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대화가 필요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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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대화가 필요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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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대화가 필요한 가족
2023.02.12.
과연, 소문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였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주는 기사였다.
키월 공작은 숨을 삼키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나른하게 웃고 있는 입매와 달리 붉은 눈은 가늘고도 날카롭게 휘어져 있었다. 마치 키월 공작의 속내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탐색전이 길어질 필요는 없었다. 키월 공작은 가볍게 말을 골랐다.
“……저희에게서 웃음을 앗아 가신 분께서, 이리 웃음을 선사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헤페르티를 패전국으로 만든 무시무시한 상대가 사절단 앞에서 황가의 망신을 돕다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 프란츠 제국에서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화를 낼까, 아니면 무시할까. 그도 아니라면. 키월 공작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반응은 그가 가장 바랐던, 웃음이었다.
“공께서도 알겠지만, 승리를 한 건 내가 아니라 폐하시지. 연회의 첫머리를 장식하던 치사는 전부 폐하를 향해 있지 않소.”
느긋한 말투에 담긴 뜻이 명확했다. 키월 공작은 침음을 삼켰다.
황제의 개 비칸대르 대공.
암암리에 돌던 소문은 헤페르티에도 무성했다.
그런 그가 무슨 목적에서인지 황제와 틀어졌다면, 어쩌면 그와 제 조국 헤페르티가 좀 더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계속 의외의 것들만 보이는군요.”
“긍정의 방향이라면 좋을 텐데.”
“여러모로, 곤경에서 구해 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키월 공작은 ‘여러모로’에 강세를 두었다.
전쟁 포로에 대한 정당한 대우, 민간인 보호 등이 지켜졌다는 것만으로도 공작은 대공에게 감사를 표할 의사가 충분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씩 웃는 대공의 얼굴을 보며, 키월 공작은 아차 했다.
“여러모로라니, 내가 빚은 톡톡히 받아 내는 편인데.”
“…….”
“물론, 빚을 져도 후하게 갚는 편이고.”
위험하다 못해 양날의 검처럼 위태로운 말이었다.
의중조차 파헤칠 수 없는 의뭉스러운 웃음이 키월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선택지를 주듯 너그러운 표현 중 ‘후하게 갚는 빚’이 자꾸만 키월 공작을 향해 손짓했다.
부강한 프란츠 제국이냐, 아니면 대공이냐.
어쩌면 제국과 대공의 함정일 수도 있었다.
키월 공작은 아찔하리만큼 눈부시게 웃고 있는 대공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거, 잘되었군요.”
첫음절이 떨어지는 동시에 대공의 미소가 짙어졌다.
키월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까 연회장에서 광대놀음 같은 황제의 호령을 보다 못해 비웃음을 터트렸을 때부터.
“……저도 진 빚은 톡톡히 이자까지 받아 내는 편이라 말이죠.”
빤히 저를 보던 대공이 빙그레 웃으며 시선을 휘어잡듯 걸음을 옮길 때부터.
.
.
.
마지막까지 예를 갖춘 키월 공작은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꼿꼿한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진 키월 공작의 뒷모습을 본 뒤, 하워드는 잠시 경외의 시선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헤페르티에서도 대쪽 같다는 평판이 자자한 키월 공작이 이 무모한 대화에서 넘어올 거라는 확신은 없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말하던 대공은 어깨만 으쓱했다.
“이걸로 우리 비칸데르의 입장은 잘 전해졌으면 하는데.”
“키월 공작은 몰라도 헤페르티 사절단 내에 제국에 적개심을 가진 이는 많습니다. 사절단의 대표인 공작이 운만 떼도 다들 들썩일 것입니다.”
“적개심까지 가졌나?”
“사절단이 오게 된 과정이 너무…….”
하워드는 잠시 단어를 골랐다.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무례한 거지. 멍청할 정도로.”
에드윈은 아름다운 얼굴로 싸늘하게 웃었다.
오만에 젖은 황제는 제 자식의 손에 늘 귀한 것만 들려 주었다. 에드윈의 피에 젖은 손에서 보석과 재물만 쏙쏙 가져가서.
그러니 태자의 눈에는 세상이 얼마나 쉬울까. 뭐든지 뜻대로 해도 가장 귀한 게 사방 천지에 가득할 텐데.
이번 연회에서 고작 사절단 응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태자는 독배를 마신 셈이 되었다.
“……베서니한테서 새로운 연락 온 것은 없나?”
대공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무표정하게 웃고 있던 하워드의 얼굴에 짧은 그늘이 스쳤다.
“예. 아직 선대 대공비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곳’의 비밀은 알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인터필드 경. 왜 그렇게 실망한 얼굴이야. 이제야 겨우 들어간 귀한 곳인데.”
“……송구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베서니가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어도 괜찮아. 힌트는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웃음 섞인 대공의 목소리에 하워드는 잠시 침을 삼켰다. 다독이는 말에도 하워드의 얼굴에서는 초조한 기색을 지울 수 없었다.
에드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늘 덤덤하기 짝이 없는 하워드가 감정을 표출하는 건 대개 비칸데르령의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요즘에는 특히 ‘백수정 광산’과 관련된 일이었고.
에드윈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전을 스쳤다.
“성인을 맞이한 로웰의 왕족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이야. 빨리 네게 이 비밀을 알려 주는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올리비아의 말대로라면, 황가의 문서 보존 서고에는 황족만이 볼 수 있는 ‘백수정 광산의 문서’가 존재했다. 어쩌면 비밀에 관한 힌트라도 적혀 있을지 몰랐다.
에드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문서’를 앗아 올 계획이었다.
헤페르티와의 협상을 최대한 비칸데르 측에 유리하게 만들든, 광물 세금 비율을 말도 안 되게 낮추든. 그도 아니면…….
붉은 눈 위로 위험한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미처 대공의 눈을 보지 못한 하워드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서니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광산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열의가 대단하던데.”
하워드가 잠시 주변을 다시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은밀한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가 한없이 작아졌다.
“……선대 대공비 전하의 비밀을 알아내겠다는 것 외에도 베서니에게 원동력이 되는 일이 하나 더 있다고 합니다.”
“내 혼인이 당겨지는 거?”
“아셨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대답에 하워드는 맥이 탁 풀렸다. 그는 김샌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들 말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광산의 비밀이 밝혀지고 첫 번째 목표했던 대로 진행한다 하더라도, 아가씨께서는 예법을 중요시하셔서 그것과 관계없이 일 년의 유예 기간을 채우려 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말에 에드윈은 나른하게 웃었다.
“공왕이 되면 예법 따위에 구애받지 않게 되니 괜찮을 테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하던 하워드의 얼굴에 서서히 이해가 어렸다. 에드윈은 빙그레 웃으며 첨언했다.
“황가와 연이 닿았던 여인은 일 년간은 타 귀족과 연을 맺을 수 없잖아. 하지만 우리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비밀만 알아내면 당장이라도 독립이 가능해. 그렇다면 공왕으로서의 청혼인데, 엄연히 말하자면 ‘타 귀족’은 아니지 않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허점.
그 허점은 돌파구가 되어 에드윈을 자극했다.
하워드는 눈을 깜빡이다 허를 찔린 것처럼 멍하게 말했다.
“……그래서, 늘 미적지근하게 반응하시다 이제야.”
“겸사겸사지. 모든 게 딱딱 들어맞고 있으니 이제 내일부터면 확연히 판도가 뒤집히는 게 보일 거야.”
에드윈은 잠시 침묵했다. 내일부터라. 조금 전 말한 것처럼 올리비아는 아마 늦어야 내일모레, 빠르면 내일이라도 비칸데르령에 내려갈 것이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에드윈은 어제부터 오늘까지의 일을 빠르게 복기했다.
하지만 생각나는 거라고는 자신 있게 관망을 해 달라던 올리비아의 모습, 그리고 휘장에서 황녀와 대화를 마친 뒤 기품 있게 나오는 모습 등이었다.
에드윈은 옅은 한숨을 삼켰다.
이 이상 황성의 이들과 엮이지 않는 건 상관없었다. 오히려 저야 좋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무언가를 애써 참는 게 사람을 황량하게 만든다는 걸, 에드윈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더 사과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사과받기를 원하는 걸까, 아니면 용서하기를 원하는 걸까.
단단하고 강한 아가씨.
그 아래에 늦은 밤거리 한복판에서 울음을 터트리며 갈 곳이 없다던 올리비아가 있다는 것을 에드윈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가볍게 말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붉은 눈이 점점 짙어졌다. 평소에는 눈치 빠르게 굴어도 정작 이럴 때는 하나도 그녀의 속내를 모르겠어서.
에드윈은 지금 이 순간, 제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을 빠르게 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국과의 완전한 단절.
다행히도 올리비아를 위하는 일과 제 목표가 완전히 부합하고 있었다.
* * *
“어떻게든 황녀의 일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해!”
닫히는 집무실 문 사이로도 격노한 황제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마델레이네 공작은 완전히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 앞에 서 있는 시종들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폐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나 봅니다. 하긴. 나만 해도 이리 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나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엘킨 공작이었다. 황후와 똑같은 얼굴이 뱀처럼 교활하게 마델레이네 공작을, 그리고 뒤에 선 콘라드와 제이드, 자작 부처를 노려보았다.
“상황만 보면 마델레이네 공작께서 귀족파인 줄 알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제국의 귀족이 타국 사절단 앞에서 황녀 전하를……!”
더 이상 말도 못 하겠다는 듯 엘킨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내 허락이 들려오고 엘킨 공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델레이네 공작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엘킨 공작의 말대로였다. 타국 사절단의 앞에서 황녀의 권위가 추락했다.
황제파의 수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카탕타 자작 부처의 일이라든가, 혹은 사절단과의 대화라든가.
머릿속에 수많은 일들이 들어찼다. 하지만 저 멀리서 달려오는 부관 헉슬리 경에게 그가 한 말은 모두의 예상을 비껴갔다.
“……경. 자작과 자작 부인한테 숙소를 잡아 주겠나?”
“예? 저희는 숙소가 있습니다. 공작님.”
카탕타 자작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까야 제이드 마델레이네 경을 뒤에 업은 채로 용기를 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황제의 진노를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진이 쭉 빠졌다. 얼른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자작 부인도 같은 마음인 듯 퀭한 눈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공작은 단정한 얼굴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덤덤히 말했다.
“이 일에 대해 조사를 해야 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쪽에 있는 게 좋겠소.”
“그, 그렇지만.”
“헉슬리 경이 적당한 곳으로 안내할 거요.”
“……자작과 자작 부인은 돌려보내세요. 공작님.”
덤덤한 목소리가 공작의 말 반대에 섰다. 제이드였다. 조금 전 황제의 격노를 겪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한 얼굴이었다.
헉슬리 경을 포함해 자작 부처는 연신 눈치만 보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묘하고 날카로운 기류였다. 헉슬리 경은 콘라드를 향해 눈짓했다.
이 상황을 해결할 이는 지금 콘라드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부드럽게 제이드를 제압할 콘라드는 오늘따라 조금 이상하게 굴었다.
“……너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공작이 지독하게 덤덤한 눈빛으로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보아 온 아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처음 보는 타인 같았다.
“나와 지금 이야기를 좀 해야겠구나.”
“……저택으로 가시죠. 공작님의 응접실에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끝까지 공작님이라 호칭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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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형형한 가운데, 황궁을 출발한 마차 세 대가 마델레이네 공작저로 들어섰다.
창문에 비치는 세 부자의 얼굴은 지독히도 닮았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