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막을 수 있는 불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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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 막을 수 있는 불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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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 막을 수 있는 불행인가
2023.01.29.
성대한 연회장.
아직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은 귀족과 사절단으로 가득했다.
웅장한 음악이 사람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규칙적인 북소리는 파동처럼 다가와 마델레이네 공작에게도 부딪혔다. 공작은 미간을 굳히며 목 뒤를 주물렀다.
북소리가 진동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목덜미가 쭈뼛하니 당겨 왔다. 이 불쾌감의 원인이 비단 북소리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공작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잠시 바람을 쐬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던 그의 시야에 콘라드가 들어찼다. 공작의 눈매가 냉하게 식었다.
아까 전, 황제 궁 앞에서 저를 막아섰던 게 무색하게, 콘라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사절단을 응대하고 있었다.
“원망을 해야 하는 대상은 저 애가 아니잖아요.”
콘라드 때문에 올리비아를 지척에서 놓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는 말에 콘라드의 대답은 고작 저런 거였다.
입안에 실망 가득한 말이 들어찼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집안을 믿고 맡길 만큼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런데 기껏 한다는 말이 그 애의 잘못이 아니라니. 그러면 자신은 누구를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 애가 아니면 도대체 누굴 원망해야 한다는 건지……!
어지럽게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내고, 공작은 예리한 말로 콘라드를 공격했다.
“그러면, 네 말은 그 애 대신 네 동생을 황가로 밀어 넣자는 거로구나.”
콘라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못난 아들을 바라보던 공작은 차갑게 돌아섰다.
제대로 된 해답조차 없는 아들의 말보다는 황후 궁에서 듣고 온 말이 그에게는 먼저였다.
“키웠던 애정이 무색해졌겠어요, 공작. 공녀가 스스로를 한낱 가문도 없는 영애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던데. 알고 있나요?”
에셀라가 티 파티에 간다고 하더니, 그 자리에 올리비아 그 애도 참석한 모양이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황후는 늘 그렇듯 에셀라를 인질로 잡고 흔들었다.
“난 우리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작은 기어이 둘째 딸을 내어주고 싶은 모양이에요.”
“난 진심이에요. 공작. 황제 폐하와 공작의 단단한 결속만큼이나, 태자의 자리가 굳건하기를 바라니까요. 그러니 태자비의 자리는 무조건 공작의 딸이 될 거예요. 그게 누가 될진, 공작이 정할 일이지만요.”
황후의 목소리가 뱀처럼 스며들었다.
분노로 점철된 자수정 빛 눈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을 때, 공작은 다시 한번 생각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귀한 딸에게 올 불행은 막아야 했다.
그게 아비로서 딸에게, 그리고 못난 남편으로서 헤이즐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길이었다.
쨍그랑-.
순간 크리스털 잔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연회장에 울렸다. 마델레이네 공작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 황녀가 서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귀족들의 성화에 걸음을 옮기는 황녀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황후의 응접실을 나오던 길에 마주했을 때도, 황녀는 꼭 저런 얼굴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새하얗게 질린 얼굴.
* * *
“황제 궁의 시종장이 보존 서고를 들렀습니다. 지금 유블러 백작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까지 알아차리셨을까.
이제 더 이상 폐광산이 제 소유가 아니라는 것까지? 아니면, 그토록 얕잡아 보던 공녀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짐작만 했을 뿐인데, 황녀는 누군가 자신의 흉곽을 조이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피가 차갑게 식으며 오한이 들었다. 모든 소리가 먹먹하게 멀어졌다. 손이 주체할 수 없게 덜덜 떨려 왔다.
쨍그랑-.
“괜찮으세요, 전하?”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 여기는 연회장이지.
황녀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 실례해요. 오늘따라 손에 힘이 안 들어가서.”
“그래도요! 아까부터 멍하신데.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 왜 티 파티가 끝나자마자 바로 연회에 오셨어요. 지금이라도 좀 쉬다 오시지요, 전하.”
리베오른 후작 영애는 부산을 떨며 황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희고 고운 손에는 그 어떤 상처도 없,
리베오른 후작 영애는 잠시 멈칫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황녀의 손톱 끝이 엉망이었다. 마치 어린 조카가 치아로 손톱을 물어뜯은 것처럼.
그러고 보니 황녀의 손등 위로 연하게 붉은 자국이 있었다. 꼭 작은 초승달 같은 저 자국은…….
“실례하겠습니다. 황녀 전하. 위험하시니 제가 곧 치우겠습니다.”
서둘러 다가온 시종이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을 치웠다. 시종의 소매에는 황후 궁의 문양이 자수로 놓여 있었다.
여름 연회는 온전히 황녀 궁의 소관인데.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리베오른 후작 영애뿐만이 아닌 듯했다. 황녀를 둘러싼 영애들 역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번 여름 연회 때부터 황녀의 행보가 평소와 다르기는 했다. 여유 없이 서두르고, 준비가 안 된 것 같은 모습은 완벽함을 추구하던 황녀답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하게 질려 있는 상태였다.
정확히는 아까 티 파티 도중, 다급히 다가온 유모 루하스 남작 부인의 말을 들은 뒤부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걸까.
하지만 황녀는 이 묘한 시선조차 느끼지 못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생각만큼 쉽지는 않네요. 황녀. 하지만 곧 비칸데르로 보낸 사람이 좋은 정보를 들고 올 거예요. 내 조금 전, 마델레이네 공작한테도 압력을 가했어요. 그러니 지금만 참고 잠잠히…….”
황후의 말을 떠올리자 눈앞이 캄캄했다. 올리비아로부터 광산 문서 하나를 빼앗는 게 황후인 어머니한테도 쉽지 않다니. 그 뒷말이 무엇이었지는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았다.
사방이 자신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늘 저를 빛내 주던 샹들리에의 불빛이 오늘따라 현란했다. 빛들이 반사되며 황녀의 시야를 혼탁하게 했다.
정신없이 울리는 춤곡과 주변에서 와글거리는 소리들이 그녀를 조여 왔다. 가쁜 호흡을 내쉬는 사이, 주변의 귀족들이 계속해서 황녀한테 말을 걸어왔다.
황녀는 무의식적으로 웃었다. 하하하.
갑자기 주변의 말들이 끊어졌다.
뭐지, 또 무언가 잘못된 걸까?
순간, 꽉 동여맨 코르셋 아래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까지 예민하게 느껴졌다.
모든 소음과 휘황한 빛, 쿵쿵대는 북소리와 금관 악기들의 우렁한 곡조들이 황녀의 심장 박동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갑갑했다. 아니, 억울했다.
왜 이렇게까지 상황이 어그러졌을까. 황녀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손톱을 세워 손등을 찍어 내렸다.
아직 폐하께서 안 오신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오라버니도, 황후 폐하께서도 안 계시지만 지금이라도 올리비아를 꾀어 광산을 돌려받아야 했다.
르칼르의 목걸이라고 받았던 가품이든, 제 비옥한 영지든. 아니면 오라버니의 애정이든 제가 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걸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는 정말로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날지도 모른다. 새하얗게 번지는 공포 사이로 다시 파리처럼 웅웅 대는 소리들이 끼어들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바짝 당겨진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황녀가 소리쳤다.
“……좀, 조용히 좀!”
모든 소리가 뚝 끊어졌다.
천장 높은 연회장 위로 사나운 황녀의 고함 소리가 느리게 울렸다. 조용히. 좀, 조용히!
그제야 황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귀족들의 눈이 조금씩 싸늘해졌다. 황녀는 황급히 옆에 있는 리베오른 후작 영애의 손부터 잡았다.
“미안해요. 비앙카. 내가 지금 연회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아닙니다. 전하. 휴식을 권해 드린 제 목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무뚝뚝한 목소리와 동시에 리베오른 후작 영애가 슬그머니 손을 뺐다. 놀이 친구인 리베오른 후작 영애는 이렇게 속이 좁게 행동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황녀는 그녀를 달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얼마든지 다시 돌려놓을 수 있었다.
“비앙카, 아니에요. 내가 지금 너무했어요. 그대의 정성인데.”
지금처럼. 샐쭉해진 리베오른 후작 영애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황녀는 모두를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권했다.
“잠시 같이 쉬러 올라갈까요?”
“……그러면.”
뜸을 들이던 리베오른 후작 영애가 넘어오자, 다른 귀족들 역시 동조를 표했다. 황녀는 너그럽게 웃으며 영애들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때였다.
“올리비아 아가씨 입장하십니다!”
황녀는 툭, 하고 영애들의 손을 놓았다. 멀리서 시종의 부르짖음에 이어 홀에 들어오는 건, 분명 올리비아였다. 당황한 영애들이 황녀를 바라보았지만 황녀는 그들을 신경 쓸 수 없었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전, 전하!”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울리는 것은 알았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귀족들의 호의야 다시 얼마든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광산은 아니었다.
광산이 없다면, 황제 폐하의 진노는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그녀가 올리비아를 향해 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인생에 불행이라니. 그런 건 없어.”
숨이 차는 와중에 황녀는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는 이 불행을 막을 수 있었다. 저 멀리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황녀는 희열에 차 웃었다.
* * *
“아깐 오랜만의, 회포를 짧게, 풀어 아쉬웠는데! 잠시 나와 이야기해요. 공녀.”
올리비아는 헐떡이는 황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연회 호스트의 권유에 귀족들의 시선이 쏠린 것은 물론이었다. 무슨 일인지 캐내려는 시선들이 날카로웠다.
빙그레 웃는 에드윈의 시선을 마주한 뒤, 올리비아는 말없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빛 아래, 위엄을 갖춘 오색 찬란한 드레스가 빛을 발했다. 두 겹으로 건 마석 목걸이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귓불에서 찰랑이는 백금 귀걸이, 우아하게 올린 머리 위 찬연한 보석 장식까지.
흐트러진 황녀의 차림과 대비되는 기품 있는 모습이 모두에게 각인되었다.
그러는 사이, 황녀는 다시 한번 앙칼지게 외쳤다.
“공녀! 내 말이 안 들려요?”
“……저도 말씀드렸잖아요. 전하. 저는 더 이상 공녀가 아니라고요.”
응? 티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귀족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선언 같은 말에 놀란 귀족들은 황녀뿐 아니라, 마델레이네 공작과 소공작의 얼굴까지 일그러진 것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를 확인한 에드윈은 조금 전 올리비아가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 했던 말을 상기했다.
“……사실, 지금 여기 온 건 오기예요.”
“네?”
“아까 티 파티에서 모든 것을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딘가 풀어지지 않은 구석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
“그래서 왔어요. 완전히 무장한 상태로.”
에드윈이 선물한 장갑을 낀 손을 흔들며, 올리비아가 장난스레 웃었다. 반짝이는 차림새에 걸맞은 올리비아는 어딘가 단단히 각오한 모양새로 입장하며 속삭였다.
“……그러니, 오늘은 저를 관망해 줄래요? 오늘 확실히 모든 걸 마무리 짓고 싶어요.”
“잠시 다녀올게요. 에드윈.”
다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에드윈은 빙그레 웃었다.
“얼마든지요. 올리비아. 다녀오는 동안…….”
에드윈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과 윈스터, 그리고 하워드를 가리켰다.
“귀한 그대의 기사들이 뒤에 있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아 주세요. ”
짤랑-. 가벼운 방울 소리와 함께 에드윈이 에스코트를 위해 잡고 있던 올리비아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저는 관망이 아닌 응원을 하며 이곳에 있을 테니.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시선을 떼지 않은 붉은 눈이 오롯한 믿음을 담아 말했다.
완벽한 대답이었다.
올리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먼저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
.
.
“광산을 내게 넘겨요, 공녀. 아니, 영애.”
조용한 발코니 안.
황녀가 내뱉듯 명령했다. 초조함을 애써 감춘 채로 냉하게 뱉은 효과일까. 잠시 눈을 깜빡이던 올리비아가 가만히 황녀를 바라보았다.
수 초의 침묵이 황녀를 압박하기 시작할 때였다.
올리비아가 짜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