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의심에 불을 붙이는 순간
(98/151)
098. 의심에 불을 붙이는 순간
(98/151)
#098. 의심에 불을 붙이는 순간
2023.02.05.
“카탕타라면, ‘그’ 카탕타 아닙니까?”
“쉬, 자네. 목소리가 너무 커.”
명멸하던 시야에 번뜩 불이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은밀하게 나누는 귀족들의 대화 속에 ‘카탕타’가 섞였다.
‘그’ 카탕타라니. 귀족들이 도대체 카탕타를 어떻게 안단 말이지? 지난달 제가 카탕타에 잠시 머물렀다는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했는데.
가슴이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황녀는 거칠어지는 숨을 애써 삼켰다.
침착해야 했다. 저들의 존재가 귀족들의 뇌리에 꽂히기 전에 치워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과부하가 걸린 건지 입술은 달싹이기만 할 뿐 그 어떠한 말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황녀를 향한 시선이 점점 더 묘한 기색을 띠던 그때였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황녀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마치 구원처럼 나타난 나지막한 목소리는 제이드 마델레이네였다. 황제파인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일원이자, 황궁 기사단의 부단장……!
황녀는 순식간에 품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짐짓 반갑다는 듯 카탕타 자작 부처를 바라보았다.
“반가워요. 자작, 그리고 부인.”
돌변한 황녀의 표정에 카탕타 자작 부처가 놀랄 새도 없이, 황녀는 우아하게 웃으며 제이드 마델레이네에게 말했다.
“마침 잘 왔어요. 마델레이네 경. 여기 이분들을 응접실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예전에 잠시 안면을 익힌 분들인데…….”
황녀가 난처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귀족들은 알겠다는 듯 카탕타 자작 부처를 향해 실소를 보냈다.
연회 때마다 황녀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거들먹거리는 하급 귀족들은 늘 있었다. 이번에는 저치들인 모양이었다.
황녀는 달라지는 귀족들의 시선에 안도했다. 동시에 이 정도로 탄탄하게 지지 기반을 쌓은 스스로에게 고양감을 느꼈다.
귀족들의 눈빛이 바뀐 것을 카탕타 자작 부처도 단박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자작은 억울함에 입매를 파들파들 떨었다. 두들겨 맞은 몸이 고통스러웠지만, 이 분위기에서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애써 용기를 낸 말은 황녀에 의해 묵살되었다.
“전……!”
“자작. 만나서 반가웠어요. 먼 길을 오느라 수고로웠을 텐데, 조금 휴식하다 와요. 경, 경한테도 미리 고마움을 표할게요.”
아무것도 아닌 상대를 앞에 두고 사교계의 여론을 휘어잡는 건 황녀에게 있어 이골이 날 정도로 쉬웠다. 조력자가 있다면 더더욱.
그녀는 여전히 태연하고 고상했다. 그 모습은 조금 전 올리비아와 함께 발코니로 사라졌던 예민한 이미지를 지우기에 충분했다.
이내 자작 부처를 향한 조롱이 비수처럼 쏟아졌다.
“역시 그건 헛소문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럼 그렇지. 황녀 전하께서 온갖 선행을 베푸시다 보니, 저런 시골뜨기 귀족들까지 오잖아요. 예전에도 한번 끌려 나갔었는데.”
“아, 그래도 그 남작은 초대장이라도 들고 왔었죠. 저 사람은 초대장이나 가지고 온 행색인가요?”
“에이 설마요. 초대장도 없이 이 연회장에 어떻게 들어와요.”
“확인은 해 봐야겠죠.”
깔끔하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황녀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지만, 귀족들의 말을 말리지는 않았다.
리베오른 후작 영애나 귀부인들이 나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 하지 않는 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연회에 참석하고 싶으면 조용히 연락이나 하지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서.
황녀는 고고한 눈으로 자작과 자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당황해서 도망갈 법도 한데, 어쩐지 둘은 새파래진 얼굴 그대로 꿈쩍하지 않았다.
얼어 버리기라도 한 걸까.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빨리 치워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황녀는 의도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저편에 선 대공과 올리비아를 향해 악의로 번들거리는 비웃음을 선사했다.
제게 위기 따위는 없었다.
제국의 영원한 번영이 있는 한, 저는 품위 있는 황녀로 자리매김 할 것이었다.
겨우 그까짓 폐광산과 올리비아 그 천한 것의 알량한 협박으로 저를 욕보이려 한 모양인데.
맑게 갠 머릿속에 더없이 좋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폐광산 따위나 대공은 버리고, 부유한 구혼자인 웰튼 왕국의 왕자나 오르앙 왕국의 왕자와 결혼을 한다면. 황제의 진노를 피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더 좋은 패로 작용할지도 몰랐다.
황녀는 힐끗 타국의 사절단이 있는 쪽을 눈짓했다. 고아하게 웃자 사절단의 귀족들이 황녀를 향해 가볍게 예를 갖췄다.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프란츠 제국과 부강한 왕국의 결속이라. 고작 비칸데르령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아무도 없다면 깔깔 웃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었다. 어머니께서 아신다면 얼마나 황녀답다고 저를 칭찬하실까.
속내를 알 수 없는 비칸데르 대공의 붉은 눈을 보며, 황녀는 마음속으로 침을 탁 뱉었다. 그리고 옆의 올리비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를 모욕한 비칸데르 대공을 누르면, 그다음은 저기 서 있는 올리비아였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조금 전의 치욕이 몰려왔다.
대공이라는 뒷배가 없어진다면 그때야말로 편히 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황녀의 새파란 눈이 다시 기세등등하게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오페라라도 보듯 거리를 둔 채 지켜보는 꼴이 같잖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던 건 올리비아였는데.
그러는 사이, 이 분위기를 끊어 내기 위해 시종 두 명이 다가왔다.
“카탕타 자작님, 그리고 자작 부인. 잠시 저희와 동행 부탁드립니다.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기꺼운 엔딩이었다.
황녀는 사려 깊은 얼굴로 시종들을 바라보았다. 자애로운 미소는 귀족들의 호의를 사기에 충분했다. 모든 게, 다시 그녀가 바라던 대로 돌아갔다.
“잠시.”
나직한 음성에 황녀는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이 상황에 훼방을 놓는 사람은 대공뿐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대공의 목소리라기에는 너무 가까웠다. 황녀는 설마 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내 바다 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저들의 보증인으로 동행했네.”
왜 지금 저자가.
“아, 부, 부단장님께서 직접 말이십니까?”
시종이 당황한 채로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황녀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 무슨? 경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혀가 뻣뻣하게 굳었다. 제이드 마델레이네는 무심한 얼굴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황궁에 충성하는 부단장으로서, 그릇된 오해를 없애기 위해 이 두 사람과 제가 연회장에 함께 들어왔습니다. 카탕타 자작의 말로는 지난달 맺은 연으로 황녀 전하께서 직접 여름 연회에 초대하셨다고 하더군요.”
지난달 맺은 연.
연회장을 울리는 목소리에 황녀가 창백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더 이상 귀족들이 ‘카탕타’를 떠올리게 해서는 안 되었다. 황녀는 황급히 그를 불렀다.
“그, 럴 리가. 경, 아니 마델레이네 경.”
마델레이네, 그의 가문에 강세가 들어갔다.
황제파인 너의 가문을 잊지 말라는 협박과도 같은 부름에 제이드가 잠시 멈칫했다.
황녀는 주춤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에게로 다가갔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교묘한 목소리가 제이드를 향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은 그게 무엇이든 책임을 져야 해요. 여긴…….”
“…….”
“……우리 프란츠 제국의 귀족들만 있는 자리도 아니잖아요?”
“…….”
“물론 황제파의 수장인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경이 황녀인 내게 불리한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마델레이네 공작께서도 그러시겠죠?”
은밀한 대화를 나누듯 속삭이던 황녀가 해사하게 웃으며 두 걸음 물러났다.
믿고 온 수가 제이드 마델레이네인 듯, 카탕타 자작 부처는 둘 다 바들바들 떨었다.
황제파의 굳건한 충신인 마델레이네 공작가는 이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황녀인 자신을 배반할 수 없었다.
“……그렇든 아니든 ‘마델레이네’로서, 명예롭지 못했던 일에 대한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그래서, 제이드가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 황녀는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독백하듯 말하는 제이드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어딘가 이상한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연회장을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황녀 자신에게 반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전하께서 비칸데르령에 가지 않고 카탕타 자작령에 다녀오셨다는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습니다.”
“무슨……!”
황녀는 헛숨을 삼키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대공의 입을 어떻게 막았는데……!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이럴 줄이야.
눈앞이 새까맣게 번졌다. 당혹감에 손끝이 차갑게 식다 못해 저릿했다. 억눌린 숨으로 밭은 소리만 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고한 황녀의 모습인 채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저자를 말려 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리베오른 후작 영애를 비롯한 놀이 친구들까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저를 에워싸며 추켜세워 주었던 귀족들은 입에 아교를 바른 것처럼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막막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혼자 남겨진 곳에서 비수 같은 시선을 받아 내며 황녀는 고개만 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제이드는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늘 제국에 헌신하시는 전하께는 당치도 않은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참에 이곳에서 오해를 푸시는 건 어떠하십니까.”
“마, 마델레이네 경!”
날카로운 목소리가 제이드의 말을 끊었다. 황녀는 간절한 눈으로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무덤덤한 자수정 빛 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위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어느새 연주도 끊어진 연회장에서, 황녀는 낭떠러지에 매달린 것처럼 절박하게 제이드 마델레이네를 바라보았다.
폐광산이야 황제의 진노로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사교계 자체에서의 매장이었다.
타국의 사절단까지 온 마당에 성녀로 추앙받던 황녀가 사실 황제가 내린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라는 게 밝혀지기라도 하면…….
등골이 오싹하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날씬한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생각만으로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상상 속에서조차 황녀는 그 모든 비난을 버틸 수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냘픈 목소리로 제이드 마델레이네한테 매달렸다.
“경! 마델레이네 공작가를 생각해요. 황실에 충성하는 그 긍지를 잊지 말아요.”
제발 그만 말하라는 신호였다. 그 간절한 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잠시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입을 다물었을 때.
고개를 들던 황녀는 똑똑히 보았다.
그가 바라보던 것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라는 것을. 그 옆의 붉은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던 게 잔상에 남았다.
다시 황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비웃듯 한쪽 입술을 올렸다.
기묘한 소름이 확 끼쳤다.
황녀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제이드 마델레이네와 올리비아를, 그리고 대공을 바라보았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시선이 다시 제이드 마델레이네의 달싹이는 입술로 향할 때였다.
“마델레이네 경! 감히 증거도 없이 제국의 황녀 전하께 이런 모함이라니!”
엘킨 공작이었다. 한 걸음 내디디며 연회장의 중심이 된 그가 제이드 마델레이네를 향해 소리쳤다.
“경은 경이 말한 대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마델레이네 공작께서도 가문에 부여되는 책임을 피할 수 없으실 겁니다!”
그와 동시에 천둥 같은 노여움이 연회장을 휘어잡았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황제의 등장이었다.
* * *
“폐하, 저들을 엄벌에 처하셔야 합니다! 감히 어쭙잖은 친분으로 황녀 전하의 친절에 기대다니!”
“모함이라뇨! 저희는 진실로 황녀 전하를 모셨던 영광에 대해 말했을 뿐입니다!”
“그만-!”
사자 같은 호령이 연회장을 휘감았다. 황제의 분노에 모두가 찔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미간에 골을 잔뜩 팬 채로 연단 아래의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늘 우아하고 우월해야 할 황녀는 그 중심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 연회에서 일어났다. 황녀가 비칸데르령에 들르지 않은 채 카탕타 자작령에만 묵었다는 소문은 대체 왜 난 걸까.
황제는 씨근거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부아에 찬 시선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황녀와 폐광산에 대한 건 나중의 문제였다. 이 사달을 만들어 낸 건 감히 귀족들이 황녀의, 황실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황제파인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둘째가.
성마른 분노가 제이드 마델레이네, 그리고 그를 말리지 못한 공작에게 향했다. 와중에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유난히 붉은 눈을 반짝이는 대공이 보였다.
황제는 황좌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가 으득 갈렸지만 황급히 이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큰소리가 무엇 때문에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황녀가 카탕타에 묵었다는 게 확실한가. 자작.”
바들바들 떠는 저치라면 얼마든 치울 수 있었다. 연회는 끝났다.
“풋.”
조용한 연회장에 작은 소리가 하나 터져 나왔다.
그건 분명 비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