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오직 당신만 부를 수 있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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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오직 당신만 부를 수 있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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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오직 당신만 부를 수 있는 이름
2023.03.08.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에드윈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전해진 순간,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선대 대공비 역시 초록 눈이라 했으니 그대가 받는 사랑은 선대 대공비의 대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왜 몰라!”
선대 대공비, 그러니까 로웰의 마지막 공주님의 눈 색깔에 대한 이야기부터.
“어떻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알아요.”
제도에서는 볼 수조차 없었던 초록 눈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예니브 거리.
그리고.
“……다시 만난다면 말이죠. 정말 만약에요. 그때는 부디 내게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첫 만남부터 제게 허락을 구하며 상냥했던 에드윈의 모습까지.
에드윈과의 모든 순간들이 와락 밀려왔다. 그 사이, 어느 하나라도 의도된 부분이 있다면……. 태자의 수없이 많았던 거짓말 중에 한 자락이라도 진실이 섞여 있다면.
미처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철썩였다. 가정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수심 깊은 물 아래로 잠긴 듯 온몸이 시리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굳어 가는 입매를 올렸다.
우습게도 에드윈이 지금 제 앞에 나타난다면 올리비아는 얼마든지 웃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냐 물으면 빙그레 웃으며 별거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그저, 지금이 좋았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지금이.
숨겨진 진실 따위 들추고 싶지도 않았다. 아주 작게 움튼 불안함 정도는 얼마든지 묻어 둔 채, 다시는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기고 살 수 있을 테…….
“괜찮아요. 올리비아?”
딸랑-. 벅차게 울리는 방울 소리와 함께 열린 문으로 다정한 걱정이 뛰어들어 왔다.
문가에서 걸어오는 에드윈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이제야 안도가 된다는 듯 눈가가 발그스름한 붉은 눈이, 서둘러 제 옆으로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모두 낯익었다.
완벽하게 올린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이 느리게 이마 위로 떨어지는 순간, 올리비아는 문득 터닝벨에서 만났던 에드윈을 떠올랐다.
그때처럼 저를 찾아온 그 얼굴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을 때.
올리비아는 자신이 세운 가정에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드윈은 저를 사랑한다.
의심하는 것조차 우스울 정도로, 오롯한 진심을 담아서.
그 하나에 올리비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
.
.
“제도의 힐링 마법사는 다 황궁 소속이라 베서니 님한테…….”
고운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울리자, 에드윈은 물론이고 뒤따라오며 보고하던 하워드와 윈스터까지 멈춰 섰다.
밝은 웃음소리와 달리 올리비아의 눈시울이 붉었다.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간하기도 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희고 가냘픈 팔목에 시퍼렇게 든 멍 자국이 눈에 박히는 순간, 에드윈은 이를 악물었다.
감히……! 누구의 짓일지 가늠하는 것은 쉬웠다.
“디안의 말로는 아가씨께서 태자비 궁 쪽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맹렬한 분노가 거세게 몰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제를 대면하는 대신, 태자의 얼굴을 뭉개 주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뼈저리게 몰려왔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애써 펴고, 에드윈이 입술을 떼려던 때였다.
“에드윈, 제게 못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요.”
못된 버릇이라니. 아니 그전에, 카나리아처럼 가벼운 목소리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하워드는 다른 이들을 밀듯이 바깥으로 보냈다.
탁, 문이 닫혔다.
오직 둘만이 있는 공간에서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었다.
“그게 뭐냐면, 끝없이 괜찮다고 하는 거예요.”
“…….”
“사실은 없어진 줄 알았던 버릇이에요. 에드윈과 만난 뒤부터 나는 참을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져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으니까요.”
“…….”
“그런데 오늘 아주 잠시, 이 못된 버릇이 올라왔어요.”
자꾸만 수런거리는 마음을 틈타고 올라온 못된 버릇.
심호흡의 끝내 나온 말이 잘게 떨렸다.
에드윈의 눈이 흔들려서,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나직이 덧붙였다.
“……선대 대공비 전하의 눈 색깔도 초록색이라는 걸, 아까 태자 전하를 통해 알게 되었거든요.”
순식간에 에드윈의 얼굴이 굳어졌다. 혹시나 에드윈이 제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다고 생각할까 봐 올리비아는 사전에 딱 잘라 말했다.
“오해 따위는 안 해요. 저를 사랑하는 비칸데르의 마음을 의심하기에는, 이미 받은 사랑이 벅차고. 복수로 저를 탐하셨다기에는…….”
“올리비아!”
“……에드윈의 얼굴부터가 아니라고 답변하고 있거든요.”
올리비아는 희게 질린 에드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 멍 하나에도 이렇게 아픈 얼굴로 뛰어와 주는 남자가 저를 속일 리 없었다.
“그래서 에드윈한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
“하지만 제가 먼저 말을 꺼내도 될까요?”
“무엇이든지요.”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대답이 어딘가 절박했다. 무슨 말이든 다 해 줄 것 같은 그 얼굴을 보며, 올리비아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머릿속을 채우는 수십 가지의 이성적인 질문들을 비집고,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사랑해요.”
생각했던 말이 아닌 듯, 에드윈의 눈이 커다래졌다. 붉은 눈동자 가득 제 모습이 담겼다.
새삼스러웠다. 아주 오랜만에야 그의 눈 속에 제가 담긴 것만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야 혼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된 건가.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손가락 위로 제 손가락을 얽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고조된 감정들은 명명된 이름이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는 에드윈이 더없이 애틋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니, 에드윈이 지고 있는 무게를 나눠 줘요. 그대가 제게 해 주었던 것처럼.”
태자한테 선대 대공비의 대용이라는 말을 듣고 불안에 떨었던 것은, 어쩌면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선대 대공 부부와 황실의 이야기도, 비칸데르령의 모두가 황제를 증오하는 기색을 보였던 진짜 이유도, 초록 눈의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았던 비칸데르령의 사람들까지도.
제가 넘기고 지나쳤던 수많은 조각들이 하나씩 또렷한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윈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대답을 쉬이 내어주지 않는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심장이 콩콩 빠르게 뛰었다. 저를 사랑하는 티를 완연히 내면서도 대답하지 않는 모습에 애가 타들어 가고 조바심이 났다.
무게를 나누지 않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입술이 바짝 말라서 중얼거렸다.
“그럴 수 있다면, 저를 리브라고 불러 주세요.”
좀 더 멋스럽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내내 고민하다 내놓은 말이라기에는 모양이 우스웠지만. 올리비아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아주 예전에는 엄마만 불러 주시던 이름이었고, 이제는.”
“…….”
“오직 에드윈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에요. 그러니…….”
“리브.”
정염처럼 들끓는 목소리가 제 애칭을 불렀을 때, 올리비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얼어붙은 듯 옆에 앉아 있던 에드윈은 어느새 소파를 짚은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암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제까지 듣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심장 박동이 쿵쿵 크게 뛰고 있었다.
“리브……. 리브, 리브.”
처음 단어를 배운 아이처럼 에드윈은 올리비아의 애칭을 불러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제 애칭이었다. 그럼에도 낯이 붉어질 만큼 매혹적인 목소리가 발음하는 이름은 어딘가 낯설었다.
“에드윈.”
“왜 자꾸, 내게 유리한 말만 해요.”
속내를 훑고 지나간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에드윈은 그녀와 짐을 나눠 지고 싶지는 않았다. 비칸데르의 척박했던 옛 모습은 냉큼 숨긴 채로, 부유하고 강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완벽히 독립한 비칸데르 공국, 혹은 황제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왕국.
그 안에서 올리비아를 완벽히 보호한 채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며 안온한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로웰과 관련된 것들이야 그 후의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 용감한 아가씨는 늘 그녀를 둘러싼 세계를 박차고 나왔다. 어떨 때는 숨 막힐 정도로 강하게, 또 어떨 때는 곧은 뒷모습이 흔들리지 않게 힘을 주고,
또, 어떨 때는.
“왜냐하면.”
이렇게 단단하게 웃으며.
“그건 에드윈한테만 유리한 게 아니라, 우리한테 유리한 거니까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에드윈은 잔뜩 쉰 목소리로 짧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올리비아를 향해 기울어졌다. 깍지를 낀 손이 소파의 등받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농밀한 분위기 아래에서, 에드윈은 곧은 시선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허락해 줄래요?”
숨결이 얽힐 만큼 가까운 거리.
올리비아는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얼굴이 가까워졌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입술이 천천히 서로를 향해 열렸다.
틈을 타고 침범하는 말캉한 감촉, 젖은 소리, 서툰 호흡에 올리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이 보이지 않자, 모든 감각이 더 선명하게 몰아닥쳤다.
다정하게 구는 척 다가온 입맞춤은 지독하게도 뜨겁고 강렬했다.
절대 잊을 수 없을, 첫 기억이었다.
* * *
“……로웰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해요. 초록색, 연두색, 하늘색.”
창틀로 어둠이 넘실거렸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직접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에드윈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올리비아가 말한 대로 내 어머니의 눈동자 색 역시 초록색이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
“로웰의 왕족과 고위 귀족의 눈 색깔이 초록색이었죠.”
감당하기 어려운 기분에 올리비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금 올리비아의 눈 색깔처럼.”
쐐기를 박듯 에드윈이 덧붙였다. 에드윈의 얼굴에는 장난 한 점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러면 엄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강하고 아름답던 어머니와 모든 상황을 마법처럼 반짝이게 만들던 춤과 노래까지.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에드윈과 맞닿았던 입술이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닿기만 해도 쓰라린 곳을 깨물자 금세 통증이 밀려왔다.
“안 되겠네요. 올리비아. 약이라도 발라야겠어요.”
나직한 목소리와 동시에 단단한 손이 조심스레 올리비아의 턱을 고정했다. 한결 짙어진 눈이 제 입술을 응시하며 쯧, 혀를 찼다.
그 탁한 음성 하나만으로도 조금 전의 열기가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손가락이 꼬물댈 수조차 없었던 긴장감이 스미듯 다시 한번 들이닥쳤다.
괜한 부끄러움에 올리비아는 시선을 내렸다. 속상한 듯 연신 입술을 들여다보던 에드윈이 희미하게 웃었다.
“……약은 좀 이따 발라도 괜찮으니. 계속 이야기해 줄래요?”
“학구열이 생각보다 훨씬 더 높군요. 올리비아.”
분위기를 환기하듯 농담이 던져졌다. 올리비아는 희게 웃었다.
“그냥, 이상해서요.”
“…….”
“저는, 엄마는 늘 손가락질만 받았는데. 로웰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초록 눈이었다는 게.”
올리비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목 안쪽을 긁듯 올라오는 이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서.
올리비아는 저를 바라보는 에드윈의 눈을 보며 문장을 끝마칠 단어를 골랐다.
억울하고, 서럽고, 때로는 슬펐고. 하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도 그녀는 엄마한테 물려받은 이 눈이 좋았다.
한참 만에야, 올리비아는 흐리게 웃는 얼굴로 말문을 닫았다.
“……이상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