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후회의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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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후회의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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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후회의 시작점
2023.03.01.
“그렇게 굳은 걸 보면 대공령에 퍼졌다는 소문조차 대공은 그대한테 알려 준 적이 없나 보군.”
올리비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가가도 뒷걸음질조차 치지 않는 모습에 레오포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단 다섯 걸음.
좁혀진 거리가 만족스럽다 못해 벅찼다. 안쓰러운 건 잠시였다.
올리비아가 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떨리는 음성과 먹먹하게 번지는 표정이 전부였으니. 그녀가 우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이제 가장 연약한 틈을 제가 채워 주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알려 줄게. 올리비아.”
그는 꿀을 바른 듯 다정한 목소리로 올리비아가 믿고 있던 거짓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맹목적인 전쟁광으로 전쟁을 패하게 만든 선대 비칸데르 대공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거야.”
근사한 목소리가 이어짐에 따라 초록색 눈이 물끄러미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대 대공비, 그러니까 망국의 공주가 패전의 배상을 위해 직접 이 황궁으로 왔다는 것은 몰랐겠지.”
연결된 시선 하나만으로도 오싹한 희열이 그의 뒷덜미를 훑었다. 당연한 것을 되찾은 듯 안정감이 퍼졌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초록 눈을 보며 레오포드는 느릿하게 입맛을 다셨다.
황후에게서 들었던 추저분한 과거의 이야기를 이용한다면 얼마든지 상황을 다시 되돌릴 수 있었다. 가장 자극적인 단어로 골라 만든 이야기는 올리비아의 감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대공가의 미래를 위해 작은 대가만 바라셨지만 대공비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선대 대공비가 배상금의 문서를 들고 직접 온 거지. 뻔하지 않겠어? 망국의 공주라 뒷배 없는 신분에 가주가 죽고 어린 아들만 있으면. 젊은 시절 연이 있었던 폐하께 은덕을 바라고 싶었겠지. 어쩌면.”
“…….”
“폐하의 환심을 사는 방법으로 떠올린 것이 배상금일 수도 있었을 거고.”
레오포드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낮아졌다. 호선을 그린 입매 끝에 묘한 비웃음이 걸렸다.
“아니면 대륙에 소문났다는 미모였을 수도 있고 말이지. 초록색 눈이 오묘하게 반짝이는 게 그리 요사스럽고 아름다웠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올리비아?”
레오포드는 느른하게 웃었다. 역시나 올리비아의 굳은 표정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 상황에서 올리비아가 따라와야 할 사람은 저밖에 없었다. 묘한 승리감이 레오포드를 흥분시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올리비아는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적막이 계속 이어졌다. 슬슬 조바심이 일었다.
지금이라도 무너져 제 품에 안겨 울면 좋을 것을, 올리비아는 지독하리만큼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애써 여유로운 얼굴을 하며 레오포드는 천천히 올리비아의 얼굴에 제 얼굴을 기울였다. 영롱한 초록색 눈에 제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갔다.
“그런 어미를 둔 것도 모른 채, 대공 그놈은 선대 대공비가 억지로 끌려갔다고 생각하고, 복수랍시고 내게서 그대를 앗아 가…….”
“차라리 사과를 하지 그러셨습니까. 전하.”
말허리를 자르는 덤덤한 목소리에 레오포드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제 품에 안길 듯 가까웠던 올리비아는 어느새 서늘한 얼굴로 저를 마주 보고 있었다.
“……뭐?”
“그렇다면, 이렇게 진저리치게 싫은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올리비아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던 눈 위로 순식간에 경멸이 덧씌워졌을 때, 레오포드의 심장이 진창에 처박혔다.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잠깐만, 올리비아.”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올리비아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동시에 탁, 레오포드의 손등 위로 아릿한 감각이 퍼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헉, 하는 숨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레오포드는 그조차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한테 단 한 번 맞아 본 적 없는 고고한 자존심 위로 상처가 났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올리비아. 지금 그대가 한 행동은 도가 지나쳐.”
“전하께서야말로 최소한 제국을 위해 맹렬히 싸우다 전사하신 영웅의 이야기를 이렇게 만들지는 마셔야죠.”
올리비아는 드레스를 말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통증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목 안쪽이 날카롭게 찔리는 느낌이었다.
이 순간, 에드윈이 절실히 보고 싶었다. 제국의 태자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밑바닥까지 보여 줄 수 있는 걸까.
그것도 제국을 위해 나선 전쟁에서 전사한 기사와 그 기사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서.
“그게 무슨 말이야 올리비아. 내 말을 이해 못 하겠어? 그대는 그저 대공 그 X끼한테 복수의 전리품밖에 안 되는 거라니까?!”
답답함에 레오포드가 버럭 성을 냈다.
“선대 대공비 역시 초록 눈이라 했으니 그대가 받는 사랑은 선대 대공비의 대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왜 몰라!”
레오포드는 성마른 감정을 억누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덕분에 올리비아의 표정 위로 깨달음이 번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성을 내며 올리비아를 공격했다.
“둘째 공녀의 대용으로 살던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선대 대공비의 그림자까지 지니며 살 생각이야?”
“대용이든, 전리품이든 그건 대공 전하와 저의 사이의 일이지, 태자 전하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선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 대용, 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올리비아의 얼굴은 지독하게도 차가웠다.
레오포드는 저도 모르게 올리비아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어딘가에라도 망설이는 기색이 비치길 바랐지만 올리비아는 시리도록 건조한 얼굴로 레오포드를 응시했다.
잘생긴 얼굴 위로 동요가 숨길 수 없이 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다가, 초조함이 가득한 눈을 연신 깜박였다. 레오포드는 하,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오기 부리지 마. 올리비아. 내가 그대를 잡을 때, 내게 다시 돌아와.”
“…….”
“대공은 그저 내가 가진 거라면 뭐든 빼앗고 싶은 거야. 내가 그대한테 관심이 없다면 언제든 사라질 사랑인지도 모르지. 기억 안 나? 내가 첫 춤을 청하려던 날, 그자가 경쟁하듯 올리비아 그대한테 춤을 청한 것.”
이제 레오포드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의 머릿속에 에드윈은 천하의 개자식이었다. 첫 춤을 빼앗겼다는 억울함에 레오포드는 다시 한번 화를 냈다.
“올리비아!”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성화 같은 재촉에, 올리비아가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그 순간 레오포드의 잘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면 그렇지.
“제가 전하께 보여 드릴 수 있는 건 이제 뒷모습밖에 남지 않았는데.”
“……올리비아?”
순간 레오포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올리비아는 시종일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는 지금 올리비아가 무슨 표정을 하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듯 호흡이 가빠졌다. 이건, 처음 느껴 보는 불길한 감정이었다.
“싫든 좋든, 저는 전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요.”
맞았다. 올리비아는 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좋아하는 향기, 소품, 식성, 복장의 취향, 하다못해 꽃의 종류까지.
제 취향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티아제 궁처럼.
“자존심은 지킨 채로 저를 곁에 두고 싶으셨나요?”
“올리비아!”
“충성을 바친 선대의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꾸며 내어 저를 조롱해서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대도 알잖아.”
억눌리듯 잠긴 목소리가 다급하게 올리비아의 말 위로 쏟아졌다. 변명하듯 서둘러 말을 고르는 레오포드의 얼굴을 보며 올리비아는 새삼스럽다는 듯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감한 시선이 닿는 얼굴이 한 꺼풀 한 꺼풀 무너지기 시작했다. 레오포드의 표정 위로 절박함이 묻어났을 때, 올리비아는 직감했다.
아, 이제 저는 정말로 태자와 아무런 연이 없어졌다. 그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아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끝없이 저를 농락하고 손아귀에 넣으려 했던 태자는 얄궂게도 그 허황된 포장으로 인해 저를 일깨웠다.
“하지만 저를 모르는 전하께서는 이미 패착을 두셨습니다.”
희게 질린 태자의 얼굴을 보며 올리비아는 태연하게 웃었다. 아까 쫓기듯 뒷걸음질 치던 제 자신이 우스울 정도였다.
“제게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분이, 어떻게 제국에 충성을 다 바친 선대 대공 전하께 그런 무도한 말씀을 하십니까? 전하께는 충정도, 애정도, 사랑도 아무것도 닿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아니야, 올리비아. 아니야.”
레오포드가 밭은 숨을 내뱉었다. 늘 여유롭고 오만한 태자는 처음으로 속내를 들킨 채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발가벗겨진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정작 저를 꿰뚫어 본 올리비아는 손에 잡히지 않을 것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그의 어깨너머만 바라보았다.
아무리 해도 그는 올리비아의 시선 한 가닥 받아 낼 수 없었다. 저를 바라보지 않는 그녀는 앞으로도 영원히, 제게 한 점 웃음을 내어주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동시에 레오포드는 조금 휘청였다.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어야 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강인한 턱이 덜덜 떨려 왔다.
“……공녀. 올리비아. 리브.”
꿀을 바른 듯 달콤한 목소리가 점점 절박해졌다. 마치 구원을 바라듯 올리비아를 불렀다.
근사한 남자는 꼭 길 잃은 다섯 살짜리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도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바다 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연약한 속내를 내비쳤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해야, 아니 내가 어떻게 할까.”
“…….”
“그대가 원하는 게 무언지, 내가 맞춰 볼까?”
올리비아는 웃지 않았다. 감춰 둔 공포감이 더럭 몰려왔다. 주춤, 또 주춤. 레오포드가 걸음을 옮기며 애써 웃었다. 잘난 얼굴이 희게 질린 채 입꼬리만 올리는 건 기괴하다 못해 우스웠다.
“마리아는 타국으로 보낼 거야. 걱정하지 마. 그대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온다면, 내 진실로 그대만을 바라보겠다 약조할게.”
“…….”
“티아제 궁의 이름을 바꾸는 건 어때? 그대의 이름으로 바꿔 줄게. 궁의 예산 따위 얼마든지 올려 줄 수 있어.”
서툰 애원이 쏟아졌다. 누군가한테 감정을 바라는 일이 있을 줄 몰랐다. 능숙하게 마음을 취할 줄만 알던 이가 진심을 얻는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일 거다.
올리비아는 새삼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멋대로 부푼 레오포드의 마음은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웃음은 기대를 품었던 레오포드가 무저갱 아래로 추락하기에 충분한 답변이었다. 그 웃음조차 그가 아닌, 궁에게 남기는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모르는 게 다행이었다.
가만히 레오포드를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문 너머로 멀어졌을 때, 레오포드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올리비아!”
지금 놓친다면 더 이상 올리비아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숨 막히는 상실감에 레오포드는 헐떡이며 정문으로 뛰어갔다. 올리비아가 나가느라 열려 있던 정문을 통과했을 때.
“올리비, 아……!”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 저 멀리 마차 한 대가 떠나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올리비아가 타고 간 것처럼 느껴져서, 레오포드는 하, 처참한 숨을 뱉으며 벽에 기대었다.
이상하게도 그 앞에는 마델레이네 공작이 서 있었다.
“공작, 올리비아한테…… 내 이야기는 했나?”
이상하게도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작을 다그칠 정신조차 없었다.
올리비아가 사라졌다. 시야에서도, 어쩌면 제 세상에서도 완전히.
레오포드는 무너지듯 서서히 벽에 기대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올리비아. 그대가.”
희미하게 나오는 목소리에서 물기가 습습하게 묻어났다.
난생처음 한 지고한 태자가 아닌 남자로서의 고백이었다. 마리아에게서 느꼈던 것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찔하고 지독했다.
그럼에도 저를 두고 간 올리비아가 야속해서, 지난했던 과거의 일이 해일처럼 몰아닥쳐서, 이 모든 상황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레오포드는 믿을 수 없는 이 상황 앞에서 다시 궁만 바라보았다. 은빛의 태자비 궁은 이곳에 있는데, 주인은 멀리 떠나갔다.
솔직해야 했었을까. 아니면 애걸을 해야 했었을까.
설핏 무력감을 느끼던 며칠 전의 밤이 떠올랐다. 지독하게 예쁜 올리비아를 바라보면서, 그때라도 바뀌었어야 했다.
바위처럼 단단한 마음이 제게 돌아서지 않을 게 여실히 느껴져 레오포드는 숨을 참았다. 이내 발밑이 꺼지듯 아득한 어둠이 그를 짓눌렀다.
* * *
올리비아는 걸음을 옮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결에 제 이름을 부르는 듯한 레오포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멀찍이 가는 마차가 걸어가는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분산시킨 게 다행이었다.
올리비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뻔하게 느껴졌다. 분명 공작일 테지.
“……이 마차를 타고 가.”
이상한 일이었다. 티 파티가 한창일 텐데 공작이 티아제 궁 앞에 있다니. 마치 알에서 깨어난 것처럼 멍한 표정이던 공작은 타고 온 마차를 가리켰다.
공작이 권하는 마차를 탈 일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제 와서.”
중얼거리던 올리비아는 느리게 입술을 닫았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왜 자꾸 사람을 저열하고 나쁜 마음을 먹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올리비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토해 내는 숨에 공작과 콘라드를, 제이드를 담아 비웠다. 그들이 없어도 생각해야 할 건 많았다.
가장 중요한 건.
“왜 말하지 않았을까…….”
“비칸데르에서는 초록색 눈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른 눈들처럼.”
문득 에드윈의 말이 떠올랐다.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