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제도에서의 마지막 티 파티 (1) (102/151)


#102. 제도에서의 마지막 티 파티 (1)
2023.02.19.



 
황궁의 여름 온실 정원.

차양이 그림자를 드리운 아래, 티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귀부인들은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묘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영애들은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황녀 전하의 문병은 가지 않으시고, 여길 오셨군요.”

“그, 그러는 영애야말로 공녀님과 친분이 있으셨나 봐요?”

“다들 공녀님의 일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오신 거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잘 포장된 말들이 영애들의 진심을 덮었다.

이 자리에 없는 건 황녀의 충실한 친구 리베오른 후작 영애, 말이 많은 샤민 백작 영애 등 세 명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곳에 있는 귀부인과 영애들도 황녀 궁으로 향했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황제께서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공녀에게 티 파티 주관을 명하시다니.

황제의 명령이 망신당한 황녀를 숨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마델레이네 공작가와의 돈독한 관계를 과시하기 위함인지. 혹은 그 외 다른 이유가 있는지.

서로 탐색하듯 몇 마디 말을 나누어도 황제와 공작의 속내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공녀를 돕겠다는 명목하에 티 파티 준비에 온 이유는 대부분 비슷했다.

타국의 사절단과의 연을 만들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공작의 사랑을 받는 공녀의 호감을 살 수 있는 계기.

낭랑한 웃음소리가 번졌을 때, 영애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묘한 눈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호위를 하듯 무게감 있게 서 있는 빨간 머리 기사와 공작저의 전속 하녀, 모든 빛을 끌어당기듯 밝게 웃고 있는 에셀라 마델레이네. 그 사이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건.

이번 여름 연회의 중심,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였다.


“……그런데 정말 첫째 공녀님을 영애라고 불러야 하나요? 저렇게 둘째 공녀님이 옆에 있는데. 난처하네요.”

그 말에 대부분의 영애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영애면 어떻고 공녀면 어떨까.

중요한 건, 천덕꾸러기이던 그녀가 황궁과 마델레이네 공작가를 등진 채로도 이렇게 당당히 사교계에 돌아왔다는 것인데 말이다.

무려 대공가의 귀한 예비 대공비가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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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디저트가 나올 때는. 에셀라, 듣고 있어?”

회포를 푸는 척, 속성으로 티 파티에 대해 설명하던 올리비아가 에셀라를 불렀다. 듣는 둥 마는 둥 환하게 웃던 에셀라가 아차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언니. 언니랑 있다는 게 안 믿겨서. 다시 한번 알려 주실래요?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들을게요!”

오늘 아침, 황제의 명으로 급히 오찬 후 티 파티를 준비하게 되어 함께 커피 하우스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할 때만 해도 정말 슬펐는데.


“언니가 함께 와 주셔서 너무 기뻐요. 사실, 같이 오는 거 기대도 못 했는데. 괜찮으세요?”

에셀라는 떨리는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으며 언니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냐는 모호한 말로 포장했지만, 한 치라도 부담스러운 기색이 있거든 언니가 만류해도 대공저로 갈 수 있게 배웅해야지.

그러다 문득 이른 아침, 견고한 대공저 정문 앞을 지키듯 서 있던 제이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에셀라는 잠시 올리비아의 눈치를 봤다.

바로 언니한테 연락을 취해 대공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저와 달리, 제이드는 마치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제이드 역시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고.

바보, 멍청이. 진작에 그럴 것이지.

편들지 않겠다고 했으면서도 에셀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

“괜찮아. 비칸데르령으로 가니까.”

말을 꺼내도 될까 하는 고민이 무색했다. 비칸데르령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언니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에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감히 고개를 치켜들던 마음을 꾹꾹 눌렀다. 그러는 사이 올리비아가 되레 에셀라를 살폈다.


“너야말로 괜찮아? 공작님께서 너를 황궁으로 보내실 리 없으셨을 텐데.”

공작님.

아릿한 마음을 삼키며 에셀라는 조금 웃었다.

마치 제가 품은 마음이 당치도 않다는 걸 확인을 시키기라도 하듯 적절한 단어였다.


“폐하의 명령을 듣고, 제가 온다고 먼저 말씀드렸어요.”

올리비아의 빤한 시선이 이어졌다. 적당히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에셀라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제가 황녀 전하께는, 정말 큰 빚이 있거든요. 그러니 보답할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죠.”

티 파티의 호스트답게 화려하게 차려입은 에셀라의 위로, 대공저를 찾아왔던 날 웅크리던 에셀라가 겹쳤다.

에셀라는 조심스레 올리비아의 손을 잡았다.

온기를 통해 마음이 전달되는 사이, 에셀라가 입술을 깨물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항상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면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 와 보고 싶었어요. 언니랑 같이.”

쑥스럽다는 듯 에셀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얼굴을 보자, 올리비아의 목 안쪽이 엉기듯 칼칼해졌다.

멀리 돌아왔지만, 바라는 게 같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떳떳하게 함께 있는 것. 올리비아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키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도, 그랬어.”

언니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올리비아를 바라보던 에셀라의 눈이 천천히 반달로 휘어졌다. 정적을 가장한 아래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오갔다.

그 틈을 노렸다는 듯, 가까이에 있던 귀부인이 에셀라한테 다가와 말했다.


“공녀님. 디저트 순서 한번 확인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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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계 경험이 없을 텐데. 생각 외로 에셀라는 능란하게 티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귀부인들이나 영애들을 대하는 것도 제법 익숙해 보였다.

사교계의 꽃이라 불렸던 공작 부인을 닮아서일까. 늘 어린 막내라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러웠다.

세 명의 귀부인이 주축이 되어 에셀라의 준비를 도왔다.

에셀라는 바로 옆에서 있지 못하는 게 미안하다는 얼굴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괜찮았다. 오히려 뒤로 빠지기에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에셀라는 분명 제이드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니까.

대공저를 떠올린 올리비아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황궁에 오기 싫어도, 그렇게 잘 보이게끔 대문 앞을 지키고 선 제이드를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궁 내에 있을 공작과 콘라드는 제게 말을 거는 일은 없을 테니까.

대공저를 나오던 찰나, 마주쳤던 제이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간절한 얼굴이었던 그는 곧바로 윈스터에 의해 저 멀리로 밀려났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목걸이의 마석을 만지작거렸다. 명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일렁였지만, 개의치 않아야 했다.

오늘 제가 할 일은 에셀라의 언니로서, 함께 티 파티를 준비하는 것이니까.

티 파티 경험이 많은 귀부인들이 속속들이 챙기는 와중에, 올리비아는 섬세한 눈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폈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뒤에 서 있는 디안을 불러 몇 가지를 속삭이며 덧붙였다.


“……라고, 저기 서 있는 영애한테 전해 줘요. 스젤린 경.”

“공녀님이 아니고, 그 시녀한테요?”

당연히 공녀한테 전달할 줄 알았는데, 아가씨가 가리킨 영애는 베로니카라는 공녀의 전담 시녀였다.

디안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한테 알려 주듯 다정하게 말했다.


“사교계에서는 그렇답니다. 경.”

디안은 입술을 비죽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의 곁을 비워야 된다는 건 변함 없었다. 디안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미 에셀라의 곁을 에워싼 영애들과 달리 어떻게든 올리비아와 시선을 맞추려는 귀부인들의 시선은 집요했다.


“제가 없으면 저기 하이에나 떼가 다가올 텐데요?”

지체 높은 귀족 부인들을 한낱 하이에나 떼로 치부하는 말이 유쾌해서, 올리비아는 곱게 눈을 휘어 웃었다.


“비칸데르로 돌아가기 전, 한 번쯤은 괜찮겠죠.”

“그래도…….”

“디안.”

단호한 목소리가 디안의 이름을 불렀다. 곧은 시선 기저에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제야 디안은 제가 감히 누구를 걱정했는지 제대로 깨달았다.

수년을 이 사교계에서 버틴 아가씨. 디안은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예. 아가씨. 다녀오겠습니다.”

“더불어, 휴식도 하고 오고요.”

휴식이라니.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디안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그렸다.


“계속 그렇게 윙크를 해 대다가는 저기 있는 시녀 아이가 비칸데르령으로 따라올지도 몰라요.”

아가씨는 짓궂고도 다정하게 웃었다. 저 멀리에 디안을 훔쳐보던 시녀가 얼굴을 붉히는 것도 보지 못한 채, 디안은 올리비아를 따라 웃었다.

렌즈에 눈이 뻑뻑한 건 언제 보셨을까.

조금 이따 하워드와 윈스터에게 자랑할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이렇게 세심한 아가씨가 또 어디에 계실까. 디안이 기분 좋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디안의 말은 예언이라도 되듯, 우아하게 다가온 귀부인들이 올리비아를 둘러쌌다.


“공녀님, 아니, 영애. 차 한잔하시겠어요?”

호기심과 동경, 질투가 적절히 섞인 눈들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그들이 권하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의자가 있고, 차양으로 그늘이 지는 곳. 은식기와 다과가 놓인 가장 상석의 자리.

태자의 약혼녀였을 때도 지닐 수 없는 자리가 제 앞에 펼쳐졌을 때, 올리비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고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에 귀부인들이 잠시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들이 늘 멸시했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우아하게 허락을 표했다.


“그럼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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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으셨는데, 티 파티를 아우르는 모습이 대단하시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몸이 약하셔서 다른 영애들과 교류도 적으셨을 텐데.”

이 사교계는 변하는 게 없었다. 은근한 칭찬과 떠보는 말들로 시작되는 대화에 올리비아는 웃음을 삼켰다.

아, 하나 달라진 게 있긴 했다. 비수 같은 경멸이 적어졌다는 것.

우스운 일이었다. 끈질기게 가문에 매달렸던 과거에는 늘 바랐던 일들이 가문을 놓은 지금에서야 벌어지다니.

올리비아가 찻잔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사이, 귀부인들의 시선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에텔 후작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여전히 저택에서 구금 중이신가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에텔 영애는 소식조차 없는데.”

“경솔했죠. 세상에 타국 사절단이 모인 곳에서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심지어 태자 전하께서는 공, 아니 영애한테 다가가셨잖아요. 기억나시죠?”

테이블 위, 황제파의 귀부인들과 귀족파의 귀부인들은 초조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올리비아의 반응을 기다렸다.

에텔 영애 때문에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태자가 올리비아한테 마음이 기운 모습을 보이는 이상, 올리비아의 행보에 따라 황제파와 귀족파도 움직여야 했다. 물론 유리한 건 황제파였다.

그래서 올리비아가 입술을 달싹였을 때, 황제파 귀부인들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사절단이 오는 시간은 확인되었나요?”

“예, 예?”

하지만 무심하게 떨어지는 말은 귀부인들의 기대와 달랐다. 그녀들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는 사이,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었다.


“공녀께서 주관하시나, 엄연히 황궁의 티 파티입니다. 모두 송구한 마음으로 황녀 전하의 문병도 미룬 채 달려오실 만큼 노고를 쏟으셨는데.”

“…….”

“하필, 곤란한 이야기 중에 오시지는 않으시겠죠?”

의뭉스레 끝을 올리는 목소리가 고고했다. 예의와 농락 사이에서 아슬하게 줄을 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부인들은 가늠하듯 날카로운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늘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초록색 눈은 오히려 귀부인들의 탐색을 누르며 단단하게 반짝였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퍼지는 영애들의 공간과는 분리라도 된 것처럼 적막이 퍼질 때였다.


“황후 폐하께서 오십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귀부인들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중이 될 줄 알았던 황후의 매서운 눈을 바로 지금 마주해야 한다니. 귀부인들은 서둘러 변명을 준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는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았다.

흘낏 보기에도 잘 준비된 티 파티이다.

각국을 상징하는 색깔의 차양부터 겹치지 않게 테이블 위를 장식하는 꽃들, 말끔하게 닦인 유리 온실 창과 투과하는 햇빛의 각도들까지.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한 공녀의 솜씨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 뒤에 누가 있었을지, 황후는 눈 감고도 맞출 수 있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고개를 숙인 얼굴 아래로 목걸이의 작은 보석이 반짝였다. 태양 아래 유난히 시선을 잡는 보석에 황후는 아름답게 웃으며 올리비아를 향해 손짓했다.

그리고 올리비아가 가까이 왔을 때, 섬뜩한 목소리로 올리비아를 향해 말했다.


“……나와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직접 그 입으로 말했을 텐데.”

“예. 그래서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독기 어린 눈이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초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물론 지금이야 다 제 발 저린 얼굴로 황후의 시선을 피했지만. 황후는 우아하게 웃으며 올리비아를 물렸다. 그리고 다정하게 에셀라를 불렀다.


“고생했어요. 공녀. 세상에 이리 공을 들이다니. 힘들었을 텐데.”

“감, 감사합니다. 폐하.”

떨리는 목소리에 황후의 입매가 은밀하게 비틀렸다. 저러니 공작이 그리 싸고돌지. 황후가 은근하게 말했다.


“황녀가 곧 올 걸세. 어려운 자리는 황녀에게 맡기고 공녀도 가서 휴식을 취해.”

그제야 에셀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자리는 엄연히 제가 잡은 기회였다. 사교계를 잡고 있는 황녀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제 입지를 굳힐 기회. 그래야 오늘처럼 언니와 함께해도 이상한 시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후의 앞에서 에셀라는 독사 앞의 토끼가 된 것처럼 떨었다. 말은 엉킨 채 입속을 맴돌았다. 그때였다.


“송구하오나 황후 폐하. 이건 황제 폐하께서 공녀에게 내린 명으로 주관한 티 파티입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에셀라의 앞을 지켜 섰다. 언니였다. 에셀라는 왈칵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난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도움이 되고 싶음에도, 겨우 보호만 받는 자리. 에셀라는 입 안쪽을 깨물었다. 그러는 사이 담뿍 웃는 목소리의 황후가 선선히 답했다.


“폐하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영애.”

황후의 오만한 눈이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올리비아는 저 눈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황녀의 일을 도우라 할 때, 제 흔적을 없애던 황후의 치밀함도.

하지만 이제는 반격할 수 있었다.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 물러가라 하시면 그때 물러가겠습니다.”

“뭐?”

황후가 매섭게 눈썹을 추켜올렸다. 올리비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공녀에게 내린 명령이라는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여름 연회의 티 파티는 엄연히 황녀의 소관이니 폐하께서도 바로 내 청을 받아들이실 거다.”

위엄 있게 떨어지는 황후의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었다. 얼핏 다정한 웃음 끝에 도발이 걸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낮게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 아름답게 미소 짓던 황후의 입매가 딱딱해졌다. 올리비아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리고 허락도 받지 않은 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예법도 잃었냐며 비꼬려던 황후의 말을 틀어막은 건, 이어지는 올리비아의 말이었다.


“정말 황녀 전하를 생각하신다면, 저를 건드리지 마셔야죠. 폐하.”

 

 


“…….”

바들바들 떠는 입술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다시 두 걸음 뒤로 갔다. 그리고 모두가 들을 수 있게끔 커다랗게 말했다.


“안 그래도 어제의 충격에 혼절하신 황녀 전하께서 과연 호스트로서의 소임을 다 하실 수 있을지, 그저 저어되는 마음에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폐하.”

매끄러운 말은 순식간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어제의 황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망신을 당하고 혼절한 황녀.

황후의 눈이 분노로 이지러졌다.


“올리비……!”

“콘라드 마델레이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날 선 황후의 목소리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겹쳐왔다. 올리비아는 미소를 지웠다.

귀에 익지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사절단의 도착 전, 먼저 티 파티를 살피기 위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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