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제도에서의 마지막 티 파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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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제도에서의 마지막 티 파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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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제도에서의 마지막 티 파티 (2)
2023.02.22.
“……마침 적절하게 나타났군요. 소공작.”
황후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그 얼굴에 서린 의기양양한 미소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콘라드는 누구보다 공작을 닮았다. 그러니 그는 동생의 안위와 황제파인 가문을 위해, 황후의 편에 설 거였다.
그 결정이 설사 에셀라의 의사와는 상관없다 할지라도 말이다.
“공녀의 첫 티 파티를 부담으로 가득하게 만들 수는 없지. 소공작이 공녀의 공을 칭찬하고 휴식을 하게 에스코트를 해 줘요. 몸 약한 공녀가 힘들어하면 그 또한 속이 상할 테니.”
“걱정에 감사드립니다. 안 그래도 첫 티 파티 주관을 황궁에서 하게 되어 염려했는데.”
콘라드의 대답은 올리비아의 예상을 비껴가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리는 에셀라와 달리 올리비아는 빙그레 입꼬리만 올렸다. 실망도 두려움도 없이 콘라드를 마주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콘라드의 말은 제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에셀라가 마땅히 차지해야 할 티 파티의 호스트 자리를 내주게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때였다. 잠시간 콘라드의 말이 끊어진다 싶더니,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히 황후겠거니, 고개를 든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콘라드였다. 여태껏 저를 바라보는 콘라드의 시선은 둘 중 하나였다. 경멸하거나 혹은 미워하거나.
그런데 지금 저를 바라보는 그는 이상했다. 눈이 마주치게 무섭게 시선을 피하다니.
“……황후 폐하의 조언을 새겨들어 저 역시 이곳에서 에셀라의 티 파티에 적극 협력하겠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죠, 소공작?”
나직한 음성에 귀를 의심한 건 올리비아뿐이 아니었다. 화사하게 웃던 황후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다행히 여기 계신 숙녀분들의 지혜와 도움으로 준비를 매끄럽게 한 모양입니다.”
황후는 입술을 달싹였다.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모두 황후를 주목하고 있었다.
“……소공작은 따로 할 일이 바쁠 텐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확인하려 하다니. 제국의 위상에 맞게 사절단에 신경 쓰는 게 낫겠어요.”
“저는 실무진으로서, 사절단이 불편함 없게끔 작은 부분까지 신경 써야 마땅합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황후는 소공작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과거 제 딸의 손까지 잡으며 첫 춤을 추었던 소공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틈이 보이지 않았다.
황후는 이를 악물었다. 불안감이 번지는 마음과 달리 환하게 웃어야 했다.
“……공작께서는 아주 행복하시겠어요. 소공작. 이리 똑 부러지는 자식들이 있고 말이야.”
웃음을 담뿍 담은 말속에 비수가 꽂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 콘라드의 눈이 조금 떨렸다는 것은 올리비아만 알아챌 수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눈빛과 달리, 콘라드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옆에서 다행이라며 웃는 에셀라의 속삭임이 조금 멀게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저건 모두 콘라드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올리비아는 잠시 주먹을 꽉 쥐었다. 답지 않으면 어떻고, 다우면 어떨까. 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데.
계속 이상하게 일렁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올리비아가 돌아섰다. 저 멀리 사절단과 귀족들이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기묘한 티 파티였다. 타국의 사절단을 초대해 놓고 태자도, 황녀도 없는 티 파티라.
오찬 때까지만 해도 참석했다는 태자가 두통으로 자리를 물린 가운데, 황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호스트로 나설 수 있다는 황후의 말과 다른 행보였다.
귀부인과 영애만 있는 보통의 티 파티라면 모를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사절단 접대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모든 귀족들은 똑같이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 황제가 다정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다 커다랗게 말했다.
“오찬을 즐겼으니, 제국의 티 파티도 한번 즐겨 봐야 않겠소? 마델레이네의 둘째 공녀가 수고로이 준비했으니 모두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라오.”
황제의 말과 함께 티 파티가 시작되었다.
호스트인 에셀라가 예법에 따라 인사를 했지만, 귀족들과 사절단의 시선은 삽시간에 다른 곳을 두리번거렸다.
둘째 공녀라니. 그렇다면 황제께서 직접 첫째 공녀의 자리가 여전함을 거론하신 게 아닌가.
하지만 어디에 자리 잡았는지 올리비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귀족들은 단박에 대공을 힐끔거렸다. 헤페르티 사절단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대공은 서늘한 눈으로 황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스레 의견을 표출했다.
“아직 공녀로 인정하신다는 건, 태자의 약혼녀로 다시 되돌리신다는 것 같은데.”
“에텔 영애가 일을 저질렀으니, 어떻게든 수습을 하셔야 했을 테죠.”
“대공 전하께도 언질 없으셨던 거 아닌가요?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표정이 안 좋나요, 에드윈?”
순간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이 뚝 끊어졌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올리비아가 우아한 걸음으로 헤페르티 사절단의 테이블로 걸어왔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에드윈이 올리비아를 보고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동그랗게 뜬 눈이 귀엽게 느껴졌다.
“……올리비아가 통 보이질 않으니, 안타까운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긴 했죠.”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올리비아는 작게 웃었다.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도통 돌아봐도 안 보였는데.”
연회장이 있는 궁의 지름길을 올리비아보다 더 잘 아는 이는 몇 없을 거였다. 시종들만 다니는 길까지 꿰찬 지가 몇 년이었다.
“그야…….”
뜸을 들이는 동안 에드윈이 눈을 반짝였다.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비밀이죠.”
“에이. 우리 사이에서도요?”
“그러면 더더욱 비밀로 해야겠네요. 원래 비밀이 많을수록 신비로워 보이잖아요.”
으스대듯 가볍게 웃으며 올리비아는 주변 귀족들의 시선을 기민하게 살폈다.
황제가 언급했던 ‘둘째 공녀’라는 단어에 긴가민가했던 귀족들은 가만한 눈으로 올리비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과시하듯 에드윈의 이름을 부른 건 일부러였다.
이제 다시 귀족들은 저와 에드윈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었다. 마델레이네 둘째 공녀, 라는 단어는 잊은 채로.
귀족들을 살피던 올리비아의 시선에 헤페르티 사절단 테이블에 앉은 콘라드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이상한 얼굴은 아까와 똑같았다.
잔잔하던 마음이 일렁였다. 이 기묘한 파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몰라서, 올리비아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의 말만 아니었어도 그냥 돌아갔을 텐데. 왜 이곳에서 저는 이 이상한 기분을 맛봐야 하는 걸까.
얼룩진 진창으로 끌려 내려가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싶은 마음.
빨리 비칸데르령으로 돌아가야겠다, 속으로 다짐할 때였다.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신비로워서, 손이나마 꼭 잡아 놓아야겠네요. 올리비아.”
상냥한 목소리가 올리비아의 귓가를 스쳤다. 다정한 온기가 조심스레 올리비아의 손을 맞잡았다. 뾰족뾰족하게 날 서던 마음이 금세 무뎌졌다.
단단한 손이 주는 효과는 대단했다. 어디에선가 가벼운 헛기침 소리만 나지 않았다면 계속 붙잡고 싶을 만큼.
올리비아는 슬그머니 손을 빼며 사절단의 귀족들을 향해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대공 전하의 약혼녀 올리비아, 라고 합니다.”
콘라드가 잠시 멈칫했다. 그 낌새를 애써 무시하며 올리비아는 사절단을 살펴보았다. 성이 붙지 않는 이름만 들어도 사절단 역시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올리비아는 완벽한 예법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잠시 전하께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인사가 조금 길어졌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라며,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제 대공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소벨과 해나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떠날 생각을 하자 아쉬운 것들이 생각났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디안은 어디에서 휴식 중일까.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으며 돌아서려던 때였다.
“괜찮으시다면 영애께서도 차 한잔하시고 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호의적인 말에 올리비아는 잠시 외알 안경을 낀 남자를 바라보았다.
키월 공작, 헤페르티 사절단의 대표.
태자의 약혼녀 시절 헤페르티와의 전쟁 때 키월 공작에 대해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수완이 좋고, 협상을 끌어가는 데 탁월한 자. 적당히 웃는 얼굴이 사람 좋아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지만, 올리비아는 사교계의 수많은 귀족들이 웃는 얼굴로 칼을 꽂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의도일까. 아니,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더 에드윈한테 유리하게 흐를까.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외줄을 타듯 아슬아슬한 고민이 무색해졌다.
“시간만 괜찮다면 그렇게 해요. 올리비아. 이 차, 제법 괜찮아요.”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에드윈이 무해하게 웃으며 소곤댔다.
협상의 판도가 아닌 지금 이 상황에 집중하는 모습에 올리비아는 피식 터지는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에드윈을 향해 똑같이 소곤거렸다.
“그 차, 제가 세팅 부탁한 거예요.”
대공저에서 즐겨 마시는 차를 보고도 눈치 못 챈 모양이었다.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던 에드윈이 환하게 웃었다. 올리비아는 작게 웃으며 마음을 결정했다.
그리고 키월 공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 한 잔 정도를 대접받기에 테이블이 넓어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헤페르티의 티 테이블과 비슷해서 저 역시 향수병이 달래지던 참이었거든요.”
키월 공작의 말에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티 파티의 풍경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사려 깊은 파티 구성이었다. 차양이며 테이블의 꽃이며, 테이블 커버 아래 가려진 티 테이블까지.
이건 꼭, 황녀의 지난 연회들에서 보이던 섬세함이었다.
묘한 느낌에 귀족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는 사이, 시종이 얼른 에드윈의 옆에 새로 의자와 찻잔을 세팅했다.
에드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올리비아가 자리에 앉았을 때, 키월 공작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은근한 시선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제 부친께서 보석에 제법 조예가 깊으셨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올리비아는 가만히 키월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떤 보석이든 단번에 알아맞추셨죠. 심지어는 그 보석이 대략 어떤 등급이 나올지까지 맞추셨으니, 모친께서도 보석을 구매하실 때면 꼭 부친께 동행을 부탁하시곤 했습니다.”
보석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일까.
콘라드가 보내는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올리비아는 애써 이야기에 집중했다. 키월 공작은 여전히 흥미롭다는 듯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하는 내내 키월 공작의 시선이 제법 낮았다. 혹시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는 걸까.
“보던 게 늘 보석이라 저 역시 보석을 판별하는 눈이 제법 좋은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간하지 못하는 보석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흥미롭다는 듯 웃는 키월 공작의 목소리가 묘하게 낮아졌다.
“혹시 그 목걸이의 보석,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확신이 어린 질문에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마석을 감싸 쥐었다.
* * *
“뭐? 올리비아가 티 파티에 있다고?”
태자궁의 침실.
성마른 얼굴로 누워 있던 레오포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스 백작은 다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티 파티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을 때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태자가 올리비아의 이름에 귀 기울이다니.
하지스 백작은 이제야 올리비아 이야기를 한 저 자신을 원망하며 태자의 준비를 도왔다.
그때였다. 열린 문으로 째지는 목소리가 레오포드를 불렀다.
“레오포드-!”
사랑스러운 얼굴 위로 절박함이 가득했다. 마리아 에텔이 애처롭게 레오포드의 팔에 매달렸다.
“제가 얌전히 여기에 있으면, 저와 함께 있기로 하셨잖아요! 아버지께서도 구금에 아무런 항변 안 하신다고 약조하셨는데, 어딜 가시려 그러세요!”
레오포드가 질린 얼굴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미 떨어진 끈인 것을 알면서도, 마리아는 그 잘난 얼굴을 놓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