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시선의 우위가 전복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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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 시선의 우위가 전복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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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 시선의 우위가 전복된 순간
2023.01.22.
“황녀.”
나직하게 부르는 황후의 목소리가 분노로 빨갛게 번져 가는 시야에 제동을 걸었다. 황녀는 눈을 깜빡했다.
테이블에 앉은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명, 빙그레 웃고 있는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만을 제외하고.
현실을 체감하는 동시에 뒤로 서늘한 소름이 끼쳤다. 테이블을 내리쳤던 손바닥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가 겨우, 공녀 따위의 도발에 넘어가다니.
핏기가 가시는 얼굴을 바라보며 황후는 테이블 아래의 주먹을 꽉 쥐었다.
테이블 위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조하듯 공녀를 몰아갔던 귀부인들은 사태를 파악하듯 바쁘게 눈을 돌렸다.
사교계에 능란한 황녀가 이성을 잃다니. 마치 공녀의 말이 사실이기나 한 것처럼.
짝짝. 갑자기 들려온 박수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박수를 친 사람은 황후였다.
“얼토당토않은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 공녀.”
“송구합니다. 폐하. 재미있는 소문에 대해 주고받는 줄 착각하고 들은 바를 늘어놓았습니다. 전하께도 송구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황후의 말에 이어 공녀는 마치 연극을 하듯 유려하게 말했다.
고작 농담 따위였을까? 이건 지고한 황녀,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공녀를 보며 황녀는 이를 악물고 웃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뺨이 아플 정도였지만, 지금 이 순간 황녀가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하하. 공녀.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듣는 이가 많으니 아무래도 ‘짓궂은 농담’은 자중하는 게…….”
도 넘는 농담을 너그러이 넘어가는 시늉을 하려던 황녀의 말이 다시 한번 끊어졌다. 올리비아가 말을 하기 전까지 ‘짓궂은 농담’을 주도했던 건 황녀였다.
결국 황녀는 자신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리고 말았다.
새하얗게 질리는 황녀의 얼굴을 보며 올리비아는 여유롭게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다시 한번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이 싸한 분위기에서 입을 연 건 황후였다.
“……공녀는 잠시 나와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아무래도 편치 않은 마델레이네 공작의 얼굴을 보는 건 같은 부모로서 가엾은 일이라.”
돌려 말하지만, 결국 황후가 명하는 건 당장의 독대였다. 저 천한 것에게 제 귀한 시간을 내어주다니. 아깝기 짝이 없었지만, 폐광산을 내놓으라 명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황후는 올리비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멈칫했다.
“……예, 폐하.”
묘하게 웃는 얼굴은 아까, 예를 갖추고 일어날 때의 그 웃음과 닮아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순간 황후를 덮쳤다.
무언가 제 뜻에 거슬리는 일이 생긴 것처럼 불안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먼저 자리를 비우지요. 황녀, 이 티 파티를 즐거이 이끌어 줘요.”
.
.
.
“그러면 우리, 마저 티 파티를 진행할까요?
황후와 올리비아, 그리고 황후의 측근인 귀부인 몇몇이 자리를 떠났다.
빈자리에도 불구하고 황녀는 더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야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쉬웠다.
모두가 어머니의 측근이거나 제 측근이었다. 이 자리에서야말로 꼭 어제 에텔 영애의 일에 대한 수습을 확실히 해야 했다.
“훌륭한 연회를 준비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그때였다.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품은 내용은 황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에셀라 마델레이네.
적당히 테이블 위를 둘러보던 에셀라는 황녀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딱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부른 귀부인 세 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저는, 도통 몰라서. 연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요?”
눈앞이 아득해졌다. 생각도 못 한 인물이었다. 황후인 어머니 앞에서는 오들오들 떨던 에셀라 마델레이네가 이 시점에 나서다니.
황녀는 이를 아득 갈았다. 미처 삼키지 못한 거친 숨이 훅훅, 입술 새로 터져 나왔다.
마델레이네. 이 괘씸하고 괘씸한 것들.
“……공녀님. 이 자리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요?”
리베오른 후작 영애의 말에 에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이야기는 황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에셀라는 상관없었다.
이미, 제게 말을 하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세 명의 귀부인과 눈을 맞췄으니까. 소문을 내기에 딱 좋은 구성이었다.
* * *
황녀 궁의 응접실.
육중한 문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소름 끼치도록 조용한 응접실에 남은 건 황후와 올리비아, 단둘뿐이었다. 황후는 찬찬히 올리비아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고요한 얼굴이었다. 늘 주눅 든 얼굴로 애써 용기를 내듯 마주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그래서 황후는 그 잔잔한 얼굴 위에 돌을 던졌다.
“그토록 짧은 시간 내에 대공의 옆자리를 꿰찼구나. 태자는 사로잡지 못하더니. 네 어미를 닮았다는 그 천한 초록 눈이 효용이 있기는 한 모양이구나.”
태자가 올리비아를 부르다 거절당한 것은 알았지만 구태여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나긋한 말의 끝에는 독이 서려 있었다. 공작 부인의 태가 아닌 천한 무희에게서 난 반쪽짜리.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황후는 경멸을 숨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천박하게도. 대공의 발목에 방울을 채웠다지? 하긴. 둘이 똑같군. 대공도 그 ‘핏줄’이 어딜 가나.”
올리비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말이었다. 살육귀라는 비하도 아니고 ‘핏줄’을 운운하다니.
에드윈은 비칸데르의 영주이자 제국의 한 명뿐인 대공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로웰 왕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가의 핏줄이기도 했다.
어폐였다. 하지만 황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저를 바라볼 때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올리비아의 촉이 기민해지던 찰나였다.
“……그 폐광산을 내놔.”
순간 올리비아는 생각하던 것도 잊은 채 황후를 바라보았다.
폐광산이라니. 설마 백수정 광산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어야만 했다. 황후와 황녀가 그곳을 탐낼 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적어도 저렇게 불려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제게는 폐광산이 없습니다.”
“비칸데르령에 붙은 폐광산을 네가 가져간 걸 내가 알고 있는데?”
느슨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담긴 건 비웃음이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순간의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그곳은 폐광산이 아닙니다. 폐하.”
하, 황후는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새삼스럽다는 듯 올리비아를 훑어보았다.
“달라졌구나. 올리비아. 감히 나를 똑바로 보고.”
독사처럼 교묘한 말이 올리비아의 옛 모습을 상기시켰다. 확실히 눈을 마주칠 때마다 애써 웃으며 심기를 살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기고만장해서 황녀의 자리를 빼앗고 태자를 망신 주더니. 이제는 감히 나와 눈을 마주쳐? 잠시 황후의 눈이 가늘어지던 찰나였다.
“폐하께서도 달라지셨습니다.”
“……뭐?”
독살스러운 갈색 눈이 올리비아를 압도하듯 내려보았다. 올리비아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제가 이곳에 온 폐하를 뵈러 온 것은.”
“…….”
“예비 대공비로서 더 이상 폐하를 두려워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작해야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나올 줄 알았는데. 황후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저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침에 태양이 뜨고 밤에 달이 지는 것처럼 변할 수 없는 일.
그런 올리비아를 몰아붙여 다시 대공에게 망신을 주고, 태자의 옆으로 돌리는 것은 황후에게 있어 녹록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올리비아는 그 모든 상식을 뒤집고 있었다.
흔들리는 황후의 표정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옛이야기는 이렇게 늘 마음을 아리게 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황후 폐하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수많은 경멸들 속에서 황후의 멸시는 유독 아팠다.
차라리 무섭게 혼을 내지. 황후는 매사 올리비아를 경멸하듯 한참을 바라보며 독한 말을 했다.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심장을 파고들 정도로 고약한 말이라는 것은 황후도 올리비아도 잘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시더군요,”
예를 갖추게 해서 기를 꺾어 놓는 방법. 그건 황녀의 수법이었다. 늘 저를 바닥처럼 바라보는 황후가 아니라.
황후는 저와 독대하는 시간조차 줄일 만큼 저를 싫어했다.
“폐하께서는 저를 태자 전하의 약혼녀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아야 할 정당한 권리조차 늦게 하사하셨죠.”
“…….”
“문안조차도 제게 귀한 시간을 내어줄 수 없다, 딱 잘라 말씀하시던 폐하께서. 오늘은 제 예를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셨습니다.”
“…….”
“왜 그러셨습니까?”
왜냐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황후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우아하게 웃던 얼굴은 올리비아의 이어지는 말에 딱딱하게 굳어 갔다.
“왜 굳이 모두의 앞에서 저를 망신 주려 하신 걸까요? 이전에는 저를 보지도 않은 채 그저 무시하시던 분이. 오늘은 왜 구태여 모두의 앞에서 제 기를 꺾으려 하셨습니까?”
“…….”
가느다란 숨소리가 응접실을 메웠다. 아직도 저를 탐색하듯 바라보는 황후를 마주하며, 올리비아는 붉은 입술을 비스듬히 올렸다.
“혹,”
제 예법을 받지 않을 때부터 들었던 아주 작은 의심. 그건 이제 확신이 되었다.
“제가 두려워지셨나요?”
“……감히!”
황후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렵다니! 한낱 천출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다니!
지금 이성을 잃는다면 올리비아한테 지는 거였다. 그걸 알고 있어 겨우 입을 막았지만, 모멸감에 온몸이 떨려 왔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말간 얼굴이 나직하게 웃는 게 또렷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
“저는 이제 내년 비칸데르 대공비가 되어 올 때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황후 폐하를 뵐 일이 없을 겁니다.”
“…….”
“하지만, 계속 저를 건드리신다면 저 또한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올리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 건방진 작태에 황후는 하, 나직한 숨을 내쉬며 비꼬았다.
“제법 담대한 꼴이지만,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고작해야 눈물 바람으로 대공에게 매달리는 것밖에 더 할까?”
올리비아가 묘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엇비슷한 높이에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황후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처지에 저와 비슷한 눈높이라니.
올리비아에게 어울리는 표정은 저런 게 아니었다. 비참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커다랗게 뜨는 것. 그래서 황후는 속살거리며 올리비아의 처지를 일깨웠다.
“가련하고 어리석은 올리비아. 네 힘으로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지.”
“그래서, 황녀 전하의 명령을 수행한 지난날을 제 무기로 삼아 볼까 생각 중입니다.”
“이 발칙한 게! 감히!”
결국 눈이 뒤집혔다. 황후의 새된 고함에도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사실을 짚어 주었다.
“제가 고작 추문 따위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예전엔 아무리 애를 써도 추문에 무뎌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 옆에는 에드윈이, 그리고 비칸데르의 모두가 있었다.
“하지만 황녀 전하께서는 아니실 겁니다. 늘 제국민들의 추앙만을 받아 오셨지 않습니까.”
그 모든 추앙의 배경을 만들어 준 건 바로 올리비아였다.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배려를 담아 말씀드립니다. 저를, 대공을, 그리고 비칸데르를 건들지 마십시오.”
분노에 찬 황후의 숨소리가 쌔근거렸다. 증오로 얼룩진 갈색 눈을 이렇게 똑바로 마주할 날이 올 줄 몰랐다. 엉망으로 저를 노려보는 황후의 모습을 본다는 건 더더욱 상상조차 못 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더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흐트러진 황후의 자세와 정반대로.
시선의 우위가 아주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을 때, 올리비아는 다시 천천히 말했다.
“적어도 지금의 저는. 지참금의 ‘명목’으로 받은 백수정 광산이 감히…….”
감히.
단단한 음성이 말한 단어에 황후가 헛숨을 삼켰다.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대체 누가 고귀한 황후에게 ‘감히’를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백수정 광산의 가치를 말하기에 그보다 적절한 단어는 없었다.
황후가 함부로 깎아내리듯 폐광산이라 말할 수 없는 귀하디귀한 곳.
“……들어, 왔어요, 올리비아.”
저항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슴지 않고 광산 안으로 들어갔던 에드윈.
믿을 수 없다는 듯 먹먹해지던 얼굴과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
그리고, 울음을 참던 젖은 숨결까지.
그 모든 것을 오롯이 떠올리며 올리비아는 진심을 다해 경고를 던졌다.
“……감히, 얼마큼의 무게를 지니는지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초록색 눈이 서늘하게 황후를 내려다보았다. 그 누구보다 위엄 있는 자태였다.
뺨이라도 한 대 내려쳐야 하는데. 황후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나직하게 말하는 올리비아의 분위기에 압도된 것을 믿을 수 없어서.
황후는 세게 주먹을 쥐었다. 타인을 향해 날을 세우던 손톱이 처음으로 자신의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 * *
한편 황제 궁의 집무실.
황제는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대공이었다. 정중한 인사말과 달리 내려다보듯 황제를 바라보는 붉은 눈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문가에 서 있는 시종장이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 저녁 식사에 대공을 초대한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다짜고짜 내 집무실로 알현을 오다니.”
불쾌한 심기가 뚝뚝 드러났다. 에드윈이 바라던 바였다.