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합당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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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합당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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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합당한 대가
2023.01.25.
황제가 비칸데르 대공과 마주하는 곳은 늘 응접실이었다.
황금과 마노로 장식된 가장 고귀한 자리에 앉아 단상 아래 무릎을 꿇은 대공을 내려다보는 것.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는 확실한 격차. 황제가 연출하는 의도는 뚜렷했다.
그런데 지금 집무실에서의 시선은 정반대였다. 화려한 얼굴이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내려다보는 시선 그대로 느슨히 웃었다.
“식사는 꼭 제 아가씨와 하는 습관이 있어서 말입니다.”
대공은 의도적으로 왼손을 내어 보였다. 우아하고 커다란 손, 그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붉은 보석 반지의 의미를 과시하는 행동이었다.
황제는 골이 당기는 것을 참으며 테이블을 향해 손짓했다.
“……일단 앉지. 차를 내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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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장은 테이블 위에 뜨거운 티 포트와 찻잔, 그리고 다과를 세팅한 뒤 벽으로 물러섰다.
황제는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제 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황제만 응시했다.
마치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은 채 마지막 숨통을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여유로운 태도였다.
분명 광산이 황녀의 소유인 한, 불리한 건 대공인데.
마뜩잖게 비칸데르 대공을 바라보던 황제는 문득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황제는 단 한 번도 누군가 자신보다 우위를 점하게 둔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붉은 눈은 묘하게 황제의 심기를 긁었다.
결국 황제는 치미는 조바심을 삼키지 못하고 먼저 용건을 꺼냈다.
“……황녀와 약혼을 하게.”
황제가 예상한 대공의 태도는 둘 중 하나였다.
조금 전처럼 ‘제 아가씨’를 운운하며 황제의 화를 돋우거나 이전처럼 눈을 번뜩이며 적의를 표하거나.
황제가 바라는 건 후자였다.
그런데.
“……황녀와의 약혼이라.”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다 느른히 웃는 반응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킨 황제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흠, 그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위엄 있게 말했다.
“내 약혼을 이야기했지만, 황녀는 황가의 일원이야. 말을 조심히 하게.”
“예. 폐하.”
순순히 말을 듣는다는 듯 대공이 냉큼 대답했다. 아름다운 얼굴로 웃는 낯 아래에 무슨 속내가 숨어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가슴 한쪽에서 불덩이가 끓는 것처럼 속이 탔다. 하필 차 또한 뜨거웠다. 황제는 이 모든 게 못마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응접실로 자리를 옮길 것을 그랬다. 그곳에서는 늘 우월감을 느끼며 심적으로 우위에 섰었는데.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런데 제가 황녀 전하와 약혼을 하게 되면, 제게는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뭐?”
이렇게 노골적으로 보상에 대해 이야기할 줄이야. 황제는 불쾌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바라는 게 명확하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미 귀족 회의 때 백수정 광산만으로는 대공을 옭아맨 목줄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재물이라면 이미 그가 바친 전리품들로 황궁의 창고가 가득 차다 못해 넘쳤다. 황녀의 재산을 조금 떼어 주는 것쯤은 대공이 앞으로도 휩쓸어 올 전리품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헤페르티와의 협상을 앞둔 상태에서라면 더더욱.
황제는 자연스레 대공과 황녀의 약혼으로 얻게 될 이익을 떠올렸다.
태자의 확고한 위치와 드높아질 제국의 이름, 그리고 영원히 제 개가 되어 복속될, 비칸데르 대공가.
황제는 욕망에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겨우 숨기며 호쾌하게 웃었다. 초조하게 찻잔을 두드리던 손은 이제 여유롭게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하하하. 대공에게 드디어 욕심이라는 게 생긴 모양이지? 그래. 스스로를 가주라 칭할 기백 정도면 마땅히 그 정도의 탐은 내야지.”
“…….”
“안 그래도 내 대공의 공로를 높이 사 헤페르티와의 협상에도 참석할 수 있게 하지 않았나. 그 외에도 바라는 게 있으면 말을 하게. 물론,”
황제는 뜸을 들이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근하게 운을 떼었다.
“……백수정 광산을 가장 바라지 않겠냐마는.”
“……아하.”
대공이 눈을 얄팍하게 휘었다.
“로웰의, 그러니까 제 어머니의 백수정 광산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제가 그토록 되돌려받기를 바라던.”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던 황제가 아차 했다. 크흠, 불편한 침음을 흘리면서 못을 박듯 대공을 향해 말했다.
“그렇지. 설마 황녀가 제 광산에 부군의 입장도 허락하지 않겠나.”
“…….”
“뭐, 직계의 핏줄이 튼튼해질 무렵이면 그 아들에게 선물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고.”
하하하. 황제는 불편한 마음을 누르며 만약을 가정했다. 황제가 바라는 청사진이었다. 비칸데르 대공비가 될 황녀. 그리고 황제의 핏줄이 섞여 들어갈 비칸데르 대공가.
“그러니 대공. 그 귀한 자리에 갈 내 귀한 보물 같은 황녀를 잘 부탁하네.”
“친애하는 황제 폐하.”
대공이 나직이 웃었다. 무언가 좋은 징조였다. 황제는 탐색하듯 대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린 채 마주 웃었다.
“듣기 좋군. 대공. 앞으로도 그리,”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 귀한 자리에는 이미 귀한 분이 앉으셨습니다.”
“……뭐?”
“귀한 자리라 말씀하시면서 그 자리를 먹다 남은 부스러기쯤으로 취급하시면 되겠습니까?”
대공의 눈매가 달큼하게 접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먹다 남은 부스러기라니, 지금 저놈이 말한 대상이……!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찻잔이 카펫 위로 떨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이 발칙한 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천둥소리처럼 커다란 노성에 시종장이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공은 여전히 시원스레 웃었다.
“앉으십시오. 폐하. 아직 계산이 덜 끝났습니다.”
순간 황제는 윽, 하고 침음을 터트렸다. 어깨를 누르듯 꽂히는 기세가 우악스러웠다. 황제의 눈에 참을 수 없는 노기가 서렸다.
“감히, 이 황궁에서 나를…….”
“로웰의 백수정 광산은 원래부터 로웰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폐하께서 입장을 허락한다 선심을 쓰십니까?”
“네 이놈! 그 광산이 어찌 로웰의 것……!”
몸을 꼿꼿이 편 채 벼락처럼 호통을 치던 황제가 일순 말을 멈추었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확연히 드러났다.
늘 광산을 탐하던 놈이 어느 순간부터 그에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미를 닮은 계집을 옆에 둔 것에 대한 일시적인 만족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황제를 보며, 대공은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로웰의 것이 아닌, 응당 제 것이어야 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응당이라니. 네가 어찌 감히 내게서 네 것을 찾는단 말이냐.”
지친 듯 쉰 목소리가 끝났을 때, 대공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하하하, 근사한 웃음소리가 집무실을 울리다 뚝 끊어졌다.
매혹적인 붉은 눈이 진득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황제를 바라보았다.
“저는 폐하께서 전장에 돌리신 폐하의 개로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개중에는 뭐,”
대공이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을 툭 쳐서 떨어뜨렸다. 카펫 위로 떨어진 찻잔은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런 것도 있었지요. 덕분에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건 모조리 이렇게 버렸습니다. 먹을 것이 귀한 전장에서요.”
“그래서, 내가 지금도 대공에게 독이라도 내렸단 말인가?”
황제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인했다.
물론 과거 그가 대공에게 독을 내렸던 것은 진실이었다. 그 당시로 돌아가도 황제는 똑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 제 개는 누구보다 완벽해야 했다. 그러니, 제가 훈련을 시켜 준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진실은 황제에게 불리했다. 더불어 그는 과거에 어떤 증거조차 남지 않았다. 그래서 더 당당하게 굴 수 있었다.
그런데 대공은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논지를 파악하지 못하시는군요.”
“…….”
“저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현재라니……?”
“그렇게 열심히 훈련시킨 개를 황궁의 정문으로 당당히 입장시키셨을 때에는.”
순간 황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등 뒤로 소름이 쫙 끼쳤다.
공주를 빼닮은 아름다운 얼굴이 히죽 웃었다. 붉은 안광이 번들거리며 황제를 주시했다.
“……적어도 그에 걸맞은 대가를 내줄 정도는 각오하신 것 아닙니까?”
마치 목표물의 숨통을 끊어 놓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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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문이 닫혔다. 대공이 나간 자리를 노려보던 황제가 힘없이 몸을 늘어뜨린 것도 그때였다.
“폐하!”
놀란 시종장이 한걸음에 뛰어와 황제의 앞에 엎드렸지만, 그조차도 멀게만 들렸다.
“그럼, 연회에서 뵙겠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눈을 휜 놈이 완벽한 예를 갖추고 집무실을 나가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황제는 탁한 숨과 함께 분노를 내뱉었다.
“감히, 감히!”
치솟는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황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걷어찼다. 강건한 황제의 발길질 한 번에 육중한 테이블이 훌러덩 넘어갔다.
와장창-. 두꺼운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여전히 황제는 분노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새빨간 치욕감이 치솟는 동시에 뒷골이 섬뜩해졌다.
여태껏 몇 번의 반항이 있었기는 했지만, 이렇듯 보란 듯이 목줄을 물어뜯은 것은 처음이었다.
비칸데르가 저렇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황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쥐고 있는 목줄이라 봐야 이제 백수정 광산뿐인데.
어서 황녀한테 백수정 광산에 대해, 그리고 비칸데르령에서 묵었던 며칠간에 대해 들어야 했다.
“……종장, 시종장!”
“예.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빨리 황녀를,”
잠시간 말을 끊은 황제의 눈이 짙어졌다. 침전한 눈 위로 의심이 떠오른 순간, 황제가 마저 말을 이었다.
“……아니, 백수정 광산에 관한 문서를 가져오게.”
더 이상 황녀를 믿을 수 없었다. 황제의 눈이 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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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궁의 정원.
삼엄한 궁의 문이 열리며 대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조함을 억누르며 홀 안쪽을 바라보던 윈스터가 한달음에 대공의 옆으로 달려갔다.
“대면은 잘 끝내셨습니까?”
“그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칼터 경. 내가 설마 테이블을 뒤엎기라도 했을까?”
기다렸다는 듯 능청스러운 대답이 떨어졌다.
테이블이 아니라 황제의 속을 뒤엎었다는데 윈스터는 재산의 절반을 걸 수 있었다. 하지만 차마 제 주군 앞에서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대공은 힐끗 마차 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아가씨께서는?”
“아, 아가씨께서는 아직.”
무심코 대답을 하며 황녀궁 쪽을 바라보던 윈스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하. 윈스터의 시선을 따라가던 대공이 느른하게 웃었다. 콘라드 마델레이네.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걸어오던 그도 대공을 발견한 듯 잠시 눈이 커다래졌다.
그 얼굴을 확인한 채로 대공은 곁의 윈스터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못 볼 거라도 본 모양이야? 왜 그렇게 인상을 찌푸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저 보라색 눈들만 보면 속이 안 좋아져서.”
“그거 눈 색깔 차별이다?”
“뭐, 은발에 보라색 눈은 차별해도 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윈스터의 대답에 에드윈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못되게 웃자 꼭 악당 같았지만 윈스터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러는 사이 목전까지 다가온 콘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영웅,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퍽 태도가 공손해졌군. 소공작.”
빈정거리며 웃는 말투에도 콘라드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내내 올리비아를 생각했다. 정확히는 여섯 살이던 올리비아를. 그리고 종내에 그 아이의 잘못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걸러지고 난 곳에는 아무런 잘못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애처로울 정도로 저희를 바라보던 올리비아의 모습밖에는.
섬찟한 죄책감이 폐부를 훑고 지나갔다. 콘라드는 이를 악물었다. 대공에게 무슨 말이라도 물어야 할 텐데, 입술에 아교를 바른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쯔. 볼일이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공작이 헤페르티와의 협상의 실무진이라지?”
협상. 콘라드는 고개를 번뜩 치켜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는 대공의 모습마저도 기꺼웠다.
“그렇습니다. 전하, 저…….”
태어나서 처음으로 콘라드는 말을 우물거렸다.
물끄러미 콘라드를 바라보던 대공이 입술 위로 붉은 비웃음을 걸었다.
“동생들은 제법 준비를 한 모양이던데. 소공작은 형편없는 모습 그대로군.”
“예? 그게 무슨…….”
“물론,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 소공작은 저쪽의 비정한 공작과 함께 이 길에서 썩 사라져 주겠나?”
무례한 말이었다.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더라면 화가 치솟을 만큼.
“저기 내 아가씨께서 오시는데, 보기 싫은 얼굴을 둘씩이나 보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말에 콘라드는 핏기 없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비칸데르의 문양이 찍힌 마차가 달려오는 가운데, 제 뒤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에서 콘라드가 할 수 있는 결정은 단 하나였다.
* * *
“……뭐라고?”
그 시각. 황제는 제 귀를 의심했다.
“다시, 다시 말해 보게 시종장!”
“그, 그게.”
시종장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보고했다.
“보존 문서실에 있는 기록 외에 백수정 광산의 문서는 이미 마델레이네 공녀한테 양도되었다고 합니다. 폐하.”
쿵-. 심장이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황제는 잠시 비틀거렸다. 눈앞이 아득하게 번져 갔다. 호흡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폐하! 저를 부르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을 때. 황제는 주먹을 쥐어 보았다.
아아. 제 손가락 사이로 완전히 빠져나간 대공의 표정을 떠올리면서, 황제는 순간 아까 제가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파악했다.
분명 불리한 상황임에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듯 무심하고 여유로운 태도.
“……공주.”
황제의 잇새로 짓이기듯 나온, 로웰의 공주.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았던 날 느꼈던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