 예를 들어…….”
하지만 마델레이네 공작은 에둘러 말하는 황제의 질문에도 이상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어딘가 멍한 것 같기도 했고, 질문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조바심이 난 황제는 흘리듯 직설적으로 물어야 했다.
“……노래를 즐겨 부르거나 하지 않았나?”
질문하고도 황제는 아차 했다. 설마 공작이 노래와 초록 눈의 상관관계를 알겠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어쨌든, 마델레이네 공작은 공녀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긴 시간 동안 함께 살아왔으니까.
황제의 거듭된 재촉에야 마델레이네 공작은 겨우 한마디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미에 대한 기억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형형한 분노가 황제를 향했다.
“공작……! 감히 내게 그 무슨 불온한 눈빛이야!”
황제가 버럭 화를 내었음에도 공작은 겨우 고개만 숙일 뿐 송구합니다, 그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황제는 쯧, 혀를 차며 마뜩잖은 눈으로 공작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공작의 역린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먼저 첫째 공녀의 어미에 대해 언급한 건 황제였다.
하지만 황제는 진실로 그 어미가 알고 싶었다. 선명한 초록 눈의 공녀가 나오려면 분명 그 어미 역시 또렷한 초록 눈이었을 텐데.
혹 로웰의 공주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었을까.
화를 내도, 달래 보려 해도 마델레이네 공작은 입을 열지 않았다.
두통에 눈앞이 아찔할 정도였다. 괘씸하게도 마델레이네 공작은 축객령 한 번에 바로 저 문을 나섰었다.
광산의 일이 제일 큰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저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니. 묵직한 숨을 토해 내는 사이, 문 바깥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오늘 알현을 청하는 귀족들이 있습니다.”
깍듯이 예를 갖춘 시종장이 집무실로 들어와 보고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밝았다.
“……대신은 오후 사절단과의 협상을 위해 잠시 알현을 청하며, 마지막으로…….”
노련하게 명단을 읊던 시종장이 잠시 황제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엘킨 공작이 알현실 앞에서 황제 폐하를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엘킨 공작이라니.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황제가 미간을 구겼다.
“꼴도 보기 싫군. 아무리 귀족파의 일이라 하나 사절단이 온 곳에서 이 추태 하나 미리 알지 못하고!”
“존경하는 황제 폐하. 그게 아니오라…….”
찾아오는 엘킨 공작을 내쫓은 게 어제 같은데 또 오다니. 더 들을 것도 없었다. 황제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곧이곧대로 들을 시종장은 멈칫하며 그게, 하고 진땀을 흘리며 황제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폐하. 엘킨 공작이 꼭 폐하를 뵙고 말씀드릴 게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이든, 내 지금은 공작을 보기 싫다고 전하게.”
“그게, 마델레이네 첫째 공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폐하.”
시종장이 질끈 눈을 감으며 고했다. 그리고 그 말에 황제의 바다 빛 눈이 번뜩 빛났다.
귀족파를 이끄는 수장은 지나치게 음흉한 속내를 숨기긴 했어도 허투루 위험한 말을 할 이는 아니었다.
* * *
“공작이 마델레이네 첫째 공녀에 대해 어찌 안단 말인지, 그거부터 말하게.”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얼음장 같은 황제의 음성이 떨어졌다.
의심 많은 황제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귀족파의 수장이 접점 하나 없는 황제파의 공녀에 대해 안다니.
하지만 엘킨 공작은 빙그레 웃는 낯과 달리 고심하며 말을 골랐다.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제가, 공녀를 회유한다면 황제는 어떤 반응일까. 문득 이른 아침, 황제 궁을 가장 먼저 다녀갔다는 마델레이네 공작이 떠올랐다.
가장 힘 있는 미끼를 던져야 했다.
“제가, 사실은 공녀가 태어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뭐?”
무슨 말이냐고 눈을 치켜뜨는 황제 앞에서, 공작은 다시 한번 빙그레 웃으며 그날의 일을 풀어놓았다.
“공녀가 잉태되던 그날 밤, 마델레이네 공작은 저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혼자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대로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제가 같이 안 갔으니. 공녀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이 자와 하룻밤을 보내거라.”
“이분이 누구시기에.”
“너 따위의 천것이 알 일 있겠나. 그저 네 일은 이 자를 아주 잘 모시는 것뿐이다.”
엘킨 공작은 그날의 제 목소리를 떠올리며 작은 각색을 넣었다.
그나마 마델레이네 공작은 제게 감사해야 했다. 한 번도 무희로 나선 적 없다는 여인을 애써 꾸며 붙여 준 게 바로 저였으니까. 모든 빚을 탕감해 준다는 말에 포기한 듯 무희의 옷을 입던 여인이 언뜻 떠올랐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잠깐씩은 기억이 납니다. 언뜻 지나쳤던 것도 같습니다. 공녀와 아주 닮았던 그 어미와 말입니다.”
“……그 어미를 보았다고?”
황제의 음성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공작은 그 반응이 기꺼웠다. 적어도 지난번보다는 황제가 제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으니까.
엘킨 공작은 더욱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예. 폐하. 안 그래도 공녀가 제 핏줄을 숨기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제가 그 어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한번 공녀와 이야기를 해 볼 참입니다.”
황제의 표정이 이상했다. 엘킨 공작은 노련하게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공녀를 회유한다는 이야기가 먹힐 줄 알았다. 그래서 엘킨 공작은 환심을 사려 본론을 드러내었다.
“어미를 그리워하는 공녀가 이참에 그 비정한 아비가 아닌, 제게 마음을 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턱 끝을 쓸어내렸다. 느슨한 손짓에 공작이 잠시 긴장하며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그거참, 흥미로운 이야기군. 그런데 공작.”
“예. 폐하.”
긍적적인 반응에 엘킨 공작이 고개를 숙였던 찰나였다.
“공작이 보았다던, 그 어미는 어떠한 외형이었나?”
* * *
“그, 것이. 마델레이네 공녀와 닮았던 것 같습니다. 초록 눈이었고, 제법 미색을 갖췄었지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인 듯 엘킨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 답변했다. 그리고 나온 답변에 황제는 한숨을 쉬려다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황제 궁의 대회의장. 묘한 기류가 흐르는 이곳은 지금 헤페르티의 패전 책임을 무는 협상장이었다.
긴장한 듯 저를 바라보는 헤페르티 사절단을 바라보며 황제는 근엄하게 말했다.
“……자, 첫 자리인 만큼 터놓고 이야기하지. 우리가 헤페르티에 묻는 피해 배상은 엘킨 공작이 먼저 이야기할 걸세.”
큼큼, 헛기침을 한 엘킨 공작이 긴 서류를 꺼내며 줄줄이 말을 이었다.
“우리 제국에서 원하는 것은 원만한 평화 조약과 이를 지켜 나가겠다는 헤페르티의 의지입니다. 따라서 헤페르티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헤페르티의 니켈른 반도부터 아러인 제도까지의 땅을…….”
줄줄이 말하는 엘킨 공작의 말에 헤페르티 사절단 몇의 얼굴이 조금씩 질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는 슬며시 웃음을 삼켰다.
지금 황제가 요구하는 건 헤페르티의 가장 비옥한 땅과 검의 원재료가 되는 광물의 광산, 그 밖에도 기사 양성을 할 수 있는 기사 학교의 폐교 등 군사력 약화까지.
오만한 헤페르티의 명줄을 완전히 꺾다 못해 다시는 덤빌 수 없도록 패전국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여태까지 패전국들에 한 요구 중 가장 무리한 요구였다. 그럼에도 제국의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알았다는 듯 서로 눈짓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모든 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위기를 잡는 태자부터 엘킨 공작과 타 귀족들까지.
“……지난한 전쟁으로 인해 양국 모두가 피해를 보았습니다. 평화 조약이라는 말에 따라서 배상금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때, 갑자기 끼어든 근사한 목소리는 순탄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태평하게 관망하던 귀족들이 자세를 곧추세웠다. 동시에 황제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또 놈이었다. 비칸데르 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