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 방비하지 못한 한 가지 (106/151)


#106. 방비하지 못한 한 가지
2023.03.05.



 
황제 궁의 집무실.

오랜 적막 위로 요요한 시선이 쏟아졌지만, 황제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대공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가 생각나신다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폐하. 저는 이만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해서.”

허락이 아닌 통보였다.

하지만 그 오만한 태도에도 황제는 이를 악물며 참아야 했다.

그리고 대공이 집무실을 나선 후. 황제는 책상 위를 쓸듯 모든 물건을 내팽개쳤다.

와장창-. 뭔가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시종장이 다급히 들어왔다.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시종장이 서둘러 문을 닫았지만 황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노한 숨을 토해 냈다. 집무실을 누르던 기세가 사라지고 나서야 황제는 노여움을 터트렸다.


“감히, 감히!”

나간 대공을 향해 미처 쏟아 내지 못한 말들이 천둥처럼 집무실을 울렸다.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하며 황제가 핏발 선 눈으로 집무실 문을 노려보았다.

요요하던 붉은 눈이 뇌리를 파헤치듯 계속 떠올랐다. 대공이 남긴 말들이 다시 그를 덮쳤다.

.
.
.


“무엇을 그리 돌려 말하십니까. 로웰의 광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뻔히 보이는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간을 보며 겉돌던 황제의 말이 순식간에 끊어졌다. 흥미롭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붉은 눈에 황제는 이를 악물며 애써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놈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 역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광산이 공녀의 소유가 되었더군.”

내뱉는 말이 텁텁했다. 늘 황제의 무기가 되었던 광산이 이제 공녀의 손아귀에 있다니.

황제는 슬쩍 대공의 반응을 살폈다.

한평생 황제로 살아온지라 표정을 숨기는 것은 능란했으나, 처음 느껴 보는 긴장감에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옛날, 로웰의 공주를 닮은 아름다운 얼굴 위로 느리게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이내.

하하하. 대공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실로 즐거워서 웃는다는 웃음에 황제는 순간 심장이 훅 떨어졌다.

설마, 이미 공녀가 대공에게 광산의 소유권을 넘긴 것인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황제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았다. 그러는 사이 대공이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공녀가 아니라 예비 대공비, 입니다. 폐하.”

은근하게 떠보는 말임을 알면서도 대공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승산이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꺾어진 걸까.


“……그보다 이렇게 부르신 것은, 제가 말씀드린 대가를 준비하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무슨 대가를 말하는 거지?”

“지난 독대 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응당 제 것이어야 했던 것들에 대해 보상을 받고자 한다고.”

느른한 대공의 목소리에 황제는 침음을 흘렸다. 광산의 행방이 급해 대공과의 독대를 선택한 게 실수였을까. 붉은 안광이 유난히 형형했다.


“대가라. 제국의 충신이 제국을 위해 봉사한 것에 대해 대가를 달라니. 하하. 그대가 원하는 게 백수정 광산 아니었나?”

그는 호기를 부리듯 웃었다. 입이 바싹 말랐다. 대공은 재밌다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백수정 광산은 원래 로웰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응당 제 것이어야 했던 것을 빼앗긴 데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폐하.”

“하하. 제국의 대공이자 전쟁 영웅인 그대가 부족한 게 없을 텐데. 보상이라니. 말이나 해 보게. 무엇이 부족한지.”

“폐하께서는 제게 부족한 게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또한 장난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알고 있는 흔적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대공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휘어진 눈매 속 붉은 눈이 섬뜩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응당 제 것이어야 했던 것들을 앗아 가신 장본인 아니십니까.”

황제가 빼앗았고 응당 대공의 것이어야 했던 것들. 머릿속으로 짐작이 가는 것들이 수없이 떠올랐다.

순간 황제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이상한 낌새에 황제를 바라보던 붉은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마치 속을 파낼 듯 바라보는 붉은 눈에 처음으로 황제는 대공의 시선을 피해 오랫동안 고개를 숙였다.

* * *

황제의 침실, 가장 깊은 곳.


“응당, 놈의 것이어야 했던 것들이라…….”

황제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뒤집어 놓은 공주의 초상화를 응시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공주였다. 어미를 빼앗긴 새끼의 과거라도 보상해 달라는 말인가.

황제는 다시금 초상화를 뒤집으려다 고개를 저었다.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한결같게도 공주는 이리 박제된 상태에서도 제게 등을 보였다. 하지만 차마 되돌려 놓을 용기 따위는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그때 공주를 비웃어 주려 했는데. 정작 지금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지고한 황제인 저였다.

하. 통탄스러운 마음에 탄식을 내뱉은 황제의 머릿속에 순간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도 아니면 혹시…….


“선대 대공의 일을 알 리는 만무할 테고.”

황제는 불안함을 잠재우려 애써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세누아의 계곡으로 떨어졌습니다. 비칸데르 대공은 실종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확실하게 시신으로 보여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폐하.”

 
아직도 보고를 하던 이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지금은 저세상에 있겠지만. 그 일을 아는 자들은 모조리 다 죽었다.

처음에는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 화가 났지만, 실종으로 처리되어 시신조차 발견하지 못했어도 괜찮았다.

비칸데르령의 끝자락에 있는 세누아의 계곡. 악마의 입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험난한 북부의 계곡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황제도 잘 알았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지 모르겠다. 공주, 선대 대공, 백수정 광산, 그도 아니면…….

황제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공녀가 광산을 소유하게 된 뒤, 바로 제게 칼을 꽂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들은 무엇을 더 숨기고 있는 걸까?

빙그레 웃는 낯이 떠올라 황제는 머리를 짚었다. 생전 해 보지 않은 생각들이 밀려와 그를 괴롭혔다.

광산이 제게 있었더라면 이런 근심 따위는 없었을 텐데. 분한 마음에 황제는 싸늘한 눈으로 침실 바깥을 바라보았다.

침대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던 황실 가족의 초상화는 이미 떼어 버린 지 오래였다.

아프다는 핑계로 제 일조차 하지 못하는 황녀라니. 황후의 비호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황녀는 황녀로서 자신이 벌인 일에 책임을 져야 했다. 영원히 황녀에게 대공을 옭아매기 위해 했던 백수정 광산 증여가 이딴 식으로 돌아오다니!

치를 떨며 날카로운 눈으로 침실을 바라보던 황제의 머릿속이 순간 반짝했다. 황제는 서둘러 공주의 초상화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무심한 표정의 공주를 대면하면서, 황제는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 폐광산을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게, 정말 대공의 효심 때문이었을까?”

초상화 속 공주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독하게 번지는 열패감을 무시하며 황제는 초조한 숨을 내뱉었다.


“……모든 방비는 해 두었어.”

 


“고귀한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소리를 내던 사람들의 이야기죠. 궁금하지 않나요? 진심을 담아 노래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공주로부터 로웰의 전설을 들었을 때부터, 황제는 그 말이 전설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공주가 그 힘으로 어떻게 선대 대공의 상처를 낫게 했는지 직접 보았으니까.

그 힘이 두려워 로웰의 후손이라 생각되는 모든 초록 눈들을 핍박했고, 천한 무희라는 시선을 덧씌워 입조차 벙끗하지 못하게 했다. 그도 모자라 늘 쫓기듯 살게 만들었다.

당연히 사교계에서도 초록 눈들은 멸시의 대상이었다. 고귀한 공녀조차도 반쪽짜리로…….

순간 황제는 멍하니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또렷한 초록색의 눈들이 겹치며 마델레이네 공녀의 모습이 떠오른 순간, 황제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마델레이네, 마델레이네 공작을 속히 부르라!”

 

* * *

황제 궁의 정원.

에드윈은 빙그레 웃으며 윈스터를 돌아보았다. 평소 같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걱정했을 윈스터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오늘은 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안 물어보지?”

“오늘은 황제 폐하께서 책상을 뒤엎었다 이미 궁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습니다. 전하.”

입 무거운 황궁의 시종들. 그 사이에서도 가장 철벽같은 황제 궁의 시종들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윈스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벌써? 내가 문을 닫을 때야 책상 뒤집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전하께서 늦게 내려오신 것 아닙니까? 이미 빨래방까지 퍼지는 중입니다만.”

말을 하다가 윈스터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눈썹을 추켜올렸다.

황궁, 특히 황제 궁이라면 그토록 싫어하시는 전하께서 일부러 더 시간을 보내셨다? 황제의 복장 터지는 얼굴이라도 기대하신 걸까. 그도 아니면 무언가 걸리시는 게 또 있으셨을까.

하여튼 윈스터는 감도 좋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에드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잠시간 황제를 떠올렸다.

속내를 잘 숨기는 능구렁이 같은 황제가 대화 도중 갑자기 말을 삼켰다. 그리고 시선을 피했다.

제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짐작도 못 하는 상황에서, 마치 켕기는 게 있기라도 한 듯.

떨리는 호흡, 휘청거리던 시선, 어딘가 불안해진 듯 말아 쥐던 손가락까지. 에드윈은 황제의 모든 것을 확인했었다. 도대체 뭘까. 제가 바라는 게 무엇인 줄 알고 그토록 불안해했을까.


“……좌측 보지 마십시오. 눈 버리십니다.”

딱딱한 윈스터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좌측을 바라본 에드윈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경고한 윈스터는 굳은 표정으로 걸어오는 마델레이네 공작을 외면했다.

그렇게 무심히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예법에 깍듯한 공작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겠지만, 에드윈 자신도 그 인사를 마지못해 받아 주는 것이 전부인 싫은 사이.

그런데…….

눈이 마주쳤음에도 공작은 에드윈한테 예를 갖추지 않았다. 황제파의 수장이라 이건가, 어딘가 비틀린 마음이 뻗어 가려는 찰나였다.

에드윈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의 단단하고 뾰족한 얼굴과 달리 언뜻 보이는 공작의 표정이 얼이라도 빠진 것 같았다. 마치 무슨 충격을 받은…….


“전하! 대공 전하!”

황제의 정원에 대공을 부르는 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저 멀리 다급하게 달려오는 하워드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대신 무언가 이상한 얼굴이었다. 짓궂은 윈스터가 장난치듯 저 얼굴 좀 보라고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에드윈도 마찬가지였다.


“인터필드 경,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가씨 팔목에 멍이 들었답니다!”

순간, 에드윈의 눈이 번뜩였다.

* * *

올리비아가 생각한 오늘 저녁, 그러니까 대공저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단란했다.

아쉬움 섞인 카드들을 나눈 채 맛있는 저녁 식사를 먹고,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것.

하지만.


“아가씨. 누가, 아가씨의 손목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대공저에 도착해 디안이 제 손목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났다.


“으허허엉. 아가씨. 찜질을 해도 안 사라져요.”

“힐링 마법사, 아니 베서니 님이 오시는 게 가장 좋을까요?”

이를 갈듯 말하는 디안과 펑펑 우는 해나, 침착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소벨. 응접실 너머로 기웃거리며 걱정하는 하녀들과 하인들을 보는 순간.

올리비아는 그 모든 계획을 잊고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직 에드윈을 볼 준비는 안 되었는데. 해맑던 올리비아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