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추락과 이상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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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 추락과 이상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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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 추락과 이상한 인연
2023.02.08.
“……누가, 감히.”
적막한 연회장 위로, 황제가 탁하게 내뱉었다. 모욕을 당한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이 사방을 획획 돌아보았다.
불같은 시선이 닿은 곳마다 얼어붙었던 귀족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감히.
귀족들은 황제의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내 한곳으로 시선이 쏠렸다.
이 연회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에드윈 비칸데르 로웰, 오직 대공 한 명뿐이었다.
황제의 살기가 번뜩이는 가운데, 대공은 나른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귀족들 중 귀가 밝은 이 두엇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잠시였다.
“자작에게 물으면 뭐 하십니까. 중요한 건, 황녀 전하께서 카탕타에 묵으신 게 아니라 폐하의 명에 따라 비칸데르령에 들렀느냐, 아니냐 일 텐데.”
매끄러운 목소리가 본질을 콕 짚었다. 자작에게 책임을 묻고 일을 덮고자 몰아가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카탕타 자작과 황녀의 희비가 확연하게 갈렸다. 드레스를 말아 쥔 황녀의 손등이 덜덜 떨렸다.
황녀의 위엄이 점점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은 황권의 위기와도 닿아 있었다.
역대로 가장 막강한 황가의 위기라니.
누군가 심장 앞에 칼이라도 댄 것처럼 선뜩함이 밀려왔다. 팔걸이를 꽉 쥔 황제의 손은 어느 순간부터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요요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치 게임이라도 하듯 도발적인 그 눈빛에 황제는 도박을 거는 마음으로 대공을 불렀다.
“……대공. 그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아닙니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 제게 다시 물으십시오.”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황제가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을 때, 팔걸이의 마노 장식이 그의 힘을 못 이기고 부서졌다.
황제는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손아귀는 반사적으로 부서진 장식을 움켜쥐었다. 마치 이 장식이 대공의 입이라도 되듯.
“저는 아니라고 대답할 테니.”
하지만 대공은 막힘 없이 말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럽게.
연회장의 모든 귀족이 잠시간 굳은 채로 황녀를, 황제를, 그리고 대공을 바라보았다. 늘 존경과 경외만 가득하던 시선에 불순물이 섞여 들었다.
순간 황제는 영원하다 생각했던 황좌의 권위가, 그리고 놈이 손바닥 아래로 빠져나갔다고 느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피부 위로 조금씩 달라붙는 귀족들의 의심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면, 정말 황녀 전하께서 행적을 거짓으로 고하신 거야? 왜, 무엇 때문에?”
“그것도 그거지만, 과연 이번 행적만 거짓이실까요? 여름 연회마저도 이렇게 이전과 다른데. 설마……?”
어디에선가 목소리를 옮긴 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의심 위로 불을 붙이기에는 충분했다.
늘 우아하고 숭고한 헌신을 보여 주던, 성녀로 칭송받는 황녀 레이나.
그 굳건한 이미지에 하나둘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황녀는 절박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외숙부인 엘킨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누구라도 나서야 했다. 황녀는 당연하게도 리베오른 후작 영애를, 그리고 제 놀이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심장 한편이 서늘해졌다. 늘 제 앞에서 호들갑을 떨어 주던 후작 영애도, 놀이 친구들도, 귀부인들까지 저 멀찍이에서 관망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황녀를 대신해 변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황좌를 등진 채 연회장의 모든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호기심을 보이는 이들, 안쓰러워하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이들. 그리고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사절단 일행까지.
누군가 목울대를 움켜쥔 것처럼 말 한마디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제가 그토록 힘겹게 만들어 왔던 평판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녀는 추문을 지닌 이가 어떻게 사교계에서 잊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연회에조차 나올 수 없게 되거나, 혹은 모든 구혼이 끊어진 채 줄 떨어진 목각 인형처럼 골방에나 처박히거나.
하지만 그게 제 이야기여서는 안 되었다. 웰튼 왕국의 왕세자비, 혹은 오르앙 왕국의 왕세자비. 거기가 제 자리였는데……!
“아, 버지.”
벼랑 끝에서 신을 부르듯, 황녀의 목소리는 애처롭고 절박했다.
하지만 수 초가, 수 분이 지나도 황제의 시선은 황녀에게 닿지 않았다. 한 꺼풀 한 꺼풀, 초조한 기대가 모두 사라졌을 때.
황녀가 딛고 있던 바닥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황가의 권위하에 늘 단단했던 황녀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아득해지는 대로 눈을 감았다. 몸이 심하게 휘청이고, 저 멀리 비명 같은 소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게 다 엉망이었다.
* * *
“……리비아, 올리비아.”
나지막한 음성이 들리자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발코니의 짙은 어둠 아래, 에드윈이 가볍게 팔을 올렸다.
그제야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팔을 잡았던 제 손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에드윈. 미안해요.”
“손아귀가 저리지는 않나요? 안 저리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몰라요.”
“재능이요?”
“기억 안 나요? 올리비아가 아이라루텐을 한 손으로 들던 거.”
“기억 안 날 수가 없죠. 첫 번째로 받은 기사님의 맹세였는데.”
올리비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분위기를 띄울 농담이라면 아주 잘 통한 셈이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올리비아의 뺨을 간질였다. 바람을 타고 신선한 꽃 냄새가 실려 왔다.
“이렇게 엉망인 여름 연회라니.”
옆 발코니의 커다란 호들갑까지 더해서 말이다. 두꺼운 휘장이 드리워진 발코니였지만, 옆 발코니의 뚫린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말소리까지 막지는 못했다.
“황녀 전하께서 쓰러지지만 않으셨더라도…….”
“……어찌 되었든 타이밍이 좋았지.”
묘한 목소리 뒤로도 두런두런 대화가 이어졌다. 올리비아는 휘장을 잠시 힐끗 바라보았다.
그 말대로였다.
타이밍이 좋았다.
황녀에게도, 황제한테도.
황녀는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옆에 서 있던 엘킨 공작이 서둘러 부축했지만 축 늘어진 황녀의 고운 머리카락이 바닥에 끌리는 것은 막지 못했다.
늘 바닥에는 구두의 밑창만 닿는 줄 아는 황녀가 안다면 실로 기겁할 일이었다.
“……의원을 불러 황녀의 상태를 진단케 하라. 마델레이네 공작과 소공작, 부단장과 자작 부처는 나를 따라 나오게.”
황제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한 뒤 퇴장했다. 얼떨떨하게 예를 갖추며 황제의 행보를 바라보던 귀족들은 연회장의 문이 닫히기 무섭게 에드윈한테로 달려들었다.
“위대하신 전쟁 영웅,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랍니까?”
“정말 황녀 전하께서 비칸데르령에 가지 않으셨어요? 참. 생각도 못 한 일이로군요.”
말을 걸 건수를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귀족들을 피해 온 곳이 바로 여기였다.
지금도 휘장 바깥에서는 하워드와 윈스터가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고생 좀 하고 있을 거였다.
진땀 흘릴 둘을 떠올리며 웃으려던 올리비아가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드윈만 괜찮다면, 저는 비칸데르로 돌아가고 싶어요.”
밤하늘 위로 잔잔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의외의 말이었다. 조금 더 승리감에 휩싸여 으스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에드윈은 잠시 올리비아의 기색을 살피다 빙그레 웃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갈까요?”
“에드윈은 아직 헤페르티와의 협상이 남았잖아요.”
이 와중에도 야무진 대답이었다. 에드윈은 맞는다며 조금 웃었다.
“그렇다면, 보고 싶을 건 안 괜찮겠지만 그 외에는 다 괜찮겠네요. 내가 협상을 빨리 마무리 짓고 가면 될 테니.”
이번에는 올리비아가 말간 얼굴로 웃었다. 에드윈은 은근하게, 또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일찍 돌아가고 싶어졌을까요? 아까까지는 되게 속이 시원해 보였는데.”
“속이 시원했는데. 분명 아주 좋았는데.”
백수정 광산을 두고 황후와 황녀가 쩔쩔매었다. 그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자도 저를 잡으려 했다.
그때마다 통쾌한 감정이 든 건 사실이었다. 늘 제가 숙였어야 했던 사람들이 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좋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만큼 마음이 수런거렸다. 황녀를 곤경에 빠뜨리던 제이드를 본 뒤부터.
“……그렇든 아니든 ‘마델레이네’로서 명예롭지 못했던 일에 대한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더 정확하게, 저를 보고 말하던 제이드를 본 뒤부터.
반짝이는 자수정 빛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갈피가 잡히는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내뱉듯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 사과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후회, 어쩌면 미안함.
에셀라한테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눈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다 끊어진 사이였다. 잘잘못을 가리고 사과를 할 이유조차 없는 사이.
그런데 그 눈이 뭐라고, 버렸다 생각한 감정들이 계속해서 치밀어 올랐다.
사과나 애걸이라면 황녀한테 들었으니 되었다. 진심은 없지만, 늘 제게 뻣뻣하던 이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건 딱 황녀에게까지만 허용되는 일일 거였다. 황녀와 저의 사이에는 백수정 광산이 있으니.
마델레이네 공작가와 제 사이에는 오로지 에셀라밖에 없었다.
이중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도 않을 사과를 요구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설사 사과를 한다 해도 제 성에 차지도 않을 텐데. 마치 황녀가 했던 것처럼.
그래서 올리비아는 서둘러 말했다.
“……그럴 가치가 없잖아요. 이젠 여기서 더 볼일도 없고.”
지금이 좋았다. 행복 가득한 비칸데르에서 사랑받는 이 삶이.
하지만 고개를 들어서 본 에드윈은 어쩐지 이상한 얼굴이었다. 조금 안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안타까울 건 하나도 없는데.
올리비아는 화제를 돌렸다.
“그러는 에드윈이야말로 왜 대신 나섰어요?”
“내가요?”
에드윈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웃은 사람은, 사절단 쪽일 텐데.”
웃음소리는 그녀의 바로 옆이 아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났다는 걸 올리비아는 알고 있었다.
에드윈이 달큼하게 눈을 휘었다.
“뭐, 겸사겸사죠. 나도 웃겼던 타이밍이었고.”
덧붙이는 말에 올리비아는 희게 웃었다. 착하고 남한테 주는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계산은 잘 못하시는 줄 알았는데.”
“탐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 한답니다. 덕분에 올리비아처럼 귀한 이를 내 옆으로 데려올 수 있었고.”
장난스러운 말과 달리 손등에 입을 맞추는 눈빛은 진득했다. 선선한 밤공기가 훅 달아올랐다. 뜨거운 낙인처럼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고혹적으로 휘어졌다.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밤이네요. 잠시 한잔할까요?”
“……좋아요.”
“알코올 있는 걸로요?”
다분히 유혹적인 권유에 올리비아는 잠시 생각하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의 붉은 입술 끝에 걸린 웃음 한 조각이 짙어졌다.
“빨리 다녀와야겠군요.”
.
.
.
에드윈이 나간 다음에, 올리비아는 잠시 어깨를 들썩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티아제 궁은 은빛으로 고고히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미련 없는 마음으로 보는 것도 생경해서,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아까 황후와의 대화를 곱씹어 보며 이름 모를 기사를 떠올렸다.
제가 제도로 다시 오게 된 이유. 하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황후가 그를 알게 된 이상, 그를 만난다는 마음은 버렸다.
황후의 편일 수도 있는 그와 접촉하는 건 괜한 위험이었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수런거리는 마음도, 이름 모를 기사에 대한 일처럼 얼마든 싹둑 잘라 낼 수 있는 일이었다.
가냘픈 입술에서 아릿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들이 밤하늘 위로 서서히 번져 가기 시작했다.
* * *
“계속 긁어 대시면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문서’를 얻기 힘드시지 않습니까.”
귀족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 연회장의 한구석, 하워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주어는 따로 없었지만 에드윈은 그 미묘한 말이 황제를 가리킨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그래서 어깨를 으쓱이며 뒤쪽을 힐끗했다.
“참아야 하는데 그 얼굴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래도 내가 배수의 진은 잘 친 모양입니다. 인터필드 경.”
탐색하는 시선이 점점 가까워졌을 때, 에드윈은 느긋하게 뒤를 돌았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헤페르티 사절단의 대표 키월입니다.”
“나를 기다렸나 보군.”
“퍽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곤란한 처지가 될 뻔한 상황에서 나서 주셨으니까요.”
외알 안경을 쓴 키월 공작. 그리고 아까 연회에서 비웃음을 터트렸던 자.
에드윈이 진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