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수요일 오후 2시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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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수요일 오후 2시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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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수요일 오후 2시의 악몽
2023.02.26.
살랑이는 여름 바람에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번졌다.
황제는 잔뜩 굳은 얼굴로 한곳을 바라보았다.
티 파티에 웃음이 동반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 웃음이 번지는 곳은 헤페르티 사절단 측의 테이블이었다.
그 앞에 헤페르티를 패하게 만든 장본인인 비칸데르 대공이 앉아 있는데도 말이다.
시선을 느꼈는지 대공이 슬쩍 황제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이 조소를 담은 채 휘어졌다.
심장이 선뜩해지는 것을 애써 누르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너울졌다. 황제의 바다 빛 눈 위로 불꽃이 튀었다.
공녀가 대공에게 백수정 광산의 명의만 넘기지 않았다면, 승산이 있었다.
잔을 쥐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쨍-. 잔이 받침에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하지만 화사하게 만개하는 웃음소리를 가르지는 못했다.
황후만 흠칫 놀라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애써 웃음 짓는 얼굴 아래로 노여움 서린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우습지 않소. 황후. 저 자리는 태자가 앉아야 할 곳인데.”
황후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찬사를 받는 듯 웃고 있는 올리비아의 자리 역시 황녀의 것인데, 황제는 황녀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도대체 태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휴식이 끝났을 테니, 속히 데려오겠습니다. 폐하.”
“나 역시 광산의 일로 대공과 독대를 할 예정이니, 빠르게 태자를 데려오게.”
노련한 시종장이 황제에게 다가왔다. 황제가 명하는 사이, 황후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광산의 이야기가 나온 이상 황녀를 언급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잔뜩 졸아든 마음으로 오프템 후작 부인을 불렀다.
“대공령으로 보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아직도 연락이 없어?”
황후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애가 타다 못해 사라지는 것만 같을 때였다.
“폐하. 그자가 조금 전, 황궁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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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네요. 올리비아.”
귀족들은 귀를 쫑긋했다. 조금 전 황제의 시종장이 와 비칸데르 대공에게 무어라 속삭이더니 이내 대공이 아쉬운 소리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 공녀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저도 함께 일어나야겠어요. 여기 계신 신사분들께 즐거운 시간을 선사 받았습니다. 부디 제국에 계신 동안 평안하시길.”
“지금만 해도 영애께 차고 넘치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먼저 가시는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공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절단 모두가 배웅을 하듯 일어났다. 격식에 맞춰 대표인 키월 공작이 공녀의 앞에 나아갔다.
미미하게 수군대던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황녀의 손등에도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은 키월 공작이 나서서 공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제국의 귀족으로서 불쾌한 티라도 내는 게 마땅한데. 귀족들은 하나같이 묘한 얼굴로 공녀와 키월 공작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귀족파의 수장인 엘킨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요.”
“이상하고 말고요. 공녀, 아니 영애는 원래 사교계에서 웃기는커녕 어울리지도 못했었는데. 패전국 사절단과는 저리 웃으며 지내다니.”
“둘 다 이방인이나 다름없으니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건가요?”
엘킨 공작은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애써 가라앉혔다. 질투 섞인 목소리들은 모두 공녀를 향한 것이었다. 겉돌던 공녀가 사교계를 이렇게까지 들썩이게 하다니.
한번 눈에 들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더 쓸모가 있어 보였다. 괜히 에텔 후작가에 시간만 버렸다.
이제 그가 직접 공녀한테 말을 걸기 위해 일어날 시간이었다.
엘킨 공작은 상석을 눈짓하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뜻 돌아본 상석에 황후는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리를 지키셨던 분이. 황녀도 없는 곳에서 다급하게 자리를 비울 분은 아닌데…….
잠시 생각을 하던 엘킨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멀리, 저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공녀의 뒤를 따라가는 이가 있었다.
마델레이네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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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까지만이라도 배웅하게 해 줘요.”
“이미 많이 배웅해 주셨답니다. 대공 전하. 폐하께서 찾으신다면서요. 에드윈. 빨리 가 보세요.”
“어차피 내가 유리한 상황인데요. 뭘.”
“유리한 상황이니 더욱 가 보셔야죠.”
하여튼 하나 안 봐주고 똑 부러지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이 똑 부러지는 말끝이 제게만 부드럽게 굴려진다는 걸 알았다.
“귀한 이름을 쉽게 밝힐 수는 없죠. 공작님.”
조금 전, 무슨 보석이냐고 묻는 키월 공작의 말에 선을 긋던 것에 비한다면, 나긋하기 짝이 없는 대응이기도 하고.
우아하게 마석을 가려 숨기는 태도도, 친분이 없다는 것을 일깨우던 모습도, 사교계의 교본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난 뒤, 바로 제 디저트를 챙겨 주는 모습이라니. 당장이라도 비칸데르로 함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겨우 삼켰다.
지독하게도 아쉬운 티를 내는 에드윈과 달리, 올리비아는 티 파티가 벌어지는 정원을 곁눈질했다.
시선이 이쪽으로 몰렸다. 에드윈을 기다리는 헤페르티의 사절단과 타 귀족들, 그리고 콘라드까지.
하지만 온실 정원의 초입까지 함께 걸어왔음에도 에드윈은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숨 막히게 예쁜 얼굴로 처연한 척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며칠이나 보지 못할 텐데. 더 이상 조르지도 않고 딱 마차까지만 배웅한다는 내가 예쁘지도 않나요?”
“요즘 들어 미인계를 자주 쓰네요. 에드윈.”
“미인계라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에드윈이 올리비아의 손을 슬쩍 끌어당겼다. 단 두 걸음만 옮겼을 뿐인데 정원수의 그림자에 귀족들의 시선이 완벽히 차단되었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들이 멀어지고, 찬란한 햇살이 눈부셨다.
에드윈의 눈꼬리가 고혹적으로 휘어졌다.
“……어떻게. 넘어와 줄 생각이 있으신지.”
곱게 휘어진 눈매에 넘어갈 뻔했지만, 올리비아는 시침을 뚝 떼었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햇빛에 두 개의 반지가 반짝였다.
“그 얼굴은 이미 제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전하.”
“어쩌나.”
웃음 섞인 나직한 한숨이 귓가의 솜털을 간질였다. 올리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리를 감싸듯 바투 닿은 단단한 몸만큼이나, 서늘하고 맑은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내 무기가 얼굴뿐이 아닐 텐데?”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숨결이 닿았다. 낯이 뜨거워져 벗어나려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맞닿은 품에 얼굴을 묻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몸 아래로 심장 박동이 쿵쿵 울렸다.
누구보다 여유로운 얼굴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 반칙이었다.
키월 공작과 콘라드 사이에서 잔뜩 곤두서던 긴장이 다른 의미로 뾰족해졌다.
올리비아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보기로 했다. 누군가 본다면 에드윈과 제 사이를 과시할 수 있을 테고, 아니라면……. 사실 아니어도 좋았다.
포기다.
올리비아는 옅은 숨을 내쉬며 웅얼거렸다.
“제 평생에 밀회를 가지는 기분을 맛볼 줄은 몰랐어요.”
보기는 많이 봤는데.
뺨을 기댄 품이 작게 울렸다. 웃음을 담뿍 담은 목소리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싫나요?”
“……이것도 미인계인가요?”
장난기가 다분한 질문이 민망해서, 올리비아는 부러 다른 대답을 했다. 에드윈은 짓궂게 웃었다.
“점점 단수를 높이라는 올리비아의 명에 충실할 뿐이죠.”
이마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사라졌다.
“더불어 내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가득 차기를 바랄 뿐이고.”
이미 꽉 차 버렸다. 비칸데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삼켜 버릴 정도로. 머릿속을 헝클이던 뾰족한 미움들이 살살 달래진 느낌이었다.
의외로 순순히 놓아준 품이 아쉬워서, 올리비아는 붉은 얼굴로 이마만 매만졌다.
덕분에 올리비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것은 오롯이 에드윈의 몫이었다. 손끝이 살짝 닿은 사슴처럼 우아한 목덜미가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상기된 얼굴이 지독하게도 사랑스러워서, 에드윈은 마치 기도하듯 속내를 드러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나를 최우선으로 여겨 줘요.”
작은 얼굴이 느리게 끄덕였다. 에드윈은 조금 더 바라며 올리비아를 졸랐다.
“시간이 늦었어요. 적어도 내일 출발하는 건 어때요?”
태양이 가장 높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적당한 타협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은 피식 웃음을 삼켰다.
“……참, 보석 이야기는 에드윈이 마무리해 줄래요?”
한참 만에야 올리비아는 목걸이의 마석을 감싸 쥐며 말했다. 그제야 에드윈은 올리비아의 손등에 입 맞추던 키월 공작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면, 보석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 해도 될까요. 영애?”
“그럼요. 당연하죠.”
마석에 대해 아는 이가 있다면, 에드윈으로서도 환영이었다.
* * *
에드윈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다 황제 궁으로 향했다.
황제 궁을 제외하면 이 여름 온실을 포함해 다른 궁들까지 올리비아만큼 꿰고 있는 이가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에드윈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듯 몇 번이나 그녀에게 당부했다.
“꼭 디안과 함께 움직여야 해요.”
에드윈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쉬러 간 디안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빼고 주변을 살폈다.
강렬한 빨간 머리가 눈에 띌 법도 한데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혹시 궁내에서 길을 잃은 게 아닐까. 그제야 올리비아는 디안이 제도 근처로는 와 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차 했다.
다시 에드윈한테 돌아가 봐야 하나, 아니면 디안이 먼저 돌아오려나. 잠시 고민을 하던 찰나였다.
올리비아의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추어 섰다. 창문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부인.”
올리비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티아제 궁의 시녀장인 소프론 남작 부인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부인께서도 편안히 계셨나요?”
의례적인 인사말이었는데, 순간 부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예. 공녀님 덕분에 다시 궁을 되돌리며 편해졌습니다.”
이상한 말이었다. 제 덕분에 궁을 되돌리다니.
무언가 찜찜한 느낌이 스쳤지만 올리비아는 다시 묻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소프론 남작 부인은 마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마차는 어디에 있으십니까?”
“기다리는 이가 있어서요.”
“혹시 비칸데르 문양이 새겨진 기사복을 입은 기사를 기다리시는지요? 붉은 머리의 기사였는데.”
디안이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혹시나 해서 기억했는데, 반대편으로 가는 걸 보았습니다. 제가 기사를 찾는 걸 도와드리면 어떨까요, 공녀님?”
느낌이 이상했다. 너무 착착 모든 게 맞춘 듯 떨어져서. 올리비아가 고개를 저으려던 찰나였다.
“그때, 마지막 날. 궁을 보실 때 조급하게 굴었던 것에 대한 죄송함의 표시로 여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의 얼굴 위로 그날의 기억이 내려앉았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부인이 희부옇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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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내 기사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로군요.”
마차가 도착한 곳은 티아제 궁이었다. 창밖에 보이는 정원은 제 기억 속의 티아제 궁과 확연히 달랐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소프론 남작 부인은 묵묵히 사과했지만, 꽉 다문 입속에 실망감이 가득 찼다. 올리비아는 물끄러미 부인을 바라보았다.
무던하고 성실한 이였다.
“티아제 궁의 시녀장으로서, 이 궁을 가장 아껴 주실 분은 공녀님밖에 없으시다는 것을 늦게야 알았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도 수국의 잔향을…….”
“마차 돌려요.”
“공녀님. 제발 다시,”
애타게 공녀를 부르던 소프론 남작 부인은 흠칫했다. 공녀는 제가 본 그 여느 때보다 위엄 있는 자태로 앉아 있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묵직한 분위기가 마차를 휘감았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녹색 눈동자가 무감하게 부인을 마주했다.
“호칭을 똑바로 하시지요. 부인. 나는 공녀가 아니라 예비 대공비입니다.”
“…….”
“비칸데르 대공가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부인뿐 아니라, 부인께 이 일을 시킨 분에 대해서도.”
올리비아는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지독하게도 익숙한 정원, 그 위에 제 기억에서 하나 흐트러짐 없이 놓인 티 테이블까지.
하. 올리비아는 시린 웃음을 지었다. 과거 내내 저를 기다리게 만들었던 세팅과 똑같았다.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게도.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그러니 관대한 처분을 구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내려요. 부인.”
결국 갈피를 잃은 부인의 시선이 수그러들었을 때. 마차는 부인을 내려 준 뒤 다시 티아제 궁의 정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혼자가 된 마차 안에서야 올리비아는 가늘게 떨리는 양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얕은 숨을 내쉬었다.
가냘픈 안도감이 서서히 온몸을 감쌌다. 황궁은 이런 곳이었는데, 제가 너무 안일하게 굴었다.
어서 에드윈한테 가서 모든 것을 말해야지. 그리고, 진실로 저들을 가만두지 않아야지.
초록빛 눈동자 위로 싸늘한 분노가 짙게 번져 갈 때였다.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서며, 말이 요란하게 우는 소리가 났다.
무방비하게 휘청이던 올리비아는 갑자기 열리는 마차의 문을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내 약혼녀께서는 수요일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군.”
잘생긴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라는 듯 안도 섞인 웃음을 보며 올리비아는 드레스를 말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여기에 온 걸 아는 이가 누가 있을까.
불안함이 온몸을 덮쳐 왔지만 침착해야 했다.
저 앞이 정문이었다. 여차하면 뛰어갈 수도 있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뛰었다.
그러는 사이, 레오포드는 예의 그 오만한 얼굴로 나직하게 웃었다. 그제 밤, 저를 절절하게 바라보던 표정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뭐, 내가 조금 늦게 오긴 했지만 가만히 나를 기다릴 줄 알았는데. 이리 성난 망아지처럼 그새를 못 참고 나를 마중 나온 거야?”
에스코트를 하는 손을 무시한 채, 올리비아는 혼자 마차를 내려왔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하게끔 보이게 말했다.
“제국의 작은 태양께 경배를. 제 약혼자가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려고. 내가 그대를 위해 내 궁의 태자비 방을 준비했는데.”
달콤하게 포장한 목소리와 동시에 낚아채듯 강한 힘이 올리비아의 손목을 잡았다. 강한 통증이 번지며 올리비아의 심박이 크게 뛰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하는데, 새하얘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온통 에드윈뿐이었다.
올리비아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애써 힘을 주었다. 그리고 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말씀을 하실 거면, 적어도 옷은 갈아입고 오시는 게 예의겠죠. 전하.”
단정한 목소리의 지적에 레오포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뒤늦게 아차 하며 올리비아를 잡은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마리아 에텔이 매달렸던 팔 쪽에 붉은 입술 자국이 찍혀 있었다.
젠장. 황후 폐하가 오시고 나서도 끈질기게 매달린다 했더니.
당황한 나머지 레오포드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 틈을 타 올리비아는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초록색 눈 위로 희미하게 경멸과 경계가 이지러졌다.
“올리비아.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처음으로 에텔 영애가 가엾어졌습니다.”
“……뭐?”
“그리 애잔하게 매달리는 이를 두고 전하께서는 지난한 과거에 매달리시는군요. 그것도 전하께서 이미 놓쳐 버리셨던.”
덤덤한 목소리가 레오포드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럼에도 무표정하게 저를 바라보는 얼굴이 한없이 아름다워서, 레오포드는 한쪽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비틀어진 속내가 음습하게 젖어 들었다.
“곱게 들이려 했더니. 그대는 늘 상처투성이로 내 곁에 남고 싶은 모양이야.”
올리비아는 대꾸 대신 느리게 뒷걸음질 쳤다.
바다 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뜩이며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느릿한 걸음이 올리비아를 따라왔다.
“내가, 올리비아 그대의 자존심을 위해 이 이야기는 쭉 숨기려 했는데.”
“…….”
“비칸데르령으로 갔을 때, 즐거웠나?”
나직이 노래하듯 말하는 목소리가 심상찮았다. 올리비아는 애써 레오포드의 말을 무시했다. 조금만 더 가면, 정문이었다.
“모두가 그대를 어여쁘다 했겠지. 뭘 해도 사랑해 주었겠지.”
레오포드는 느리게 올리비아를 따라갔다.
우아하게 올린 은빛 머리카락도, 음심을 돌게 하는 가냘픈 목선도, 이제야 만개한 듯 아름다운 얼굴도. 다 제 것인데.
올리비아는 왜 저리 도망을 치고 있을까. 어차피 그녀가 돌아올 곳은 제 옆인 것을. 레오포드는 실소하며 황후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대공령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답니다. 태자. 얼른 가서 그 애처로운 아이한테 말해 주세요.”
“가엾은 올리비아. 그 사랑을 즐겼던 거야?”
그리고 웃음을 섞어 말했다.
“그것들이 그대가 아닌, 선대 대공비를 향한 것인 줄도 모른 채로?”
바쁘게 뒷걸음질하던 올리비아가 잠시 굳었다. 레오포드는 씩 웃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쐐기를 박았다.
“영특한 그대가 설마 대공 그 빌어먹을 놈이 첫눈에 반했다는 뻔한 말을 믿었던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