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7. 막지 못할 불행들 (97/151)


#097. 막지 못할 불행들
2023.02.01.



“무, 무엄하긴! 공녀, 아니 영애! 지금 감히 내 앞에서 웃음을 터트린 거예요?”

황녀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힐난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쩌면 모녀가 똑같을까. 아니, 저를 이리 웃게 만드는 거라면 태자까지 셋이 다 똑같았다.

돌연 올리비아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찬찬히 황녀를 마주 보았다.

저를 내려다보듯 내리까는 눈이며 짧고 오만한 명령까지.


“……어쩜 그리, 변하지 않으시나요?”

올리비아는 나직하게 말했다. 떨쳐 냈다 생각한 모든 기억들이 순식간에 빈틈을 비집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황녀 전하께서 제게 첫 명령을 내리셨던 때와 지금은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졌는데요.”

“상, 상황이 달라졌다니! 광산을 넘기라니까 무슨 잔말이 많아요!”

한시가 급한데 올리비아는 자꾸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황녀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냅다 소리쳤다.

올리비아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고였다.


“늦으셨습니다. 전하.”

“……뭐?”

나긋한 목소리에 황녀는 한 박자 늦게서야 말뜻을 파악했다.

황녀는 곧장 새파랗게 벼려진 눈으로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시선으로 죽일 수 있다면, 황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올리비아를 죽였을 것이다.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 누구보다 여유로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넘기라니요. 엄연히 그건 거래의 대가로 제가 받은 것이었는데.”

“대가라니, 황가의 보물에 그 무슨 무엄한……!”

무조건 올리비아의 말에 부인하던 황녀가 순간 날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광산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저 광산을 주게 된 이유를 잊고 있었다.

황녀의 눈동자 위로 수많은 생각이 일렁였다. 올리비아는 희게 웃었다.


“네. 황녀 전하.”

“…….”

“저는 황녀 전하의 일을 침묵하겠다는 의미로 백수정 광산을 받았고, 황녀 전하께서는 제게 비밀을 지킬 것을 다짐받으셨습니다.”

비밀. 그 두 글자의 발음이 유난히 선뜩하게 울렸다.

황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엉망이 된 손끝이 눈에 들어왔지만, 상관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제게 광산을 내놓으라 하시면, 저는. 당장 바깥으로 나가 모든 귀족과 사절단이 있는 자리에서 춘궁기의 리테일 영지를 복구한 게 저라고 밝히면 될까요?”

상냥한 목소리가 발코니 위로 울렸다. 화들짝 놀란 황녀가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다가 올리비아의 목소리를 뒤덮듯 비명처럼 소리쳤다.


“감히, 이 발칙한 게!”

“전하. 부탁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제게 일깨워 주신 분은 전하시잖아요.”

“내가 네까짓 것에게 부탁이라니!”

“부탁을 그리 높은 곳에서 하시면 되겠습니까. 황녀 전하.”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던 황녀의 걸음이 뚝 멈춘 것은 순간이었다. 올리비아의 조용한 목소리에 담긴 말은 분명 어느 맑은 날, 제가 했던 말이었다.


“부탁을 그리 고고하게 하면 되겠어요. 공녀?”

 
올리비아의 부탁은 대개 비슷했다.

태자에게 대신 자신과의 춤을 청해 주기로 한 약속을 지켜 달라, 혹은 영지에 대한 자료를 조금만 더 주었으면 한다, 하는 그런 시시한 것들이었다.

황녀는 감히 천것 주제에 누구보다 완벽한 예법을 지키는 올리비아가 고까웠었다. 그 머리를 낮추게 하는 데 사용했던 말을 지금에서야 꺼내다니!


“지금 내게 복수라도……!”

사납게 소리치던 황녀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초록색 눈은 초연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리비아의 저 눈빛은 자신을 향한 시험일까?

등 뒤로 식은땀이 떨어졌다. 그 땀이 등허리까지 가기 전에 황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수는 하나였으니까.


“부, 부디!”

고귀한 황녀의 고고한 자존심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올리비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귀한 광산을 내게 다시 돌려줘요. 공녀.”

눈을 뜨지 못할 만큼 수치스러워 황녀는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모른 채 올리비아를 향해 애걸했다.

올리비아는 답이 없었다. 황녀는 나오는 대로 말했다.


“그 광산의 대가라면 내가 무엇이든 치를게요.”

“무엇이든, 다요?”

머리 위로 웃음기 섞인 말이 올라왔다. 황녀는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그래요! 이제 어차피 오라버니께서도 공녀에게 마음이 기운 것으로 보이고, 내 재산을 원한다면 유블러 백작은 언제든 내 명을 기다리고 있어요.”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황녀의 말을 들었다. 애원이 회유로 바뀌는 건 찰나였다.

그리고 그 어르는 말속에 든 것은 올리비아가 평생을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번 일을 다녀오면, 내 꼭 오라버니께 공녀와의 첫 춤을 부탁드릴게요.”

 
늘 말버릇처럼 내걸던 태자와의 첫 춤.


“연회를 제대로 꾸며야 그 안에서 공녀가 오라버니와 약혼이라도 다시 치를 수 있게 내가 말이라도 꺼내지 않겠어요?”

 
태자의 옆에서 제대로 서고 싶었던 약혼식.


“이 일조차 해결하지 못하면, 내가 공녀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뭐죠? 공녀가 아니더라도 태자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귀한 이들은 많잖아요.”

 
그리고 마델레이네 공작가를 위해 태자의 옆에 서겠다는 어린 다짐까지.


“……그러니, 광산만 내게 돌려줘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영애가 태자비에 오르도록 지지할게요. 나는 정말 그 광산이 필요해요. 영애도 알 거라 믿어요.”

황녀의 말이 점점 달콤해질수록, 올리비아의 입매에 서늘한 웃음이 고였다.

이렇게 저를 어르고 달래고 구슬리고. 종내에는 저를 협박해서라도 원하는 바를 얻어 내는 황녀의 패턴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 똑같은 모습이, 반복되는 회유가 계속해서 저를 자극했다.

제도를 떠날 때, 모든 것을 던지듯 넌더리를 냈던 저로 하여금 단 한 번이라도 대갚음해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라는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단 한 번. 확실하게 경고를 해야 했다. 다시는 저를 만만히 보지 못하게.

그래서 올리비아는 한 자 한 자, 내리누르듯 말했다.


“저는, 그 귀한 광산을 절대로 전하께 내어드리지 않을 거예요.”

“……뭐?”

순간 황녀는 제 귀를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 제 부탁을 들어줄 듯 선선하던 얼굴은 어느새 단단하게 변해 있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보이는 올리비아를 보며 황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

“감히, 나를 농락해?”

“황녀 전하께서는 매번 저를 농락하셨던 건가요? 사정이 있으셨던 게 아니라요?”

“말장난 따위 집어치워!”

황녀가 날카롭게 외치며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올렸다. 저 흰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여야 속이 조금 풀릴 것 같았다.

허공을 가르는 손이 매서웠다.

하지만.

탁.

황녀는 믿을 수 없었다. 감히, 감히 올리비아 따위가 제 손을 막다니. 손목을 잡은 손아귀가 제법 아팠다.


“이, 이거 안 놔?”

황녀의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떨렸다. 초록색 눈은 대답 없이 황녀를 주시했다.

순간 황녀의 등 뒤가 오싹해졌다.

저를 찍어 내리는 위엄이 서린 눈과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잡힌 손목이 아릿하고 목 안쪽에 신물이 올라오듯 칼칼해졌다.

숨소리조차도 커다랗게 들리던 순간이었다.

황녀의 손목을 그대로 내친 올리비아가 날카롭게 황녀를 바라보았다.

황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수 초가 지나도 그녀의 몸에는 통증 하나 밀려오지 않았다.

황녀가 살며시 눈을 떴을 때, 가만히 저를 주시하는 올리비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수치심이 온몸을 뒤덮었다. 미동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전하께 손 하나 대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요. 공녀. 그랬다간 황족 시해죄로……!”

“전하의 뺨을 치기에. 이 장갑은 정말 소중한 것이거든요.”

“……뭐?”

당황한 듯 황녀의 숨소리가 다시 가빠졌다.

지금이 적시였다. 올리비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전하께서 제게 계속해서 무례를 저지르신다면.”

“…….”

“저는 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 전하께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결투라니. 황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사교계의 그 어떤 영애도 직접적으로 결투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황녀는 올리비아가 말하는 결투가 무엇일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 멍한 얼굴을 보며 올리비아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 장갑은 황녀 전하의 그 어떤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하니. 만일 제가 이 장갑을 전하께 던지는 날이 오거든, 저는 결단코 허투루 그에 대한 대가를 받지는 않을 겁니다.”

황녀는 필사적으로 올리비아의 눈을 보며 빈틈을 찾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대는 계속해서 절망으로 변했다.

저건, 정말 예전의 올리비아가 아니었다. 황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와 반대로 올리비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 각오가 선다면 그때 다시 제 뺨을 때리려 시도라도 해 보시지요.”

쉽사리 건들 수 없는 강한 분위기가 올리비아와 황녀, 둘을 감싸 안았다. 황녀는 쌔근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그럼.”

이 와중에도 올리비아는 황녀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완벽한 예법에 황녀는 증오가 가득 찬 눈으로 올리비아를 쏘아보았다.

누가. 누가 감히 예를 받아 줄 줄 알고!

하지만 올리비아는 보란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황녀를 등진 채 휘장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짙어진 어둠 위로 청명한 달이 떠올랐다.

시린 은빛은 마치 올리비아를 보호하듯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감히, 내가 예를 받지도 않았는데!”

황녀가 새되게 소리쳤지만 올리비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우아한 걸음이 발코니의 끝까지 닿았을 때, 기다렸다는 듯 휘장이 걷혔다.

당연하다는 듯 기다리는 대공의 미소가 언뜻 보이더니 다시 휘장이 닫혔다.

황녀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에 사로잡혔다. 백수정 광산과 황제의 진노보다 더한 분노가 황녀를 뒤덮었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드는 가운데, 황녀는 찢어질 듯한 고함을 내지르며 휘장 바깥으로 박차고 나갔다.


“올리비아! 이 건방진 게-!”

“황녀 전하!”

그때였다. 째지는 황녀의 고함 위로 황녀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날 선 숨을 들썩이던 황녀의 시야에 어수룩한 두 부처의 모습이 들어왔다.


“드디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황녀는 지척까지 다가온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중 남편인 자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당혹한 얼굴과 달리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하게 연회장을 울렸다.


“……지난달, 카탕타에서 황녀 전하를 모셨던 저희 부처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카탕타……! 황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순간 황녀의 머릿속에 나직한 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전하께는 세 번의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게 다. 대공이 꾸민 일이란 말인가?

눈앞이 아찔해지는 가운데, 황녀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따끔거렸다. 그 와중에 붉은 눈으로 재밌다는 듯 저를 보는 대공의 눈과 마주쳤다.


“네, 네놈이 감히”

잇새로 덜덜 떨리는 말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말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