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로웰과 무희와 초록 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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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로웰과 무희와 초록 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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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로웰과 무희와 초록 눈 (1)
2023.03.12.
새까만 어둠이 넘실거리는 이른 새벽.
말의 투레질과 함께 올리비아가 탄 마차가 출발했다. 올리비아는 연신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를 배웅하듯 환하게 불이 켜진 대공저 건물, 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올리비아와 기사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소벨, 해나, 그리고 윈스터와 하워드…….
그중에서도 에드윈의 얼굴은 유난히 눈에 박혔다.
그 얼굴이 점점 멀어지자 마차를 세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올리비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다가 볼 거니까. 그러니까 먼저 비칸데르령으로 가 있어요. ……리브.”
밤새 부르던 애칭이 떠올랐다.
귓가를 간질이던 다정한 음성이 떠올라서 올리비아의 시선은 에드윈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 말이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협상이 끝나면, 에드윈은 다시 비칸데르령으로 돌아올 거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비칸데르령으로 향한 뒤, 이렇게 오래 떨어지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
마차가 대문을 나선 뒤에서야, 올리비아는 겨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둘이 앉던 마차가 유난히 넓어 보였다.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시려서 올리비아는 로브 속으로 숨긴 두 손을 맞잡았다.
조금 전까지 제 손을 잡아 주던 에드윈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올리비아를 위로했다. 코끝이 이상하게 시큰거려서,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려다 멈칫했다.
입술 위로 투명하게 발린 약이 씁쓰레했다. 동시에 약을 발라 주던 에드윈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입술을 향해 뻗던 손이, 걱정스러운 눈빛이, 저를 불러 주던 목소리가. 그리고 콧잔등에 입을 맞춰 주며 웃던 다정한 얼굴이.
모든 게 다 에드윈이었다.
밤을 새웠지만 피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맑았다.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동시에 어젯밤, 에드윈이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 *
“……나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로웰이 역사의 뒤로 사라진 뒤 어느 순간부터 해괴한 소문이 제국에 퍼졌다고 들었어요. 올리비아가 아는 대로, 초록 눈의 사람들이 ……무희라는 소문이요.”
늦은 밤의 달은 휘영청 떠올랐다. 그 달빛 아래에서 에드윈은 올리비아를 다독이듯 안으며 말했다.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에드윈의 말 사이, 무희라는 단어 앞의 침묵이 내포한 뜻을 알았다.
천박하다거나, 혹은 경박하다 따위의 저열한 말들.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사려 깊은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언제부터인지, 왜인지 알기 위해 예니브의 사람들한테 접근했지만,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더군요. 당연하겠지만요. 나 역시 그들에게 초록 눈에 관한 로웰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으니 똑같죠.”
“……돌아가면, 저도 한번 다시 가 볼게요.”
“너무 든든한데요. 리브?”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예니브 거리의 공사 때문에도 가는 거니까.”
추켜세우는 듯한 말에 올리비아는 빠르게 덧붙였다. 그럼에도 믿음 가득한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시선을 피하듯 에드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웃던 에드윈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로웰의 잔존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해 본 적도 있어요. 황제가 비칸데르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할지라도, 이미 망국이 된 로웰까지 건드릴 이유는 별로 없으니까.”
눈엣가시.
가벼운 단어로 언급했지만, 올리비아는 제국에 퍼졌던 소문에 능통했다.
에드윈이 비칸데르 대공이 되어 전쟁터에 처음 나갔을 때는 십 년 전, 그러니까 그의 나이 겨우 열 살 남짓이었다.
그 어린아이를 전쟁터로 가게 한 게 만약 황제라면, 그건 눈엣가시 정도가 아니라 정말 죽으라고 벼랑 끝으로 떠민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때 에드윈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올리비아는 의식적으로 숨을 참았지만 머릿속을 채우는 고통스러운 장면은 피하기 어려웠다.
그 마음도 모르고 에드윈은 빙그레 웃으며 품에 안은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로웰에 대한 정보는 마법이 발달했다는 것뿐이에요. 아마 나보다 베서니가 더 잘 알 거예요.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한테 들었던 옛날이야기가 전부예요.”
로웰에 대한 기록은 전부 다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혀 불태워진 지 오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나저나 옛날이야기라니. 올리비아는 묘한 기분으로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로웰에 관한 모든 게 궁금했다.
그 마음이 올리비아의 눈빛 위로도 드러났는지, 에드윈은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화책으로 남겨서 리브한테도 보여 줄 걸 그랬어요. 그때는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는 마음뿐이었어서. 꼭 내가 다음번에 들려줄게요. 완벽하게 기억해서.”
올리비아는 엄마가 들려주었던 노래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사이에도 로웰과 관련된 것이 있지 않을까.
잠시 떠올리는 와중에 에드윈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백수정 광산의 비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걸지도 몰라요. 내가 알고 있는 ‘로웰’에 선명한 것은 별로 없으니까.”
“비, 밀이라면.”
올리비아가 겨우 더듬거리듯 말했을 때, 에드윈은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올리비아가 이야기해 주었던, 황족의 비밀 문서를 확인하려고요. 그걸 본다면, 적어도 황제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우리도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요.”
* * *
백수정 광산의 비밀.
올리비아는 가만히 눈을 떴다. 베서니는 지금 광산에서 거의 살다시피 지내며 비밀을 찾고 있다고 했다.
스산하고 기묘한 광산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일까.
올리비아는 마법사들과 지질학자들과 동행해서 조사까지 했던 일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광물조차 맥이 끊겼다는 그곳에 만약 비밀이 있었다면, 마법사들이 못 발견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에드윈이 비밀을 발견하길 바랐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직접 어머니한테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지막에 덧붙이듯 나직한 목소리가 도무지 잊히지 않을 것 같아서.
“……성년을 맞이한 로웰의 왕족한테만 알려 줄 수 있으시다더니.”
붉은 눈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드리워 있었다.
“이제는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거지만요.”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쓸쓸한 웃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올리비아는 그 얼굴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최선을 다한다면,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질 거예요.”
뒤늦게 떠오른 엄마의 주문 같은 말에 올리비아는 아차, 하며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이미 제법 달린 마차 너머로는 옆에 호위하듯 붙어 선 디안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까 직접 해 주었어야 했던 말이었는데.
아쉬움에 올리비아는 그와 다시 볼 날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헤페르티와의 협상이 완료되고 황족의 비밀 문서를 취득한 뒤겠지.
혹은 베서니가 먼저 백수정 광산의 비밀을 알아낸 뒤거나.
어느 쪽이 더 빠를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궁에서 에드윈이 백수정 광산에 대한 힌트를 찾듯, 저 역시 베서니를 도와서 백수정 광산의 비밀을 찾을 거였다.
올리비아는 습관처럼 목걸이의 마석을 만지작거렸다. 단단한 최선들은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엄마를 떠올리는 말에 올리비아는 가만히 몸의 힘을 풀었다. 그러자 입술 새로 나직한 음률이 새어 나왔다. 엄마가 불러 주던 노래들…….
광산의 비밀을 찾는다면, 에드윈은 더 행복해질 거고.
창밖의 디안 역시 그의 눈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니브의 아이들 역시 뛰어다니면서 즐거운 노래를 부를…….
올리비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며, 올리비아는 에드윈이 말해 주었던 이야기를 다시 짚어 나갔다. 동시에 제가 겪었던 일들을 덧붙이며 연결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라진 왕국 로웰과 초록 눈의 왕족들, 궁으로 향했던 선대 대공비 전하와 빼앗겼던 보물인 백수정 광산.
그리고 천대받는 무희로 낙인이 찍힌 초록 눈들.
“……왜 하필 무희였,”
똑똑-. 올리비아의 혼잣말 위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올리비아는 중얼거림을 멈춘 채 창문을 내렸다.
디안이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지금 아침 식사 어떠십니까? 저기 정말 맛있는 칠면조 고기 요릿집이 있습니다!”
칠면조라.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디안이 환하게 웃었다.
어느새 태양이 떠오르는 가운데, 디안의 갈색 렌즈 아래로 언뜻 연두색 눈동자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 * *
황녀는 쏟아지는 중압감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를 비호해 줄 어머니, 황후를 부를 새도 없이 황제와의 독대를 하게 되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무려 시종장이 직접 찾아왔다. 아프다 시간을 끌 새도 없이 마지못해 향한 황제의 집무실에서 황제와 마주하고 수십 분의 침묵이 무겁게 이어졌을 때였다.
“……네가 저지른 일들은 책임지고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놓아라.”
노여움 가득한 음성에 순간 황녀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용서가 없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엉망이 된 이 상황을 전부 스스로 해결하라니.
황제가 말하는 ‘제가 저지른 일’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폐광산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마리아 에텔의 일에 관한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무엇인지 여쭤볼 용기조차 감히 나지 않았다.
“사절단이 돌아가기 전까지. 완벽하게.”
“황제 폐하-!”
“지금처럼 황녀로 살아가고 싶거든 말이다.”
빠듯한 시간에 더럭 황제를 향해 읍소하려던 황녀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친 아버지의 눈에는 그 어떠한 애정도 없었다. 심장 위로 서리가 끼듯 손발이 차갑게 굳어졌다. 동시에 발을 디디고 있는 바닥이 그대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황녀로 살아가고 싶거든, 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여태껏 누려 왔던 모든 것을 박탈당할 위기.
그제야 황녀는 아까 전 황제가 저를 ‘황녀’가 아닌 ‘너’로 지칭한 이유를 깨달았다.
아슬아슬한 시험대 위. 그 위에서 지금 황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였다. 선뜩함을 누르며 황녀는 겨우 말했다.
“……예. 폐하.”
황제로부터 더 이상의 하교는 없었다. 꼴 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무언의 축객령에 황녀는 겨우 예법에 맞는 인사를 한 뒤 집무실을 나섰다.
기사들이 가득한 복도에서 그녀를 향한 예가 쏟아졌다. 하지만 황녀는 그들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잘 알았다.
늘 우러러보던 눈들이 빛을 잃었다. 기계적인 그들의 행태를 보며 황녀는 소리 없이 드레스 자락만 말아 쥐었다.
수치심에 다리가 비틀거렸지만 차마 쓰러질 수는 없었다. 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유모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걸어 나갔다.
일찍 출근한 귀족들이 자신을 향해 예를 올릴 때마다 그녀는 버석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저는 결코 황녀라는 신분을 놓칠 수 없었다.
대륙에서 가장 강대하고 부강한 프란츠 제국의 황녀. 이 신분은 제가 어딜 가든 저를 빛나게 해 줄 테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연회, 수군대는 사절단과 귀족들.
그들의 시선을 완벽히 돌릴 좋은 패.
황녀는 가만히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왜 이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황녀 전하?”
갑자기 멈춘 황녀의 걸음에 유모가 의아한 듯 물었다. 황녀는 서늘하게 물었다.
“……마리아 에텔은 지금 어디에 있죠?”
괘씸하게도 저를 곤경에 빠트린, 그러나 이제는 저를 곤경에서 구해 줄지도 모를 쓰고 버릴 패.
그 애를 완전히 사교계에서 매장시키면, 제 이야기는 묻힐 것이었다.
하지만 유모는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황녀 전하, 마리아 에텔은 어떤 연유로 찾으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